생-기 세미나 시즌5 “버섯들과 함께, 세계의 패치들로 살기” 두 번째 시간에는 <세계 끝의 버섯> 2부를 읽고 모였습니다. 두 분의 멤버가 새로 합류하셨구요. 지난번에 말썽 많던 음향과 비디오를 보완하려고 장비와 책상배치를 조정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채운샘도 함께 하셔서 필요할 때 적절한 질문과 교통정리를 해주셨는데요. 돌아보면 참 기묘한 세미나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온라인, 오프라인, 새 멤버, 올드(?) 맴버, 크크랩팀, 정규직, 비정규직, 청년, 중년 등 온갖 패치들이 얽혀서 예기치 못한 긴장감과 웃음이 흐르는 배움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오리건주의 오픈티켓 참가자들을 꿰는 키워드가 ‘자유’였다면, 저희는 ‘배움’일까요, ‘생태’일까요? 뭐가 되었든 간에 여러 층위로 번역된 ‘버섯’이 이제는 혜화동의 한 공부방에서 여러 존재들과 접속되고(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 있음을 실감하게 되네요. 이번 주의 초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 패치워크로서의 존재. 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의 구체적인 면모들. 제 나름의 해석을 담은 과제들이 펼쳐졌고 이야기들과 생각들이 뒤섞였습니다. 그날 오갔던 이야기들을 스케치해보겠습니다.
구제salvage, 이 시대 자본주의의 생존법
2부의 제목은 ‘진보 이후에 : 구제 축적’입니다. 구제란 뭘까요? 왜 구제라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애나 칭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적 축적 양상을 ‘구제’라고 부릅니다. “축적은 항상 구제에 의존한다”고 하는데요. 그에 따르면 “부를 모으기 위해 생태적 과정을 통해 살아 있는 존재들을 끌어들”이는 것,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통제를 받지 않고 생산된 가치를 써먹는 것”(120쪽)이 바로 구제입니다. 공장 노동자는 자본가와의 계약이나 생산 규율에 결코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는 삶의 과정을 살고 있습니다. 자본가는 그런 존재의 활동들 중 “상품을 만드는 능력을 이용하지만, 그러한 능력의 모든 면을 생산해낼 수는 없”고 책임져 줄 수도 없습니다. 이는 곧 자본주의적 생산 바깥에 있는 능력, 가치, 지식, 활동, 기술 등을 자본주의적 가치로 변형하는 일입니다. 포경선들은 다인종 작살잡이들의 전문 기술 없이는 한 방울의 고래기름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자본주의적 자금 덕분에 항해할 수 있었고, 고래기름 역시 자본주의적 수익으로 전환됩니다. 토착 지식과 토착 능력, 그리고 고래의 생명 역시 투자와 자산으로 전환되어 상품 사슬로 유입됩니다. 이것은 구제의 한 예입니다. 멕시코 여성들이 집에서 자연스럽게 배운 바느질 능력이 피복 공장에서 활용되는 것도, 소농민 가족이 전통농법으로 생산한 농산물이 글로벌 기업에 납품되는 것도 ‘구제’입니다. 한마디로, “비자본주의적 가치 유형으로 창출된 가치가 축적 가능한 자본주의적 자산으로 번역되는 과정”(243쪽) 그것이 구제입니다.
문제는 왜 그게 ‘구제, 救濟, salvage’라고 이름 붙여지느냐 였습니다. 구제라는 가치 번역의 과정들로 이어진 글로벌 공급 사슬이 곧 현재 자본주의가 배를 불리는 방법입니다. 아무런 책임도 약속도 없이 수탈과 황폐화를 낳고 빠져나가는 원청-하청의 기업 구조도 구제 축적에 기반합니다. “구제 축적과 공급사슬 하청은 함께 성장했다.”(215쪽) 저희는 왜 ‘구제’라는 말이 쓰여야 했는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착취나 수탈 등이 훨씬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죠. 찾아보니 ‘salvage’에는 ‘구하다’는 뜻 외에도 착복하다, 횡량하다 등의 뜻이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왠지 다른 생각도 들었습니다. 애나 칭은 ‘salvage’의 원뜻인 ‘인양하다’, ‘건져올리다라’는 의미에 주목한 건 아닐까요? 그러면서 ‘exploit’같은 부정적이고 폭력성을 강조한 기존까지의 표현과는 거리를 두려는 것 아닐까요? 물론 구제가 그 뒤에 많은 아픔과 가난을 남긴다고 해도, 그것은 원론적으로 자본주의가 자신의 외부의 비규정적이고 다채로운 삶의 배치들에 의존하고 거기서만 가치를 모을 수 있음을 애나 칭은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구제 축적은 차이의 세계를 드러낸다.”(248쪽) 구제는 다종의 생계 리듬들이 공존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틈새와 균열들은 언제나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삶의 가능성을 반짝반짝 드러냅니다. “차이들의 내부와 외부에는 구제 축적에 맞서거나 그 속에서 항해하며 방향을 탐색하는 정치적 활동을 건설할 여지가 있다.”(126쪽)
모임과 패치워크 : 부분들의 합 이상의 ‘사건’
“배치는 삶의 방식을 모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식을 만들어낸다. 배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된다.
어떻게 모임은 때때로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사건happening’이 되는가?” (...) 배치에서는 의도치 않은 조율coordination 패턴이 발달한다. 그 패턴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다양한 삶의 방식이 모여 빚어내는 시간적 리듬 및 규모의 상호작용을 지켜본다는 뜻이다.“(57쪽)
과제에 대한 코멘트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었고 생각들이 오갔습니다. “패치의 얽힘이 부분들의 합 ‘이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건, 1+1이 2냐 3이냐 그 이상이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분의 합보다 더 큰’이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시너지’가 아니었습니다. 양적인 더와 덜도 아니고 좋다 나쁘다도 아닙니다. 저희는 그것을 ‘예상치 못한 것의 발생’이라고 얘기했었는데요. 애나 칭의 질문에 다시 주목해보면 방점은 ‘사건’에 있습니다. 모임은 총합이나 전체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사건을 일으킵니다. 부분들 각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웃음, 실수, 임기응변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그로부터 전에 없던 색채, 뉘앙스, 울림과 같은 효과가 산출되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창발’입니다. 그 순간 부분들은 지금까지 갖고 있던 성질로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됩니다. 애나 칭은 그 복수적 변형(부분-전체-부분)을 오염이라고 표현했었습니다. 오염을 통해 세계-만들기 프로젝트가 변화하면 상호적인 세계와 새로운 방향이 창발할 수도 있다.”(63쪽)
패치-워크가 사건과 창발의 좋은 예가 됩니다. 고유한 색과 무늬를 가진 천 조각은 그 옆에 어떤 조각이 붙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색감과 아우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는 옆에 붙은 그 패치도 마찬가지죠. 볼품없는 빨강도 노랑이나 파랑이 붙으면 더없이 우아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과 만나더라도 그대로인 정체성 따위는 없음을 보여줍니다. 자립은 불가능하죠. 오직 마주침과 그로 인한 오염만이 존재를 형성합니다. 물론 어떤 오염이나 섞임도 거부하고 자기 홀로 독립적 구조를 만들겠다는 고집스러움 자체 역시 창발을 피해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자명한 자연적 사실입니다. 재미난 예시가 하나 있습니다. 오리건주 ‘오픈티켓’의 한 패치를 이루는 일부 백인들의 ‘전통주의’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인종 통합에 반대하고, 다른 집단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가치를 즐기고 싶어한다. (...)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인종 통합에 반대하는 정서가 미국 역사상 가장 코즈모폴리탄적인 문화 형성에 일조했다.”(198쪽)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상이군인들 및 우파적인 시골 백인들은 복지국가의 유산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버려지고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을 느끼며 인종적 융합과 강압적인 동화 정책에 분노하죠. 그리고 80~90년대 미국은 고용정책을 포함한 이민자 복지제도를 대폭 줄입니다. 그들의 생계를 보장하지 않고 그들을 미국적 문화에 동화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
그들이 동화를 해체하자 새로운 형성체가 창발한다.” 중앙에서 세운 방침이 없기 때문에 이민자와 난민은 자신들의 이야기, 전쟁 경험, 언어, 문화를 붙들고 생계의 가능성을 꾸려냅니다. 패치들의 엮임은 더 다채로워집니다. 물론 그런 삶이 쉽거나 유복하지 않다고 지적할 수 있겠지만, 과연 미국적으로 동화된 이민자들보다 자유롭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배타주의가 만들어내는 다문화주의. 오픈티켓의 코스모폴리탄적 패치워크 안에서 백인들이 풍기는 분위기 또한 달라집니다. 그들은 여전히 꽉 막혀 있을 수 있지만 전처럼 위압적이고 폭력적이지만은 않은 구성원입니다. 이렇게 자립을 세팅할 때조차 창발은 일어납니다. 보르네오섬의 숲이 전부 벌목되어도 주민들은 버려진 기계를 분해해 금속 조각을 팔며 살아갑니다. 폐허가 결코 모든 가능성을 밖에서 닫아버릴 수는 없다는 것. 우선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근대의 두 환상과 위생주의
이쯤에서 이번 세미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배움 하나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채운샘께서는 애나 칭의 관점이 너무도 탁월하게 근대 담론을 넘어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맑스의 이론을 포함해, 정신의 문제를 건드리든 경제나 복지나 생태의 문제를 건드리든 근대 담론의 대전제라고 할 만한 두 가지 환상이 있습니다.
1) 우리는 사태의 원인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제어할 수 있다.
2) 문제가 있다. 문제는 극복되어야 한다.
애나 칭의 사유는 근대의 약속이 끝난 자리에서, 저 두 환상을 다시 불러오지 않으면서 나아갑니다. 그가 출발하는 자리는 “
우리 것인 줄만 알았던 통제된 세계가 실패”(23쪽)한 곳입니다. 근대는 말합니다. 저기, 가난이 있다. 야만이 있다. 불결함이 있다. 공장, 학교, 병원, 군대를 지어댑니다. 그리고 약속합니다. 노력하면 보상 받는다, 좋은 의도는 좋은 결과를 낳는다, 근면하게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 이것을 믿은 건 우리의 패착이지요. 근대담론은 계속해서 문제를 제시하고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그 힘으로 달려온 진보는 폐허를 남겨놓았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절망할 때 어딘가에서는 똑같은 목소리가 울립니다. ‘저기, 재건해야할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창발의 예에서 보았듯, 하나의 사건은 인간이 알음알이로 구성한 인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원인’은 언제나 사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해결’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나 칭은 해결을 말하지 않습니다. 감히 원인을 지적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엉망진창이라고 말해지는 곳에서도 자신들의 활발발한 존재감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불확정성의 공포 속에서도 아직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22쪽)하는 삶들을 발견하기 위해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정성스레 전달할 뿐입니다. 이것은 오염이나 파괴, 벌목된 숲, 매워진 갯벌, 보로 막힌 강, 오염수가 퍼진 바다를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애나 칭이 긍정하는 것은 폐허 자체가 아니라, 폐허에서도 다시 시작하는 삶입니다.
왜 무기력한가? 특히나 생태 문제 앞에서 우리가 떨어지곤 하는 깊은 무력감에, 저 근대적 환상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신이 하는 행위가 결과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무기력합니다. 결과주의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적어도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일렁이며 상황을 절망적으로 진단합니다. 채운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못 바꾸더라도 어떻습니까. 지금 여기서 시위를 하든, 세미나를 하든, 전기를 줄이든, 누군가를 설득하든, 글을 쓰든, 전과는 다르게 뭔가를 한다는 일 자체가 중요합니다. 결국 후쿠시마 오염수가 방류되었습니다. 새만금이 완공되었고 사대강도 강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저희들의 작은 행동과 목소리가 아무 소용이 없었음을, 그것들은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음을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파괴가 일어난다면 다시 싸워야 합니다. 싸우되, 다시는 방류되어서는 안 되게 막아야 한다거나, 원래의 바다로 되돌릴 수 있다는 환상은 내려두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싸우는가? 그것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고 그대로 사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기에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이고 목소리를 내고 삶의 방식을 재고하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이나 당위 때문이 아니라, 그것조차 나의 욕망이기 때문에.
곰팡이는 근대의 환상과 전혀 다른 삶을 보여줍니다. 곰팡이는 어떤 것이건 ‘벌어진’ 그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버섯은 곰팡이들의 자실체입니다. 버섯과 접속하는 사람들은 곰팡이 적인 삶의 리듬들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는 그 자립성으로 인해 대표적인 플랜테이션 작물인 수수와 접속한 사람들과는 다르죠. 식물들 중에서도 다른 식물들을 다 못살게 만들고서야 자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버섯은 숲의 균형이 망가진 곳에서 균들의 지하적 망을 만들면서 살아가고, 그 살아감으로 다른 나무들이 양분을 얻어가게 합니다.
근대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환상이 있는데, 그것은 위생주의입니다. ‘문명은 깨끗하다!’ 이것은 오래된 구호죠. 야만과 더러움을 동일시하고, 오염이나 부패와 같은 말들을 비문명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설정한 역사가 깁니다. 우리가 오염이라는 개념이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애나 칭은 근본적으로 부패와 오염이 모든 것의 본질임을 강조합니다. 썩지 않으면 생기지 않고, 오염이 없으면 존재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불결함-미개함-위험함-악으로 계열화시키는 위생주의는 순수하고 자립적인 인간, 민족, 성, 자연의 규정성을 강조합니다. 이 단일한 경계들을 뒤섞고 넘나들면서 위생 자체가 환상임을 보여주는 패치들의 ‘자연사’들을 연결시킬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무엇이 아직 살아가고 있는가를 볼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시 주절주절 후기가 길어졌는데요. 아직 ‘소외’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적지도 못했네요. 저희는 버섯 채집인들의 버섯 줍기에서 현금으로 이어지는 생산과 이 시대 우리의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의 차이에 대해 길고도 어려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자유롭다고 여겨지는 저희의 플랫폼 노동은 자본주의적 생산(자신에 의한 자기 착취)만으로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단지 ‘내가 자유롭다’는 느낌만으로 충분한가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채운샘은 일단 자기라도 자유롭다는 게 왜 문제냐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잘 안 풀렸는데요. 그건 제가 저도 모르는 새, 배달이나 영상 제작이나 일일 알바 같이 ‘유연한 노동’(긱 노동)이 ‘내가 하는 만큼 번다’는 환상으로 더더욱 계산적이게 되고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투자가로 만든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층적인 ‘구제’에 휩싸인 것이죠. 하지만 애나 칭은 구제를 부정적으로만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 열릴 여지가 있음을 명시했습니다. 채운샘은 우리의 24시간이 다 자본주의적 논리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틈, 뜻밖의 웃음과 여유가 자리 잡을 여지는 항상 발생하고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더 좋은 자본주의나 자본주의의 극복을 꿈꾸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순간을 만드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노동의 취약함과 틈새는 무엇이 있는지 더 생각해보고 싶어집니다. 댓글-패치들로 이야기의 틈들을 열어주세요!
*다음 시간에는 3부 ‘교란에서 시작되다 : 의도치 않은 디자인’(269~443쪽)을 읽고 옵니다. 과제는 나눠서 하기로 했었죠! 1조 선생님들께서 과제를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1조 최난희 김남순 라니 문제현 송송이 양희욱 연두 나은동
2조 고승현 나인영 최난희 김수빈 이호정 송보은 허해민 강신우
역시 민호샘! 세미나에서 나온 이야기와 채운샘이 말씀하신 내용과 담론들이 잘 녹아 들어간 후기를 읽으니 그날 아리송하고 풀리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정리가 됩니다.
대부분 공감이 가고 이해가 되는데 시간 관계상 깊이 들어가지 못한 '소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관심있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고요! ㅎ
저는 책을 읽으며 '구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구제 축적'은 비판적으로 파악했어요. 그 이유는 구제 축적이 '소외'하고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나 칭은 "이 책에 담긴 나의 생각 중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첫째, 소외는 자본주의적 자산이 형성될 수 있는, 얽힘이 풀린 형태다... 투자자가 원하는 자산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다. 따라서 소외는 축적, 즉 투자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관심사다. 축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소유를 권력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자본이 있는 사람들은 공동체와 생태계를 전복시킬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 및 비인간의 방식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생계 방식으로부터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하는 번역 기계다.(245쪽)" 고 말하고 있지요. 여기서 저는 공동체와 생태계를 전복시키는 자본을 부정적인 의미로 읽었고 자본이 생산자와 상품의 얽힘이 풀려야 형성될 수 있는, 즉 소외를 통해서 구제의 축적이 가능하기에 이 문제를 비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채운샘이 말씀하신데로 자본주의 하에서 어떤 상품이든지 소외의 시간을 맞을 수 밖에 없지만, 또 그 소외의 시간에 구제를 축적하기 위해서 자본가들이 몰려들어 자본을 축적하는 공급사슬의 다양한 패치워크들이 탄생하지만, 우리는 버섯 채집인들처럼 소외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노동과 생산물의 얽힘을 더 길게 유지하도록 하여, 즉 소외되지 않고 비자본주의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분명 자본주의를 악으로 규정하고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파악하여 극복해야 할 체제로 보는 시각은 경계해야겠지만 자본과 돈을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돈은 사회적 기술이자 도구로 세계를 교란하고 오염시키며 다양한 경제의 양태-버섯 채집인의 트로피-로 나타날 수 있지만 , 자본은 축적과 확장을 목적으로 하며 그 자체로 자립 가능한 단일한 속성이기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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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샘들은 이 '소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날 세미나에서 시간이 모잘라 나누지 못했던 샘들의 다른 생각들도 여기서 다시 질문하고 풀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민호샘, 혹시 정리 기계입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2번 읽었습니다.
민호샘이 ‘세미나 분위기가 기묘했다’라고 표현한 부분에 공감합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올드한’ 온라인 멤버인 저로서는, 이런 상황이 좀 신선하긴 합니다. ㅎㅎ 저번 주는 음향 상태가 좋지 않아 제가 물속에서 물 밖의 사람들 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는데, 이번 회차는 좀 나았어요.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책이 잘 읽히는 편인데도 계속 뭔가 찜찜한 부분이 있어요.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며 넘어가는 건가? 이런 느낌이요.
애나 칭이 자주 쓰고 있는 단어들이 제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뜻과는 다소 달라서 유심히 보게 됩니다.
단어든, 상황이든, 이념이든…이분법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데 정말 익숙함을 느껴요. 구제’라는 단어도 그렇고 3부에서 나오는 ‘교란’이란 단어도요. 예를 들어 어떤 생물이 ‘생태교란종’이라고 낙인이 찍히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잖아요. 얼마 전에 친구들과 연못 근처를 산책하는데, 물가 건너편 바위 위에 두꺼비인지 개구리이지 조그만 녀석이 앉아 있더라고요. 누군가가 “남생이다”라고 소리쳤고, “진짜?” 하면서 다들 몰려들었어요. 그런데 잠시 후 누군가가 “아니다. 붉은귀 거북이다!”라고 외쳤어요. 남생이는 멸종위기종이고 붉은귀 거북이는 생태교란종이라고 해요. 그 이후의 이야기는 하하하…@@ 이런 시트콤 같은 상황에 신우샘이 얘기해보자 하셨던 ’소외’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눈이 밝은 누군가에 의해 남생이에서 붉은귀 거북이로 판명되는 순간, 붉은귀 거북이와 저희들 사이에 ‘소외’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붉은귀 거북이의 자초지종을 알아보지도 않고, ‘희소’로서 상대의 가치를 평가하고 악담을 퍼부으며 그 자리를 휙 떠나버렸으니까요. 이 상황에서의 ‘교란’은 분명 성가신 문제를 발생시켰어요. 교란종이 된 원인은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거고요. 포획대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게 붉은귀 거북이의 일상이겠지만, 화창한 가을날, 바위로 올라와 햇볕을 쏘일 수 있는 따뜻한 순간이 붉은귀 거북이에게도 있었네요. 채운샘이 자연을 낭만적으로만 보는 것을 경계하라 하셨는데, 또 낭만적인 느낌으로 댓글이 마무리가 되네요.
와 재밌는 경험을 소외와 엮으시면서 이번주 주제인 교란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시네요! ^^ 샘들께 소외된 붉은귀거북의 교란이 실제 우리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궁금해지네요 지난 주가 경제 이야기라면 이번 주는 생태니 더 흥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지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이제 그만 소외되고 함께 교란되도록 하겠습니다~ㅎ 댓글 릴레이 감사합니다 !
“ 다시 파괴가 일어난다면 다시 싸워야 합니다. 싸우되, 다시는 방류되어서는 안 되게 막아야 한다거나, 원래의 바다로 되돌릴 수 있다는 환상은 내려두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싸우는가? 그것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고 그대로 사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기에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이고 목소리를 내고 삶의 방식을 재고하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이나 당위 때문이 아니라, 그것조차 나의 욕망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나의 욕망이기 때문이라는 말에는 공감해요. 하지만 그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조금씩 다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변화를 욕망하기에 싸워요. 두 번째 방류를 막고 싶어요.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세워 그곳에 사는 다음 존재를 파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싸우고, 사대강이 언젠가는 완전히 폐기되었으면 하기 때문에 싸워요. 그 환상을 버린다면 저는 싸우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