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해의 철학>은 단지 흥미롭고 신선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대단히 충격적인 동시에 우리를 원래 자리로부터 저만치 옮겨다 놓는 그런 텍스트 같습니다. 이번 시간 저희는 이 책을 다 읽고 모여서 신나게 세미나를 했는데요. 책의 후반부에는 ‘넝마주이’라는 인간-분해자의 디테일한 역사를 비롯해, 쇠똥구리로 대표되는 곤충-분해자, 금수선(킨즈키)과 같은 수리의 미학 등 이 ‘신품 사회’(자본주의 사회)의 조명에 들어오지 않는 영역의 이야기들이 아주 매력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실 한 챕터만 가지고도 오래도록 떠들어 볼 수 있을 정도로 유익합니다(꼭 일독해보시기를)! 이번 후기에서는 책의 맥락과 세미나에 나온 이야기들을 스케치해보겠습니다.
‘제국’의 부패는 한없이 빈약하다
‘제국’, ‘자본주의 기계’, ‘신품 사회’, ‘후기 자본주의’, ‘자본세’ 등 이 시대의 고유한 체제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중심도 경계도 없이 모든 것을 양화하고 상품화하여 시장으로 흡수시키는 증식하는 운동입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을 자양분 삼아 모든 한계를 넘어가는 듯 보입니다. 체 게바라의 이미지가 팔리고, 친환경이 트랜드가 되며, 전쟁과 재난마저 투자처가 됩니다. 대체 이런 시대 속에서 ‘저항’이라는 게 가능은 할까요? 이미 반세기 전, 들뢰즈와 과타리는, 한계와 위기를 먹으며 나아가는 자본주의의 적분 운동에 맞서려면 미분적(분자적)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국경도 없고 영토도 없이 흐르는 자본이기에, 지금까지처럼 독립운동이나 국가운동으로 맞설 수 없다는 것이죠. 이 논의를 이어받아, 네그리와 하트는 자본주의적 네트워크에 잡히지 않는 이탈적 움직임들로서 공통적인 것(commons)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국은 생리상 발전만큼이나 부패를, 생산만큼이나 분해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지하라 다쓰시는 제국의 생리로서의 ‘부패’는 한없이 빈약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부패, 생태학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분해를 놓치고 있습니다. 모든 생산과 태어남과 건설보다 앞서 이뤄지고 있는 해체, 발효, 분화의 과정이 고려되지 않지요. 당연히 거기에 참여 중인 인간 및 비인간 존재들의 활발발한 실존도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다쓰시는 네그리와 하트의 분해 개념은 ‘도시적이고 인위적’이라고 말합니다.
즉 제국-장치는 분해 세계를 흡수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단지 의태에 불과합니다. 비록 부패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해도 생산으로 기운 위계는 결코 역전되지 않습니다. “오래된 서비스나 물건들을 일단 파괴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서비스와 물건들을 산출해낸다”(348쪽)는 공식에서도, 요는 여전히 ‘새로운 산출’입니다. 재산출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 수지가 맞지 않는 파괴와 붕괴는 방치됩니다. 애나 칭이 <세계 끝의 버섯>에서 언급했던 인도네시아 어느 섬의 플랜테이션 목재 농장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내버려진 폐허에 꾸물꾸물 다시 나타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숲과 함께 방치된 중장비들을 조각조각 나눠서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들. 그 땅에서 다시 뭔가를 심어보려는 사람들.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를 갉아먹는 벌레들. 번져가는 곰팡이들과 자라나는 버섯들. 이런 존재들의 분해는, 언제나 ‘창조를 위한’ 파괴만을 허용하는 제국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차원입니다. 그런 한에서 제국의 분해는 아주 나약합니다. “특정 계층에 부가 자동적으로 집중되도록 하는 장치, 세계의 부정의를 고정시키고 차이를 안정적으로 산출하는 글로벌 장치”(374쪽)라는 본성을 하나도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제국이 아무리 자기 해체를 감행한다 해도 그 분해는 “불의의 고정화를 파괴할 정도의 위력도, 불의를 유동화시킬 정도의 여유도 갖고 있지 않다. 근본적으로 겁 많고 나약한 것일 뿐이다. 겁이 많고 나약해서 대항하는 자들을 도구에 의해 감시하고 말살한다. 반면 분해는 선악의 저편에서 모두를 파괴하고 모두를 재이용한다.”(349쪽)
다중과 ‘의도치 않은’ 제국 부패사
다쓰시가 말하는 우주 차원의 분해는 어떤 공리계에도 갇히지 않습니다. 선악이나 위계를 모르니 ‘부를 축적하는 불의’를 훌쩍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제국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흙, 물, 생태계, 그리고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부단한 분해야말로 제국의 팽창(자멸-공멸을 향해가는)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제국은 부패하면서 자생한다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국의 부패는 공유지의 파괴, 교환관계, 썩지 않는 쓰레기, 화학약품, 핵폐기물을 남기는데 이는 자연의 근원적 부패의 능력을 감퇴시킵니다. 토양과 물의 세균들과 곤충들은 점점 약해지고, 인간들은 계속 신품을 사고 쓰레기를 뿜어댑니다. 이 사이클을 멈출 수 있는 건 결코 인간적인 혁명이나 시스템의 개선이 아닙니다. 이는 곧바로 제국의 또 다른 장치로 삼켜지고 맙니다. “역사는 그런 과정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장치가 끝내 다 처리할 수 없는 분해 과정을 가속시킬 것.”(348쪽) 장치가 다시 회수하지 못하는 비-‘생산’적 분해를 곳곳에서 재출현시키는 것. 그리하여 제국을 부패사시키기. 이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다쓰시는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 일을 해낼까요? 부패사의 핵심은 인위성의 부재입니다. 거기엔 사명도 없고, 계획도 없고, 당도 없고, 전위도 없고, 대의를 위한 희생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누가 희생되어도 마땅한가, 라는 문제가 제기되지도 않습니다. 비전과 금욕과 줄세우기는 지난 세기의 유물일 뿐이고, 더 이상의 ‘새로운 세계 건설의 주체’가 지목되어서는 안 됩니다. 네그리와 하트의 말마따나 제국은 ‘사자 몸속의 벌레’인 ‘다중’에 의해 붕괴되어야 하는데, 이때 다중에서 인위성과 주체성을 제거하면 어떤 존재들이 다중에 해당될까요? 분해의 장 전체입니다. 애나 칭이 예찬한 곰팡이와 그 숙주인 나무들, 거기서 자란 버섯을 따러 온 사람들, 중장비를 쪼개는 사람들을 포함해, 곤충, 미생물, 대형 동물들 등 모두! 무너지고 생겨나고, 죽고 태어나고, 먹고 먹히고, 소화하고 배설하고 또 주워가는 패치들 전체가 해당됩니다. 다양한 층과 규모에서 일어나는 분해 현상에 참여하는 모든 존재들이 다중이죠. 그런 점에서 소화하고 배설하고 늙어가는 우리도 다중입니다. 그 모든 다중들의 분해 역량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미 모두가 다중이다’라는 식으로 나아가면 논점이 흐려집니다. 우리 각자와 우리의 사회는 여전히 분해보다는 생산과 축적을 더 중시하는 욕망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더 디테일하게 물어야 합니다.
제국(혹은 자본주의 혹은 신품사회)의 생리에 거슬러, 그 ‘창조적 분해’의 구상을 흩뜨리는 분해자-다중의 실존은 어떤 모습일까요? 후지하라 다쓰시에 따르면 그 모습은 넝마주이, 수거인, 농민이나 빈민들, 양아치, 청소부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줍는 사람들. 버려진 것을 고치거나 모아서 다시 사용되게 만드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죠.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잡다한 사람들”인 그들이 “‘다중’이라는 말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평가한다고 할 때 떠오르는”(76쪽)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해자들은 역사 속에서 항상 존재해왔지만, 근대화와 신품사회가 도래하면서 점점 더 나쁜 평판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들은 ‘법과 일상의 틈새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고, 소유물과 쓰레기의 경계가 애매한 상태에서 절도와 수거의 사이를 넘나들어야 했습니다. 또한 넝마주이가 된 배경조차 천차만별이라, 범죄와 폭력의 내력이 있는 이들도 항상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어떻든 간에 그 줍는 이들은 하는 일은 의도와 관계없이 도시와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왔습니다.
“적잖은 일들이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수거에서 해체, 그리고 재이용으로 이어지는 작업군들은 무 또는 마이너스에서 유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인간의 존재 양식에 깊이 관여하는 드물고도 장대한 행위다. (...) 쓰레기 줍는 사람들이 없다면 도시 거주자들은 쓰레기에 눌려 찌부러져 압박사나 질식사를 당할 수밖에 없다.”(191쪽)
“넝마주이란 역으로 말하자면 상품 세계에서 하강해온 것을 다시 상품 세계로 되돌리기까지의 사이 공간, 즉 소유권 제도의 공백 지대를 치고 들어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201쪽)
넝마주이적 삶의 양식. 이것이 제국 부패사 시나리오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다중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즉 분해의 역량이지요. 더 많은 이들이 고쳐 쓰고, 오래 쓰고, 다시 쓰면서, ‘신품 구매’에 콧방귀를 낄 수 있는 욕망과 생활력을 가질 수 있을 때 제국은 사멸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해와 수리를 과학과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끌고 들어가는 것이 우선 필요”(70쪽)합니다. <분해의 철학>이 소개하는 일본 근대 속 넝마주이의 역사(<양아치 이야기>(1957), <개미촌의 마리아>)는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는 줍는다는 행위가 존재의 본질임을 아주 아름답게 드러냅니다.
넝마주의적 자긍심 : 부끄러움은 어떻게 당당함이 되는가?
이윤과 신품, 축적과 소유만이 강조되는 사회이기에 매번 비가시화되고 폄하되지만, 줍고 고치고 분해하는 이들은 “존재들의 가치를 역전시키는 역할”(217쪽)을 하며 세계를 끊임없이 비옥하게 만들어왔습니다. 비록 그들은 그들이 해온 일의 역량을 잘 몰랐다고 하더라도 말이죠.그리고 이제 우리는 어쩌면 넝마주이의 가치 자체를 역전시켜야 하는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무엇이 당당하고 무엇이 부끄러운지, 무엇이 공정하고 무엇이 불공정한지를 되물어야 합니다. 소유권 제도라는 것의 저속함, 신제품 소비의 무능력함, 재산에 따른 위계질서의 한심함이 직시되어야 합니다. 분해자-다중이 되는 일에서 중요한 건 무엇보다 자기 실존에 대한 긍정, 즉 자긍심일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의 가장자리가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신체적인 체험 혹은 이해에 기반하는 것 같습니다.
애나 칭은 ‘잠복된 공유지’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곳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잠복된 공유지는 표면상(법적으로) 사유지입니다. 공공기관에 포섭된 지대를 포함해서 지구상에 사유지가 아닌 곳은 없죠. 버섯을 따기 위해서는, 뭔가를 줍기 위해서는, 원칙상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줍는 일은 주인이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거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법에 근거한 제제가 언제든 가해질 수 있죠. 채집인이나 넝마주이는 언제나 제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면서 잠복된 공유지를 만들고 줍습니다. 때때로 쫓겨나더라도 다시 꾸물꾸물 찾아듭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그 일은 결코 소유권자에게 손해를 안기지 않는데, 그 줍기는 언제나 버려진 것, 쓰레기, 버섯 등 아직 상품성이 없는 것에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넝마주이 및 채집인들의 오고감은 그곳의 가치를 더 풍성하게 만듭니다.
사실상 잠복되어 있는 공유지는 사실상 만들어지는 것,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영역일 것입니다. 이 세계에 이미 외부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완전한 내부도 없지요. 골목골목으로 넝마주이가 돌아다니고, 사유지로 채집인들이 흘러들고, 운동장에 여러 사람들이 들어오듯, 공유지는 (결코 공공의 선이 아니라)자신들만의 이해관계와 삶의 방식과 놀이와 자유를 이뤄내려는 사람들이 약간의 모험을 감행할 때 열립니다. 그리고 또 닫히죠. 이 과정을 안다는 건 꽤나 용기를 줍니다. 첫째로는 사유화된 영역들 앞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그렇게 무언가를 사유화하고 취득하려고 혹은 가진 걸 지키려고 아등바등 애쓰며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의 당당함은 여기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내부’에서 ‘바깥’을 만들며 틈새를 살아가는 일의 핵심은 무엇보다 그 두려움을 넘어가기일듯합니다. 4장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양아치-되기의 통과의례는 부끄러움을 직면하게 합니다. 넝마주이는 송이버섯 채집인과는 다르게 도시 한복판에서 활동합니다. 그렇기에 처음엔 내면에서부터 수치스러움이 압도한다고 합니다. 그 감정 역시 사회적 배치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강렬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 직면하면 어떤 변형이 있습니다. “‘양아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추락하는 것이나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라는 느낌”(240쪽)이 찾아오는 것이죠. 그 일이 결코 하찮지도, 더럽지도, 바보 같지도 않다는 자각.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작업에 대단히 귀한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 물론 달콤한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고치거나 줍는 일, 주워서 자신이든 누군가에게든 다시 사용되도록 만드는 일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그 일은 의도하지 않아도 신품사회에 대한 저항이 되며, 무엇보다 사물에 대한 애착심을 길러내는 일이기도 함을 은연중에 체감하는 것이죠.
<이삭 줍는 사람들>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사나이는,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음식을 찾아 먹습니다. 그리고는 “이 바보들은 멀쩡한데도 모든 걸 버린다”고 말하는데, 거기서 느껴지는 자긍심이 보는 사람을 멈칫하게 만듭니다. 거기엔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분노나 비웃음이 있을 뿐이죠. 부끄러운 것은 새것을 사고, 이전 것을 버리는 방식으로 회전하는 사회입니다. 주워 쓰고 고쳐 쓰고 기워 쓰고 나눠 쓰며 살아가는 삶이 주는 당당함과 기쁨. 그리고 무엇하나 손때 묻혀 만들어내지 못하는 삶에 대한 부끄러움. 이 두 감각을 체험하는 일이 분해자 다중-되기의 첫걸음일 듯합니다.
우리는 줍기를 허락할 수 있을까?
세미나 시간에 아주 인상 깊게 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은샘께서 들려주셨는데요. 어느 날 밤, 살고 계신 건물의 층계 공간에서 발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늦은 시간이고 남편분도 안 계신 때라 심장이 두근거렸다고 전해주셨는데요. 문을 조금 열고 “누구세요?”라고 말하자 “미안합니다”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곧 누군가 나갔다고 합니다. 경찰에 물어보니 주변을 돌아다니는 노숙인이라고, 요즘 같이 추운 때 신고가 많이 들어온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보은샘은 공포심과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섞인 묘한 감정을 나눠주셨는데요, 제게는 이 이야기가 중대한 질문처럼 다가왔습니다. 이는 환대의 딜레마와도 유사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넝마주이가 아닙니다. 이는 곧 특정한 법과 제도로 보호받는 소유권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런 입장에서 넝마주이와 넝마주이적 삶을 공부한다는 건 뭘까요? 단지 공부하고 말한다는 것과 실제로 그런 존재의 실존과 마주하고 응답한다는 건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공유지화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물건을 내어주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소유의 영역에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일(집 자체가 아닌 건물 층계나 현관일지라도) 신체로 파고드는 공포심을 유발합니다. 곳곳에서 아연실색할 폭력 사건들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들과 사물들이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소유권과 법망 없이는 위태로운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이미 위태로움의 한복판을 거니는 존재인 넝마주이에게 어떻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을까요? 공포심, 안전, 환대, 배려, 당당함 등 여러 정서와 태도가 뒤섞이는 의문입니다.
이런 물음은 재현샘이 제기했던 문제와도 닿습니다. 어떤 사람의 소수자적 삶의 양식이 “우리의 일상과 충돌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위생 개념, 안전 개념, 배려 개념, 소유 개념에 파문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추위를 피해 건물들로 찾아드는 노숙인들이 그럴 수 있고, 패션쇼를 훼방 놓는 환경단체나, 경우에 따라서는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장애인들의 선전전도 그렇게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우리가 취하는 일차적 태도는 두려움과 거부감입니다. 혐오와 비난도 많고요. 그런 존재들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모순적이기도 합니다. 내게 익숙한 리듬이 고장나고 파열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마주침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경계나 제제 혹은 비난보다도 자기 자리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체 내가 살고 있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이 영토는 어떤 것인가? 어떤 법에 의해 보호되고 있으며, 어떤 가치가 통용되고, 어떤 속도로 돌아가고 있는 곳인가? 그런 나에게 ‘피해’란 무엇이고 ‘권리’란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떤 배치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좀처럼 머리 아픈 질문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저희는 소유라는 것이 대체 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후지하라 다쓰시는 양아치-넝마주이가 결코 훔치는 자들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한 그들은 어떤 자긍심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리에 내놓아진 물건은 언제나 경계가 흐릿했기에 넝마주이 역시 불법과 합법 사이를 오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소유권제도는 더욱더 복잡해졌습니다. 예술의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유튜브나 틱톡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문제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소유권이 오히려 활발한 복제 및 유통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어 일부러 제지를 하지 않기도 할 정도니까요. 채운샘께서는 ‘인용으로만 꽉찬’ 그런 예술을 꿈꿨던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살짝 언급도 해주셨습니다. 글을 쓰는 저 역시도 물음이 듭니다. 일단 쓴다는 건 모두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을 가져와서 뒤섞어놓는 일인데, 그렇게 내가 써 놓은 걸 누군가 마구 가져가다가 자기 이름을 붙인다면 기분이 묘할 것 같습니다.
분해자-되기. 이것은 등장만으로 복잡한 감정을 일으키는 분해자-타자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의 문제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것이죠. 소유의 문제, 안전의 문제, 환대의 문제 등 결코 단순화될 수 없는 실타래들을 품고 나아가야 할 길인 것 같습니다.
좋은 시체가 된다는 것
함께 나누었던 중요한 이야기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후지하라 다쓰시는 ‘분해의 철학’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결국 가장 근본적인 것은 ‘분해’이며 다양한 사물이나 생명은 분해의 운동이 일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분해’ 현상은 다양한 생물들이라는 탈것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종횡무진 돌아다니고 있다.”(286쪽) 그런 관점에서 보면, 생물의 죽음은 결코 슬픈 일일 수가 없습니다. 아니, 자연계에서 어떤 동물의 ‘장례’란 주변으로 독수리, 딱정벌레, 파리, 세균 등 온갖 분해 존재들이 초대되어 만찬이 벌어지는 떠들썩한 연회입니다. 인간의 장례 역시 그래왔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상업적인 매장은 그런 장례-축제를 거부합니다. 인간의 시체는 부패 방지제인 포름알데이히드로 닦여서 보관되고, 고열로 화장되며, 뼛가루는 곱게 갈려서 멸균된 단지 속에 영구 보존되지요. 이것은 그 어떤 생물에게도 유쾌하지 못한 죽음입니다. 화석연료와 화학약품도 아주 많이 투여됩니다. 게다가 죽음의 판정부터 이송, 장례식, 화장장, 단지와 부지 등 온갖 옵션들에 커다란 비용이 들어갑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특히 분해의 철학을 공부한 우리는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죽어서까지 이렇게 소외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소비(신품 사회에 가담하는)는 사는 내내 이뤘던 것으로 충분합니다. 나의 죽음을 남겨진 사람들에게 맡길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결단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문제의식과 관련해 채운샘은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라는 책을 소개해주셨습니다. 거기에는 각국의 제도화되지 않은 장례문화가 소개되며 또 이미 제도화된 방식 중에서도 가장 덜 파괴적인 장례 방법도 소개된다고 합니다. 아직 제게는 먼 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죽은 다음 나의 신체를 어떻게 부탁할지, 가장 간소하고 분해자적인 죽음은 무엇일지를 고민해보고 싶어집니다. 잘 죽을 것을 결단하는 일은 잘 사는 삶의 문제와도 닿아있는 듯 합니다.
또 후기가 주절주절 길어졌습니다... 그만큼 머릿속에 정리가 잘 안 되었다는 거겠죠. 얼렁뚱땅 흩어놓았지만, 분해의 역량을 발휘하셔서 읽어주시시라 믿습니다.
다음 시간(12.12)은 어느새 생-기 세미나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세 가지 생태학>을 꼼꼼히 읽고 과제를 써오시면 됩니다. 과제 질문은 곧 올려드리겠습니다. 바쁜 연말이자 에세이 기간이지만 마지막이니만큼 떠들썩하게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그럼 화요일 7시, 규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