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보다 분해가 우선한다
올해의 마지막 시즌, 저희 생기 세미나는 또 하나의 반짝이는 책 <분해의 철학>을 만나고 있습니다. <분해의 철학>은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라는 제목에서처럼 마구 희망차고 힘솟게 하는 들뜸을 주진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꽉 쥐고 있던 것들을 부드럽게 놓을 수 있게 만들고, 무엇보다 우리의 오랜된 좋음과 나쁨의 이분법을 조심스레 해체하게 해줍니다. 우리에게는 탄생-성장-젊음-생산-건설-질서 등은 좋은 것이요, 죽음-쇠퇴-늙음-분해-부패-해체-썩음 등은 나쁜 것이라는 관념 혹은 정서가 아주아주 뿌리 깊습니다. 그 반향은 우리의 정치·경제·종교의 장뿐 아니라, 교육이나 환경주의의 가치 아래에도, 심지어는 철학 사상들 아래로도 퍼져나갔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인류 곁에서 떠나지 않은 생각 중 하나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다시 젊어지고 싶다는 소망”(121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해에 저항하며 신진대사를 유지하는 “생명의 기본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언제까지나 젊은 육체로 있고 싶다는 애절한 소원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할 것 없이 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감정으로 온존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보존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경향인 건 아닙니다. 생명에 있어서 보존, 유지, 생산보다 앞서는 것은 분해, 해체, 발효입니다. 존재의 태어남 자체가 파열이었습니다. 씨앗이 갈라지고, 알이 깨지고, 양수가 터져야 태어납니다. 사실 우주의 시작 자체가 빅뱅이라는 고에너지 상태의 균열과 해체로부터라고 저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말합니다. 그렇게 형성된 개체들의 일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생명은 “합성보다 분해하는 쪽을 끊임없이 우선한다”고 말합니다. 살아감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생물의 단백질을 먹고, 소화하고, 산산조각 냄으로써 그걸 자신을 구성하는 물질과 끊임없이 교체”(33쪽)하는 과정입니다. 태어나는 것도 “살아간다는 것도 파열의 과정, 즉 분해의 과정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존재는 전적으로 해체된 것에서 시작되어 해체함으로써만 존속되는 분해의 여정인 것이죠. 합성과 생산, 즉 ‘만들어지는 것’은 언제나 분해와 해체, ‘흩뜨리고 뒤섞고 썩히는’ 과정의 부산물입니다. “우리는 덧셈과 곱셈이라기보다는 뺄셈이며 나눗셈인 세계를 살아가는”(32쪽) 것이다.
<분해의 철학>은 이러한 놀라운 역전을 기반에 놓고 ‘분해론’을 전개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 시대를 진단해보면, 지금은 ‘신품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품으로 생산된 물건은 모두 ‘새 것’의 지위를 갖고, 구매된 동시에 고장나고 가치를 잃기 시작하며 결국 쓰레기로 처분됩니다. 모든 흐름이 그렇게 일방향적이죠. 물론 이런 조류 속에서도, 나폴리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고쳐 쓰고 새로운 기계 작동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러한 분해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런 케이스들에도 중요한 질문들이 빠져있습니다. 하나는 “왜 현대 세계가 여전히, 게다가 한층 더 세련된 듯한 신품 세계에 의해 온통 뒤덮여 있느냐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왜 인간 세계의 분해 행위보다 더 근원적인 “토양 미생물이나 장내 세균 등의 생태학적 분해 현상을 동시에 논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입니다(42쪽). 전자를 고민하지 않으면 저항의 문제가 편협해지고, 후자를 놓치면 어떤 주장도 결국 인간이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후지하라 다쓰시는 인간계와 자연계를 횡단하는 분해론의 배치를 가다듬어 보고자 합니다.
‘제국을 부패사(腐敗死)시키기’에 앞서 : 제국, 부패, 다중, 사멸
후지하라 다쓰시는 “신품 세계가 얼마나 강인하고 또 얼마나 교묘하게 통치하는가에 대해 형태학적으로 사유해보고자”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라는 개념을 활용합니다. 이는 ‘제국’이 끊임없이 탈영토화하며 스스로의 극한을 이전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잘 그리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생리를 ‘부패’라는 단어를 사용해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괴물 같은 존재는 자기 신체의 일부를 부패시켜 형태를 바꾸고 또 새로운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계속 살아남는다.”(57쪽)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와도 같이 제국은, 자신을 떠받치는 제도가 망가지고 모순에 부딪혀도 그 고장을 양분 삼아 또 확장됩니다. 공황과 전쟁과 기후위기가 닥쳐도 그 위기들을 상품화해서 우리 생활을 다시 규율화하고 거기서 잉여가치를 뽑아냅니다. 그러므로 “‘제국’의 경제=조성은 실로 부패를 통해 기능한다”(55쪽)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패로 존속하는 거대 네트워크 생명체로서의 제국. 이 개념이 이번 세미나에서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지하라 다쓰시는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생존시킨 채 ‘제국’을 사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67쪽) 그리고는 말합니다. 제국을 폭사시키는 대신 부패사시켜야 한다고요. 이 말들 자체만 놓고 보면 의문들이 샘솟습니다. 생명과 제국은 서로 구분되는 걸까요? 폭사는 무엇이고 부패사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왜 제국은 ‘사멸’시켜야만 하는 것일까요? 애나 칭은 사멸되어야 할 것으로서의 자본주의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층 더 이런 의문들이 찾아옵니다. 사실상 ‘제국’ 개념을 잘 모르기에 쉽지 않았지만, 의문들에 최대한 답해보기 위해 저희는 다시 이 책의 세밀한 맥락으로 돌아가보았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부패’라는 용어의 범위에 있습니다. 후지하라 다쓰시는, 우선 네그리와 하트의 ‘부패’의 용법이 ‘타락’이라는 도덕적 의미를 제거하고 생물학적-형태학적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탁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사유가 너무나 도시적이고 인공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의 생존의 선행조건이자 그 끈질김을 그려내기 위해 부패라는 현상을 가져옵니다. 이때의 부패는 오직 제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체의 작동 차원에서만 다뤄집니다. 제국에서 부패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공통적인 것(the common)’, 즉 ‘공유되는 것’, ‘모두 힘을 합치는 것’입니다. 강, 공기, 흙, 동식물 등의 자연적인 공유지와, 정동, 협동, 지식 등 사회적인 공유 가치가 가족, 기업, 국가의 독점에 의해 그 잠재력과 연결 가능성이 약화되는 것. 그것이 제국에서의 부패입니다. 여기서 부패는 결여의 뉘앙스를 띱니다. 비록 그것이 제국-괴물의 부패적 생성을 전략적으로 잘 그려낸다 해도 네그리와 하트의 용법은 편협합니다. 이는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성소멸론을 근거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성소멸론은 “천문학적인 규칙성과 조화” 속에서 생겨남은 항상 사라짐과 동시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이런 형태론적 동시성은 복잡성과 다중성을 포괄할 수 없습니다. 부패는 훨씬 다층적인 속도들과 리듬들을 포함합니다. “흙이나 미생물의 작용은 훨씬 더 아나키하다”(63쪽)는 것을 포착해야만 ‘부패사’의 맥락에 다가갈 수 있을 듯 보입니다.
두 번째 포인트는 ‘공통적인 것’ 자체의 범위와 역량입니다. 제국의 부패-작동은 이런 식입니다. 물, 흙, 동식물은 자연에서 분리되어 사유화되고 상품화됨으로써 ‘부패’됩니다. 자연적인 커먼즈가 힘을 잃으면 제국의 부도 감축시키지만, 이 위기는 제국의 위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패된 커먼즈는 ‘환경 보호’ 및 ‘지속 가능성’이라는 구호와 광고들로부터 다시 시장가치를 갖게 되어 제국은 사유와 착취를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부패되는 커먼즈와 계속해서 존속되는 제국.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양원화되지 않습니다. 부패는 ‘공통적인 것의 부패’라는 말로 담기지 않을 정도로 훨씬 복잡합니다. 자연의 부패는 곤충과 미생물들의 소화, 배출, 분해를 포함하며, 이 작업들은 물, 흙, 동식물이라는 공유지를 다시 살려냅니다. 애나 칭은 주변자본주의적 영역 혹은 ‘잠재되어 있는 공유지’ 등의 용어를 사용해서 그 역동성을 잘 보여줬습니다. 인간과 비인간 분해자들은 폐허에서, 사유지에서, 예기치 않은 곳에서 출몰하여 힘껏 배치를 바꿔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부패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산업폐기물들인 TV, 자동차, 핵쓰레기 등은 거의 부패되지 않고 끝없이 다음 단계로 떠넘겨집니다. 또한 사유지에 깔린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도 미생물 분해자들의 부패의 역량을 거의 감소시킵니다. 요컨대, ‘공통적인 것이 부패’가 실질적인 분해자들의 부패를 제한하고 기능 저하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실존의 가능성이 사라짐을 말합니다. 애나 칭이 말한대로 우리는 자본주의 앞에서 절멸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국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제국’이 쓰레기로 덮인다든가, 먹거리가 들어오지 않는다든가 하면, ‘제국’은 인류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제국은 공통적인 것을 부패시키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공통적인 것 자체의 부패력이 줄어들수록 스스로의 사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 포인트는 사멸의 방향성입니다. 가만히 둬도 제국은 사멸로 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승자 없는 싸움”으로 전멸이자 공멸로 보입니다. 자연히 제국과 함께 사멸할 것인가, 제국을 사멸시킬 것인가. 후자의 경우, ‘누가’와 ‘어떻게’의 물음이 제기됩니다.
‘누가’에 해당하는 존재는 ‘다중’입니다. 다중은 제국의 체내에서 상리공생을 하는 존재들로서,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제국에 맞서고 내부로부터 폐기시킬 수 있는 ‘사자 몸속의 벌레’입니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않은 채 온갖 군데에 출현했다가 곧바로 이동하고, 또 다른 곳에서 관리되다가 탈출을 되풀이하는 다중”(66쪽),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이 정보 경제라는 ‘공통적인 것’에 기반해 인터넷 기술과 기업의 정보망을 탈환함으로써 ‘연대’하고 ‘저항’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지하라 다쓰시는 정보 기술은 결국 광물과 플라스틱과 발전소 등의 인프라는 자연적으로 거의 ‘부패하지 않는’ 요소들에 기반한다고 말합니다. “부패하지 않는 것이 떠받쳐주고 있는 한, 그 기반 위에 서 있는 사회는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다.”(67쪽) 다쓰시는 여기서 네그리와 하트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그는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은 인간-비인간 분해자들을 충분히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며, 결국 다중에게 또다시 ‘생산 및 건설의 주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다는 것이죠. “다중이라는 존재의 특이성을 아무리 높이 평가한다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아직 ‘제국’과의 경계가 애매모호하다.”(69쪽) 다쓰시는 어떤 경우에도 ‘생산 및 건설의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제국과 맞서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어려운데요, 그러면 또 다시 제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일까요?) 그러면 다쓰시에게 다중은 제국과의 경계가 분명한 존재들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쓰시가 말하는 다중은 ‘분해자’입니다. 토양의 생물들과 같이 “제멋대로 서로를 해체하과 분해하고, 수리”하는 존재들인 동시에 농사짓고 먹는 일에 있어서 끊임없이 토양의 부패 작용을 활성화하는 존재들입니다. 그 예시는 폐물장터에 출몰하는 빈민, 수집인, 넝마주이, 수리인들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사리사욕적이고 자기보존적인 작용”을 활기차게 이어가는 이들은 “‘연대’나 ‘단결’이라고 하기에는 느슨하고 ‘네트워크’라고 하기에는 균일치않은”(76쪽) 실존으로서 신품 문화를 분해합니다. 이들은 제국의 부패 및 존속과는 분명한 경계를 가집니다. 그들의 부패 활동은 제국의 부패 활동과는 분명히 다르며, 공유지를 착취하여 신품을 내놓으며 굴러가는 제국의 생리 자체를 흩뜨립니다. 기본적으로 제국은 다중이 수리하고 고 쳐쓰는 이상 명맥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기업이 소비자에게 수리 비용을 높게 청구하는 이유는, 매 계절마다 모델 체인지를 되풀이하여 낡은 것을 버리고 신품을 계속 구입하게 하는 시스템이 아니라면, 금융기관은 대출을 꺼리고 금융 상품의 매매도 정체됨으로써 끊임없는 성장과 확대를 전제로 하는 ‘제국’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있는 내구재를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분해와 수리를 과학과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끌고 들어가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70쪽)
다시 제국 사멸의 문제로 돌아오면, ‘누가’의 문제는 ‘어떻게’와 직결됩니다. 분해자로서의 다중이 제국을 서서히 와해시킨다면, 그 방법은 지금까지와의 ‘혁명’ 혹은 ‘공황’ 같은 제국 사멸 시나리오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제국의 이런 격렬한 죽음이 바로 ‘폭사’입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제국’의 폭사에는 수많은 인간들, 특히 경제와 환경의 변동에 생존 조건이 좌우되기 쉬운 인간들이 휩쓸려 들어”(69쪽)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기후위기가 거기에 가장 기여도가 낮은 가난한 자들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목도합니다. 금융위기나 공황도,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 혁명들 역시도 노동 생산력이 낮은 장애인, 노인, 여성, 병자들을 폄하하며 진행되었습니다. 제국의 폭사는 그 사멸에 수많은 존재들을 비대칭적으로 끌어들입니다. 아마도 다쓰시는 이 지점을 염두에 두고서 폭사가 아니라 부패사를 말한 것 같습니다. 제국의 존속-부패를 방치하면 공멸이기에 제국의 사멸을 기하되, 그것이 또 다른 통치 그룹을 건설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또한 차별된 죽음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폭사가 아니라 부패사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의 젖줄인 시장가치 및 신품 구매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분해자-다중의 활발발한 생동으로 이뤄집니다.
다중은 ‘혁명’을 목표하지도 ‘연대’를 이루지도 않기에, ‘부패사’는 엄밀히 말해 제국의 온전한 ‘붕괴’나 ‘폐기’로 향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부패입니다. 자본주의 제국을 고장내고, 앓게 하고, 부식시키는 일로서, 그 사이사이로 주변자본주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인 영역들을 집어넣는 일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멸’이라는 말보다는, 애나 칭의 개념과 같이 ‘오염’이나 ‘교란’이나 ‘마법’ 등의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다시 다쓰시의 분해 개념의 정의를 환기해봅니다. “어떤 것의 속성이나 기능이 최종적으로 다 소진되어 운동의 방향성이 상실되고 마침내 사라져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이용되는 것”(20쪽)이 바로 분해입니다. 제국 혹은 자본주의의 고유성을 상실시키기. 이는 공급사슬과 자본주의 풍경 내로 의도치 않은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송이버섯 채집인들 및 연구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세미나가 끝나고 한참 뒤에야 후기를 쓰려니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고 책을 뒤적여야만 했습니다...(죄송합니다!) 저희가 가장 오래도록 이야기한 부분을 정리해봤지만, 그 외에도 재미난 질문과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우선 다쓰시가 분해론의 기본 모델로 가져온 프뢰벨의 나무블럭을 가지고는 붕괴와 미완성의 근본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임계’의 범주에 대해 질문을 했었죠. 이와 관련해 차페크의 작품들을 분석하며 인류의 임계를 이야기하는 3장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어린이집 놀이방에 흩어지는 나무블럭처럼 (...) 존재는 부서지되 곧 다시 세울 수 있을 정도인 한에서 부서져야 한다. 너무 부서지면 그렇게 분해된 부분을 가지고는 새로운 전체를 다시 짤 수가 없다.”(166쪽) 저는 이 부분을 원자에서 핵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만 읽었는데요. 제현 샘께서는 너무 부서져서는 안 되는 ‘존재’란 어디까지인지를 질문하셨습니다. 그것은 물질입자이기만 한가, 아니면 개체인가, 인류인가, 세계인가, 제국인가, 자연인가? 그러면서, 어쩌면 인간은 충분히 부서지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여러모로 공감이 가고 질문도 이어지는 말이었습니다. 분해에는 임계가 있다는 점을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래쓰고 고쳐쓰는 일이 우리 시대에는 촌스럽고 부끄러운 시선을 받는 게 되어버린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나폴리 사람들이 갖는 고장과 고쳐 씀의 희열이 필요하고, 그것을 함께 즐겨줄 동료들과 앎이 필요함을 이야기했습니다! 못다한 이야기들은 댓글로 ‘분해’해 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무플방지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 너무 오랫만이라 생기세미나가 부패되고 있는 중인가요? 후기 읽으며 지난 세미나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다시 발효시켜 봅니다. 더불어 오늘 <분해의 철학> 책떨이 기념으로 그에 걸맞는 창조물을 가져갑니다. 너무 큰 기대는 마시고 이따 뵐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