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5 팀은 버섯을 따라 세계 끝을 헤매는 중입니다. 세 번째 시간은 3부 ‘교란에서 시작되다 : 의도치 않은 디자인’을 읽고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답이 없는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나눴습니다. 애나 칭은 2부의 마지막 챕터에서 “이 책의 다음 부분에서는 인간 너머의 얽힘에서 펼쳐지는 대안 정치에 대해 다루겠다”(249쪽)고 적었는데요. 2부가 ‘구제 축적’이라는 키워드로 20세기 후반의 경제 패치들의 이야기를 톺아 보여줬다면, 3부는 숲의 풍경에 초점을 맞춰 교란과 우발성을 탐사합니다. 도통 요약이 어려운 3부의 방대한 논의들을 채운샘은 ‘역사’라는 키워드로 엮어보라고 하셨는데, 저희의 셈나는 역시 빗나가 의도치 않은 디자인 비스무리한 것을 남긴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샘들께서 길고 짧은 패치를 덧붙이셔서 후기를 이어가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교란 : 의도-계획-예상-인간 밖으로 내모는 사건의 시작점
“이 책의 3부는 교란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교란을 시작점, 즉 행동을 위한 첫 단추로 만든다. 교란은 변형적인 마주침을 위한 가능성을 재배치한다. 풍경의 패치들은 교란에서 등장한다. 그리하여 불안정성은 인간을 넘어서는 사회성에서 일어난다.”(271쪽)
교란이라는 개념은 저희에게 하나의 교란을 일으켰습니다. 교란으로서의 풍경의 운동을 읽으며 생태적 문제가 전보다 가벼워졌다는 의견도 있고 여전히 무거워졌다는 의문도 있었습니다. ‘오염’ 개념 앞에서 헤매던 첫 시간과의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다행인 점은 저희에게는 그때보다 지금 ‘기꺼이 혼란에 빠질 근기’가 조금 더 생겨난 것도 같습니다.
발단은 이러했습니다. “우리는 인간 세상에서의 교란들(이를테면 전쟁)도 자연의 관점에서처럼 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저는 희욱샘께서 던져주신 이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에서 인간들만을 보고 살아온 우리에게는 거리감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애나 칭이 이야기하는 개벌된 숲, 산불, 홍수, 침식된 토양 등을 ‘실질적으로’ 망가졌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는 우리가 식생에 대한 지식도 없을 뿐 아니라 그곳을 직접 거닐어 보지 못해서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숲은 교란되었다고 해도 숲으로 상상됩니다. 한편 우리에게는 정말 거부감을 일으키는 폐허나 교란의 이미지들이 클리셰처럼 존재합니다. 쓰레기 산, 중금속에 오염된 토양, 폐수로 부글거리는 호수, 기름이 유출된 바다, 폭격 맞은 시가지 등이 그것이죠. 우리에게는 이런 교란의 풍경들이 더 자극적이고 시급해보입니다. 그리고 허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쁘게’ 보이죠. 마치 방사능 오염수처럼요. 이 끔찍한 모습들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숲의 교란’은 왠지 평화로운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문제 제기에 이입되었습니다. 애나 칭의 의도를 못 따라가고 있다고 해도, 꼭 물고 늘어져서 교란을 와 닿게 이해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 가지 위험 혹은 이중의 구속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오염, 교란, 폐허 등을 너무나 손쉽게 자연의 아름다운 원리로 낭만화할 위험.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사태들에 대한 선악호오의 인간적 분별들은 방치할 위험.
우리의 표상과 근심이 윙윙 울리는 이 상황에서 우선 필요한 일은 애나 칭의 이 문장을 깊이 깊이 곱씹는 일인 듯합니다.
“교란을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인문학자는 교란을 손상과 관련짓는다. 그러나 교란은 생태학자가 사용하는 개념으로, 항상 나쁜 것만도 아니고 항상 인간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일으키는 교란은 생태 관계를 유발하는 독특한 능력이 아니다. 게다가 교란은 하나의 시작으로, 항상 도중에 일어난다. 즉, 교란이라는 용어에는 교란 이전에는 조화로운 상태였다는 전제가 없다.”(285쪽)
처음 읽을 땐 몰랐지만, 돌아보니 저희가 묶여있는 문제들에 대한 대답들이 촘촘히 담겨 있는 명문이었습니다! 교란의 대표 이미지로 전쟁, 플라스틱 섬, 방사능, 중금속, 새만금 등을 떠올릴 때, 우리에게 강하게 튀어오르는 것은 손상의 이미지입니다. ‘인위적인 것’ 앞에서 본연의 가치와 기능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파괴된 자연. 우리는 교란을 좋은 것에 가해진 나쁜 것, 얼룩, 오점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모두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다고 여기죠. 그래서 선(善)은 오로지 인간이 물러서고 자연을 원래 모습대로 내버려두는 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에게 숲의 복원은 언제나 개입을 멈추고 번창하게 방임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연적인 것(선)과 그것을 폐허로 만드는 인간 활동(악)이라는 이분법은 굉장히 전형적인 근대적 문제설정입니다. 여전히 인간 대 자연. 좋았던 세계와 나빠지는 현재, 진보와 쇠퇴. 인간이 문제의 주범으로 지목되면, 언제나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거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이 다시 한번 지목됩니다. 가해자이자 보호자인 인간. 하지만 교란은 그런 관점 모두를 넘어가고자 하는 개념입니다.
교란은 손해, 쇠퇴, 부조화, 붕괴, 실패, 악, 무질서, 퇴보가 아니라 변형입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와 멀리 떨어진 숲에서만 일어나는 사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적 감정을 고도로 건드리는 전쟁, 범죄, 전염병에만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교란은 무엇보다 생태학적 개념으로 수많은 행위자-패치들이 동시에 얽힌 풍경적 배치에서의 사건입니다. 인간은 그중 한 패치인데, 여기서 추상적인 ‘인간’을 설정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풍경 개념과 함께 보면 교란은 상시적입니다. 배치 안에서 오염이 항상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란은, 단지 그 풍경의 현 질서가 다른 질서로 변형되는 사건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교란은, 교란 이전에 교란과 반대되는 조화가 존재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란은 특정한 화음이 시작되는 이정표이자 체크포인트이지요. 그런 점에서 매번의 교란은 매번의 시작점입니다. 교란은 배치의 선율에 차이를 만들면서, 역사를 구성해내는 불협화음-협화음입니다. 교란의 본질은 타락이나 악화가 언제나 재배치, 재설정, 개방성입니다. 살아가고자 하는 방식들과 힘들이 다르게 펼쳐지는 일이죠.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교란은 좋은 것(허용할 만한 것)과 나쁜 것(허용할 수 없는 것)으로 나눠지는 것 같습니다. 곰이 연어를 마구 잡아먹는 건 봐줄 수 있지만, 수력발전소의 보가 연어를 막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태풍이나 산불은 참을 수 있지만 쓰레기 섬이나 오염수는 참기 어렵습니다. 질적으로 다른 사건이라고 생각되지요. 애나 칭은 “교란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는 규모와 같은 여러 요소에 달려 있다”(284쪽)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교란인지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관점의 문제”이며 “교란을 산정하는 단일 기준은 불가능하다”(286쪽)고 말합니다. 관점의 문제. 이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저희 안에서는, 그러면 모든 관점을 다 고려해서 교란을 판단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행동의 문제에 있어서 너무나 피곤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산불은 폰데로사소나무와 로지폴소나무에게 다르고, 고사리와 송이버섯에게 다른 사건입니다. 또한 화전농 원주민과 산림청 직원에게 다른 사건이지요. 샘들의 과제에서 제시된 울진 금강송 숲이나 지리산 산불도 매번 여러 관점을 교차시키고 있습니다.
시간이 너무 급박한 관계로 여기서 후기를 마치겠습니다만, 여전히 아리송한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사토야마 숲에서 그 풍경 만들기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멋지지만, 그렇게 표토를 긁어내고 활엽수를 베어내는 일이 결국 인간-소나무-송이버섯에게만 유용하게 하기 위해 다른 생물들을 못살게 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교란을 악으로 보는 일이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이라면, 우리는 여러 관점들 중에서 어떤 관점을 고려해야 하는 것인지 등의 의문이 들었습니다. 3부의 많은 이야기 중 역사를 포함해 많은 부분을 다루지 못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댓글로 도와주셔요~
*다음 주에는 <세계 끝의 버섯> 4부(447~505쪽)까지 읽고 과제를 적어옵니다!
과제는 2조 고승현 나인영 최난희 김수빈 이호정 송보은 허해민 강신우 샘들께서 해주시겠습니다!
교란의 한자뜻을 찾아보니 '흔들면서 어지럽힌다.'는 뜻이며 '교'와 '란'의 뜻이 비슷하게 어지럽힌다는 뜻이더라구요. 저는 아마도 전쟁으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와 교란이라는 단어를 엮어보고자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자연에서의 교란은 왠지 평화로워 보이기도 했고 의심없이 교란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교란에 대해 집요하게 파헤쳐 본 글을 읽으면서 제가 어느 지점에서 포인트를 놓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교란은 상시적이고 오염처럼 항상되는 현상이며 풍경의 현 질서가 다른 질서로 '변형'되는 사건, 변형적인 마주침이라는 게 사실 탁 와닿지는 않지만 버섯과 숲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교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장을 준비하며 어지럽게 변형되어 다가온 '오염',과 '교란'의 개념 정리를 더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민호쌤 글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인간으로서가 아닌 풍경의 일부로 세계에 합류하고 있다는 게 실감되었어요. 그리고 그 실감이 왠지 모르게 세계를 더 들여다보고 싶게 만듭니다. '가해자이자 보호자인 인간'으로서의 위치에 서 있을 때 느껴지는 죄책감이나 찝찝함, 의무감, 열정, 무기력 속에 있을 때와 조금 다른 모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엉망인 상태를 발견해내는 시선 속에 담긴 교란이라는 개념 덕분에 이 세계의 참여자들, 역사의 주인공들, 그리고 그 역사들이 궁금해져요.(소나무재선충의 여행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었죠. 딱정벌레가 다른 나무 가고 싶을 때에 딱 맞춰서 등에 올라타고 가다니)
사토야마 숲 활동가들이 풍경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흐름을 통제하거나 자연을 구원하려 하지 않고, 단지 또 하나의 참여자로서 비인간 활동과 같은 방식으로 교란을 보태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교란은 시작점이고 또 다른 교란을 낳기에 어떤 결과로 나아갈 지 알 수 없으니 오감을 동원하여 매우매우 섬세하게 관찰하고, 행동하고-실수하고-반성하고-다시 행동하는 원칙을 세우는 등의 노력을 하는 게 좀 색다르게 느껴집니다.ㅎㅎ 이런 방식도 있구나, 하고요.
흠. 민호샘이 던져주신 질문과 아리송함에 대한 응답은 못 되었지만..
세미나에서의 질문을 연장해주신 후기 덕분에 애나 칭의 개념과 문제의식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되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세미나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정리된 후기도 읽으니 또 질문들이 생겨요.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는 상태가 되는 것이 좀 즐겁네요...!
저희가 인간세상에서의 교란의 예로 전쟁을 말할 때, 인간 세상과 자연을 구분해서 생각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숲에서도 인간들이 살고 있고, 행위자 중 하나로 존재하잖아요. 인간 사회라는 단어 자체가 이분법적인 구분을 담고 있는 단어가 아닌지… 애나 칭은 그 둘의 경계가 구분 짓기 어려운 지점을 보여주는데, 계속해서 구분 짓기를 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또 계속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돌아가는 건 인간 사회, 인간의 행동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그리고 관점의 문제..! 선과 악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때 알아차리기와 같은 기술이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또 다른 관점을 채택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관점은 존재할 수가 없으니 복잡한 얽힘을 들여다보기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공들여 듣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세미나 중에 (아마도 호정샘이셨던 것 같은데…) 사건에 의존하거나 빚을 진 채로 세계가 작동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하셨는데, 그 부분이 와닿았어요. 하나의 의도나 목적에 의해서 세계가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건들에 의존해서 세계가 굴러가는 것이라면 그런 사건들을 크고 작게 만들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닐까… 했습니다!
민호샘이 제기한 아리송한 부분에 대해서 생각나는 바를 써봅니다.
저는 숲에서 일어나는 교란이 인간에 의한 교란-전쟁 등-보다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곰이 꿀을 먹기 위해 꿀벌집을 파괴하는 것과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가자 지구가 붕괴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애나 칭의 말처럼 우리는 규모가 커지면 문제라고 느끼기에 인간의 관점에서는 꿀벌집이 훼손되는 것은 별 문제가 안될 수 있겠지만...
꿀벌에게는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숲에서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마한 경쟁이 일어나고 있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얽혀있는 지점으로 들어가면 일본의 '사토야마' 숲에서 활엽수를 베어내는 것도 그냥 마구 잘라내지는 않습니다.
일본의 활엽수는 주로 참나무-도토리 나무, 상수리 나무 등으로 불리는-인데 지역을 정해놓고 30년 이상된 큰 나무들만 잘라냅니다.
그것도 다시 자라날 수 있도록 밑둥을 잘 남겨놓습니다. 그럼 이 참나무종들은 놀랍게도 다시 싹을 틔우고 자랍니다. 어마한 생명력!
그렇게 지역과 기간을 정해놓고 돌아가며 잘라낸 참나무들은 연료로 쓰이고- 숯은 뭐니 뭐니 해도 참숯이 제일 좋지요!
요즘은 그 잘라낸 참나무들에 표고균을 심어 버섯을 키워내기도 한답니다.
숲을 덮은 큰 참나무들이 잘려 나가면 소나무 뿐만 아니라 다른 작은 나무들이 자랄 수 있어서 다종의 식물들이 또 생겨날 수 있고요.
가을이 오니 단풍이 아름다운데 단풍 나무도 그렇게 숲에서 자라나는 나무들 중의 하나라는.. !
문제는 책에도 나와 있듯이 숲이 단일화-일본의 경우 삼나무, 편백나무화-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는 이따 세미나 시간에 이야기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