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는 잠복해 있는 공유지의 알아차림으로부터
여러 방면에서 생각과 감각을 두드려주는 <세계 끝의 버섯>을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그런 감동과 혼란을 마주하며 이번 주에는 ‘나에게 생태적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쥐고 과제를 써 보았는데요. 제 느낌으로는 무엇보다도 ‘용기’의 문제가 공통적으로 등장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묶여 있던 아래와 같은 상황으로부터 다른 힘을 얻을 길 말이죠.
“생태 문제를 떠올릴 때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뭘 할 수는 없는 것 같고, 하기도 싫고, 근데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요란한 감정 속에 있게 되었다.”(이호정 샘 과제)
언제나 ‘생태’, ‘환경’, ‘기후’ 등의 용어는 우리 앞에 두 가지 정서를 일으켜 왔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다 망쳤다는 죄책감과 그러니 당장 이런저런 실천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 전자는 우울함과 분노를, 후자는 책임감과 약간의 만족감을 낳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모두 너무나 비장하다는 것, 가볍지 못하다는 것, 그렇기에 자꾸만 무기력으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애나 칭은 우리에게 여러 층에 걸쳐 이 요란한 감정적 수렁에서 걸어 나올 길을 열어줍니다. 무엇보다 그건 고집스럽게 사태에 중심에 인간만을 놓아두려는 시야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요.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도 근대 담론을 잘 못 벗어납니다. 복잡한 정서의 기반에는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인간이 해를 입혔다. 그러므로 인간이 기술로 해결할 수도 있다.’ ‘인간만 없으면 된다.’ 언뜻 상반되게 보이는 두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이라는 배치에서 인간이 상황을 좌우할 수 있는 최고 심급이라는 점은 같죠. 파괴자이자 빌런인 동시에 해결사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중심주의, 인간예외주의, 인본주의는 계속됩니다. 오직 인간의 이야기죠. 이런 이야기는 빙글빙글 돌다가 우리를 주저앉히기만 합니다.
이야기를 바꿔야 합니다. 인간적 꿈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인간적 꿈을 부풀리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갖기 원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이야기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오래 훈련되어온 터라 익숙치 않습니다. 다른 눈, 다른 귀, 다른 피부를 갖지 않는 한, 송이버섯―삶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곳에서도 살아가는 것들―을 만나기란, 그리고 그 냄새의 향긋함을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애나 칭의 이런 말처럼요.
“내 눈에는 흙과 가지만 앙상한 소나무박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양동이와 막대기를 든 카오는 아무것도 없는 땅을 깊이 찌르더니 두툼한 버섯갓을 꺼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하지만 이제 그곳에 버섯이 있었다.”(41쪽)
‘알아차림’, 즉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기’를 하나의 연구방법으로 제안하는 애나 칭은 끊임없이 ‘가장자리’와 ‘잠재적인 것’의 현재함을 말합니다. 배치 속에는 우리의 앎,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시야, 우리의 판단과 의도와 예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효과들과 삶들이 언제나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 영역은 여러 개념들로 포착됩니다. 언제나 부분들의 합 이상의 사건이 되는 ‘마주침’, 다성음악에서의 예기치 못한 ‘협화음과 불협화음’, 패치들의 얽힘에서 나타나는 ‘예기치 못한 조율’, 자본주의 공급사슬에서의 ‘주변자본주의적 영역’, 산림정책에서의 ‘의도치 않는 디자인’, 모든 것이 사유화된 공간 속에서의 ‘잠복해 있는 공유지’.
애나 칭의 버섯 찾기는 난희샘께서 짚어주신 이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제도화된 소외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얽힘의 일시적 순간들을 찾아본다. 그러한 곳들이 협력자를 찾을 장소다.”(450쪽) 협력자들을 만날 수 있는 그곳, 아직 삶이 끝나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그곳은 자본주의 바깥이나 너머가 아니라 그 한복판입니다. 그 자리는 언제나 일시적이고요. 하지만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라고 해서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되는 건 아닙니다. 번역은 상시적입니다. 송이버섯이 자본주의의 관문을 들락날락하며 트로피와 상품과 선물 사이를 오가듯, 잠복한 공유지는 사유지의 지도를 비집고 나오고 또 들어갑니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곳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450쪽)는 사실에서 출발해, 누가 누구와 더불어 어딘가를 역동적으로 가장자리화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고자 공을 들이는 일. 그것이 우리에게는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이 알아차림과 용기는 그냥 만나지지는 않습니다. “더는 듣기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다른 유형의 각성이 동원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종류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이는 제인 베넷이 말한 것처럼 의인화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목소리 없는 존재들의 몸짓을 적극적으로 번역하는 과정을 요합니다. 그렇게 능동적으로 듣는 일,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일, 다른 무언가가 되는 일. 딱 그 노력만큼 우리는 무력감에서 한 발 나와 기쁨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단, 이때 오래된 환상과는 결별해야 합니다. “잠복해 있는 공유지가 모든 이에게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 “협력이 이루어지는 모든 경우마다 어떤 이들에게는 기회를 주고 다른 이들은 배제시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451쪽). 우리는 갈등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포함하면서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기쁨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잠복해 있는 공유지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일부 급진적인 사상가들은 진보가 우리를 구원하는 유토피아적인 공유지로 이끌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와 반대로, 잠복해 있는 공유지는 문제로 에워싸인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것을 절대로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452쪽)
춤춘다는 것 : 폐허를 부활시키는 생명선-그리기
잠복해 있는 공유지나 가장자리는 애나 칭에게 제목에서처럼 ‘세계 끝’으로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상징이지만 다분히 어슐러 르 귄의 단편 <세계 만들기(1981)>에서 차용한 문구이기도 합니다. 그는 세계를 만들되 새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들을 모으고, 출신을 잃어버리고, 또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줍는 일로 만들자고 말합니다. “뭔가를 발견하는 것이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하죠. 그리고는 그런 완성되지 않은, 아직도 수수께끼인 곳이 ‘세계 끝’이며 거기서 언제나 부활의 춤을 추게 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면 물론 오래된 세계로 시작해야죠. 세계를 하나 찾으려면, 잃어버린 세계가 있어야 하는 지도 몰라요. 잃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부활의 춤, 세계를 만드는 춤은 언제나 여기 세상 끝에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안개 낀 해안에서 추게 되어 있었으니까요.”(92쪽)
춤! 저희의 과제들에는 춤추듯 어울려 살기, 춤을 추는 태도 같은 표현이 나와서 함께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간 비장함이나 결핍에 대한 슬픔에서 멀어진 가벼움이었습니다. 애나 칭 자신의 작업을 떠올려보기도 했는데요. 주변자본주의적인 삶의 리듬들을 발견하고, 이야기를 엮고, 호기심으로 뻗어나가며 경계를 넘어 연구하고, 현장을 거닐고... 하지만 사실 인류학자라면 대부분 이러한 현장 조사를 하는데, 애나 칭이 그들과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일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또한 책상에 앉아서 텍스트를 여행하는 철학자들은 춤과 같은 태도가 아닌지도 궁금해졌죠. ‘세계 끝에서 추는 춤’. 이 표현을 단지 느낌으로만이 아니라 재미난 이미지와 예시들로 풀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나 칭은 3장의 인터루드의 제목을 ‘춤추기’로 이름붙입니다. 춤은 숲의 풍경 속에서 버섯의 자라남, 그런 버섯의 생명선을 찾는 채집인들이 수행하는 알아차림의 기술과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모든 채집인들이 춤을 추지만 모든 춤이 비슷한 모습은 아니다. 각각의 춤은 이질적인 미학과 지향점을 담고 있는 공동의 역사들에 따라 각기 모양을 갖춘다.”(429쪽) 이로부터 춤에 관한 몇 가지 힌트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생명선을 따라간다는 것. 그곳이 폐허, 곧 자본주의적 광풍이 지나가고 남은 생산성을 잃어버린 자리라는 것. 그리고 춤을 추는 자들은 선하다고도 악하다고도 할 수 없는, 단지 생명선을 따라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 쫓음이 도시의 욕망처럼 파괴적이지 않은 건 “생명선은 얽혀 있다”(433쪽)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르귄의 말처럼, 춤, 세계를 만드는 춤은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추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안개로 덮여 확실하지 않은 곳에서 생명선을 따르는 움직임, 그런 삶의 방식. 그것이 춤이죠. 송이버섯의 생명선을 따라가면, 여러 생명선을 만나게 됩니다. 그 얽힘에 자신의 생명선을 포개며 신체의 선을 그을 때, 그것은 춤이 되는 것이죠.
“캔디 케인과 송이버섯, 송이버섯과 숙주나무, 숙주 나무와 약초, 이끼, 벌레, 흙의 박테리아, 그리고 숲의 야생동물, 들썩이는 둔덕과 버섯 채집인의 생명선이 얽혀 있다. 송이버섯 채집인들은 숲에서 생명선에 민감하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탐색하면서 그러한 각성이 생긴다.”(433쪽)
애나 칭의 연구가 춤을 추는 듯한 기운을 주는 것은, 아마도 채집인들이 송이버섯의 생명선에 민감하듯 그 역시 그들의 생명선에 민감하다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감각을 열고, 어떻게든 배치 속에서 삶의 가능성에 닿고자 할 때, 우리는 세계 끝에서 춤을 추며 가벼워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결론나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송이버섯이 나타나기를 희망하지만 인간의 기술만으로는 송이버섯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하면서 송이버섯이 맺힐 가능성이 높은 산림 생태계를 조성에 인간도 하나의 부분으로서 참여하는”(517쪽) 실천을 생각해보았죠. ‘뭐라도 한다는 것’이 일종의 자기정당화로 빠지게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에코 실천과 사토야마 프로젝트은 어떻게 다를까요? 전자는 예쁘고 무해해보이지만 종종 우리를 자기애로 떨어뜨리고 다른 방식의 소비를 부추겨 리바운드 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후자도 그러할까요? 자기만족을 동기 삼아 이뤄지는 실천들은 예기치 못한 각성으로 이끌 수 있기도 하지만 그 흡족감에 의해 얽히고설킨 관계를 못 보게 되고 패치를 축소시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저희는 대체 이때의 ‘자기’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도 나누어봤지요. 만족감은 ‘나’만의 것으로 귀속될 수 있는지. 이때의 나를 우리는 어디까지로 생각하고 있는지 등등. 어느 새 철학의 문제로 넘어온 것 같습니다. 경계가 흐려지지요. 또한 꼬마아이 샤오메이의 눈으로부터, 새로운 세대들에게 다가오는 세계는 쓸쓸한 붕괴로 비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샤오메이는 송이버섯이 아니라 검은 딸기와 다른 큰 버섯을 발견하고 그것을 좋아합니다. 이 짧은 장면은, 20세기 끝자락에 태어나서 과거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부하는 저에게, 또 종이보다 터치스크린에 익숙한 제가 보기에도 어린 친구들에게, 비록 그들이 무기력을 느낀다 해도 충분히 기쁘게 살아갈 힘 또한 갖고 있음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채운샘께서는 영화 <미래의 범죄들>(크로넨버그, 2022), 바둑을 좋아하는 택시기사님(“저는 여기에 놓고 싶단 말이에요오!”), 간디의 힌두 스와라지, 이렇게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산업폐기물을 먹게 된 새로운 인간의 탄생 혹은 진화를 기꺼이 반길 수 있을까? 우리는 AI가 구현해내는 ‘최선의 길’이 아니라 미끄러지는 재미, 실패하는 자유,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하고 이 사회의 공리계에 대고 ‘틀려도 좋으니까 자기 한계 속에서 고전하며 과정을 겪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 아니냐’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가? 우리는 진기한 사건과 평소에 잘 일어나지 않는 영웅의 히스토리가 아닌, 별볼일 없는 매일의 바람과 새들과 물결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기쁘게 나눌 수 있는가? 곰팡이의 존재는 계속해서 생각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꿈꾸지 않고도, 우리가 배치를 바꿔내야 한다는 비장함 없이도, 우리가 만든 세계에서 ‘중금속’을 먹으면서도 슬픔에 우리를 내어주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를 꿈꾸거나 과거를 회고하지 않으면서 이곳에서 기쁨을 감염시키는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배치 안에서 만들어지며 함께 배치를 만들고 있음을 거듭거듭 기억하기. 재미있었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시즌에는 한발 더 나아가봅니다. 분해를 사유하는 일은 우리에게 또다른 층위의 용기를 줄 수 있을까요?
책을 덮고 그 흥분에 멀미가 일던 차라 과제에 담고 싶었던 내용을 대부분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게 <버섯..>이 준 가장 큰 수확은 '자본주의'마저도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사장님'이 되고 싶은 사람을 경멸하는 건 솔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죠. 욕망은 긍정되어야 한다, 다만 채집인과 사장님 사이의 거래 과정에 구축된 신뢰의 시간이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대체 뭔가 , 욕망을 대체적인 모양으로 빚어내는 틀 , 역사적으로 생겨날 밖에 없었던 조건 속에서 생겨난 특정한 삶의 방식 같은 걸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요. 샘들과 열공한 시간, 정말 저는 버섯 향기에 취했습니다. ㅎㅎ자본주의, 네가 공부의 맛을 알아?
<생동하는 물질>에 이어 <세계 끝의 버섯>을 읽고 참 많은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면서도 한편으로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물음도 생겨나네요!
무언가를 하자니 애매하고 또 하지 않으려니 좀 그렇고... 찜찜한 기분이 사라지지가 않기에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세미나를 끝내고 뒷풀이를 안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저는 마지막 세미나에서 '세상 끝에서 춤추기'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그냥 추임새 같은 장으로 재미있게 읽었는데 세미나를 하며 들으니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군요. 그런 지점에서 우리 세미나의 뒷풀이도 가벼운 춤추기로 마무리하며 또 새로운 공부와 세미나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비록 늦가을이고, 또 버섯의 향기는 느낄 수 없겠지만 가까운 도시의 숲에서 가을의 빛깔과 냄새를 감각할 수 있는 '숲걷기'를 제안해봅니다!
그 숲은 세상 끝일 수도, 제도화된 소외의 한 가운데일 수도, 잠재된 공유지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걷기 시작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과연 도시의 숲에서는 어떤 교란과 배치가 이루어졌고 우린 또 그 속에서 어떤 풍경을 만들어내며 춤을 출 수 있을까요?
저도 궁금해지네요. 자세한 내용과 일정은 오늘 내일 중으로 올려볼께요~
민호샘 수고 많으셨고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