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일본이 유럽연합과 정상회담을 하고 오자 12년간 유지해온 후쿠시마산 식품 수입규제가 풀렸습니다. 해산물의 방사능 측정 의무조차 없앤 건데요. 자국민의 안전 하나는 살뜰하게 챙기는 유럽인들이 어떻게 갑자기 관대해졌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과학’에 기반해 그렇게 하겠다는 EU총장의 환한 미소가 인상 깊었습니다. 아마 국제원자력기구가 고심 끝에 내놓은 보고서가 그 근거일 듯합니다. 의료용 엑스레이 몇 번 찍는 것에 불과한 그 방사능 선량이라는 그 진부한 수치 논리 말이죠. 그 논리는 1950년대 핵 후유증에 시달리는 일본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으려는 도쿄전력과 정부가 거듭했고, 체르노빌 사고 때 소련 정부가 들고 왔으며, 후쿠시마 사태를 어떻게 해보려는 사람들에게서 반복됩니다. 구도는 똑같습니다. 감추거나 강요하기 위해서이고,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금고는 잘 보존되거나 훌쩍 부풀어 오릅니다.
생-기 세미나를 하면서 좋은 책들을 많이 만납니다. 좋은 책이란 지금 벌어지는 문제의 구체적 정황과 국면들을 하나하나 품을 들여 조사하고, 사태를 보는 시선을 시공간적으로 최대한 폭넓게 열어주려는 책입니다. 원자력이나 육식이나 기후 같은 현행적 주제들은 미디어에서는 당파적 아귀다툼으로 유튜브에서는 자극적 조회수몰이로 덮여있어서 도통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지난 주 IAEA의 보고서가 ‘안전하다’고 멋대로 선언했을 때, 나름 합리적 입장을 추구하는 제 친구는 이제 대체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외부에서 제공되는 정보들,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소식들은 뒤섞입니다. 그것만 듣고 있으면 어쩐지 놀아나는 기분이 들어 무력해집니다. 그 막막함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뭐라도 내 힘으로 혹은 우리 힘으로 읽고 쓰고 말하면서 생각의 폭과 앎의 결을 다져가는 일일 듯합니다. 이번에 함께 읽은 앤드류 래더바로우의 <후쿠시마>는 저희에게 그런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일부 동의가 되지 않는 관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정성들인 역사 이야기가 실린 반면, 텍스트의 사이사이에서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구절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더 현명하게 대처했다면 이런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일련의 가정들이었습니다. 잠깐 그 얘기를 해볼까요.
우리는 언제나 ‘재난 이후’를 산다
세미나에서는, 현재 우리를 압도하는 정서나 심정이 무엇인지 나누었습니다. 해저터널 공사가 끝난 현재의 사태 앞에서, 혹은 이 책으로 함께 따라간 원자력 산업 역사의 현기증이 날 듯한 부정 앞에서 어떤 감정을 주는가. 그곳이 우리가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부분 같았습니다. 저는 제게서 ‘전쟁 혹은 몰락이 임박했나...’하는 공허하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희욱샘은 인간한테 뭘 바랄 수 있을까, 겸허하게 받아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절망감과 체념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승현샘은 폭력과 사고의 역사가 언제나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문제 앞에서 공부가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신다고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무거워지지 않으면서 사람들(아이들)과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절망이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뭐든 해야 한다는 마음이셨죠. 해민샘은, 나는 지금 편안한 상황인데 절망하는 건 기만일 수 있다며 ‘절망에 빠질 자격이 없다!’는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위기지만 위기가 무조건 종말은 아니며, 그 안에서 복잡함을 가지고 살면 작은 움직임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마음이 든다고 해주셨습니다. 인영샘은 스스로 냉정해지자고, 호롱불을 쓸 각오로 욕망을 바꾸고 아끼고 다른 삶의 방식으로 돌입하겠다는 마음을 먹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생-기 세미나의 멤버들은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안에는 무력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무력감은 이 시대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는 감정 같기도 합니다. 일본 정부는 제멋대로 방출하고, 원자력기구라는 곳은 제멋대로 승인하며, 한국 정부는 괴담 퍼뜨리지 말라고 압수수색을 해댑니다. 우리는 오염수가 싫고 불안하고 방류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소리를 내고 몇몇은 시위도 하지만 막는 일은 요원해보입니다. 뭘 할 수 있지... 하면 뭐하나... 무력감이 솟아납니다. 이제 사람들은 광우병사태처럼 싸우지 않는데,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이것은 환경 문제나 정치 문제에서 익히 반복적으로 마주해온 감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끼고 꼼꼼히 분리수거를 해도 캐나다와 미국에서는 마구잡이로 버려대고, 아무리 소신껏 투표를 해도 양당의 독식 구조는 계속됩니다. 짙디짙은 무력감.
무력감이 무서운 것은 또 다른 시스템주의를 불러 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더 완전한 대응 체제, 더 안전한 산업관행, 더 청정한 정치환경이 갖춰졌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관리를 더 잘 했더라면’, ‘준비를 더 현명하게 한다면’ 이와 같은 논조가 저희가 읽은 책 <후쿠시마>에도 깔려 있습니다. 원전을 더 고지대에 지었더라면, 몇몇 교수들의 권고대로 방파제를 높였더라면, 도쿄전력이 더 양심적이었으면, 규제기관들이 더 철저하고 힘이 있었으면, 일본 정치 문화가 그처럼 학연으로 똘똘 뭉치지 않았다면, 자민당과 우파 언론이 그토록 원자력을 칭송하지 않았다면, 체르노빌과 같은 사고들에서 진중하게 배웠다면...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이것은 결국 더 완전한 시스템주의를 향한 갈망을 내비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채운샘께서는 재앙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언제나 자본과 국가가 더 막강한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대홍수, 쓰나미, 전염병,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를 채우는 건 군대와 규제 그리고 대자본입니다. 재난이 벌어지면 언제나 군대가 동원되는데 이는 ‘재앙을 해결해주는 건 국가’라는 이미지를 강화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무력한 상황에, 공포스럽고 불안한 때에 자본주의는 그 마비상태를 파고든다. 애국심, 인종주의, 국가주의는 새롭게 욕망을 투사하고 증오를 분사할 경로를 만들어줍니다. 무력감과 갈망은 사태의 양면이며, 자본은 그 둘을 두 발 삼아 나아갑니다.
‘더 잘했다면 재앙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라는 접근은 어쩌면 환상인지도 모릅니다. 이반 일리치가 말했듯 인간은 앞을 내다보는 자가 아니라 언제나 ‘이후에 돌아보는 자’, 에피메테우스적 존재입니다.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미리’는 없습니다. 징조나 원인은 언제나 재난이 일어난 후에만 돌출되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건 이후 밖에 살 수 없습니다. 항상 다 잃어버린 후에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무너진 폐허에서 무엇인가를 주워 모아서, 남은 사람들과 사시 시작하기를,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시도하는 일만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라는 점에서 희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과거이지만 미래죠.
언제나 권력의 도구인 ‘수치 논리’에 맞설 무기는 상상력
세미나 전날, 무려 7년 만에 대학 동기 한명을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비록 지금 전혀 다른 일을 하지만, 전공이었던 환경공학 지식이 있었던지라 그날의 무더운 햇빛을 보며 ‘이렇게 더워진 이유는 탄소 때문이다, 탄소가 수천만 톤 배출되는데, 그걸 줄여야 한다’며 정확한 수치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탄소 없는 발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요. 출장 업무가 많은 그는 그날도 멀리 멀리 자가용을 타고 고객들을 만나러 가야했습니다. 나름의 ‘과학적’ 지식과 ‘친환경’ 논리로 무장한 그 앞에서 원전에 대한 저의 입장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머뭇거렸습니다.
세미나 시간에 이 경험을 나누면서, 몇 가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찾아왔습니다. 절대 석탄이나 석유 기반 에너지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자력을 추동하는 욕망은 조금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일본이 순환형 원자로인 고속증식로를 ‘영원한 태양’이라고 부른 것을 떠올려보면, 원자력 발전에는 그 자체로 태양과도 같은 무한한 에너지원을 손에 넣겠다는 열망이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90년대 온난화 담론 이후, 전기 생산에 따라붙는 탄소의 그림자를 없애겠다는, 아무런 오염도 남기지 않는 ‘싸고 깨끗한’ 동력을 갖고 싶다는 열망이 더해졌지요. 물론 그 열망 중 어느 것도 현실화 될 수 없었습니다. 고속증식로는 폐기되었고, 원전은 별보다 오래가는 방사성 폐기물을 남기고, 끊임없이 파손되고 누출되며 바닷물을 데우고 생물들을 피폭시킵니다. 물론 방사능 오염은 특정한 경우가 아니면 곧바로 죽음을 선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IAEA는 계속 ‘흉부 엑스레이 몇 회...’ 따위를 운운합니다. 하지만 체내에 축적되는 방사능은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넘겨지고, 사막과 바다의 비인간 존재들을 절멸시키는 방식으로 퍼져갑니다. 우리의 성마른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은 이런 ‘느린 폭력’을 수치화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가 수치를 가져오는지, 그 뒤에서 언성 높이는 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해야만 합니다.
핵이라는 에너지 발전 방식은 지금까지의 방식들과 여러 면에서 단절점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핵분열(혹은 핵융합)이라는 방식은 원자의 구조를 인위적으로 뒤바꿔버리는 일이며, 이는 전자기력 수준에서 일어나던 지금까지의 ‘화학반응’에 의존한 발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변형입니다. 원자력 옹호자들이 언제나 핏대를 세우며 외쳐대는 ‘안전안전 절대 안전’(<헤어질 결심>의 박해일 아내 역...)은 언제나 조건부입니다. 예상 밖의 문제가 터지지 않는 한에서는 안전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문제는 터집니다. 지구가 살아있는 한 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오며, 지구의 꿈틀거림이 아니어도 인간 스스로가 그 안전망을 부수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발전소를 두고 일어난 공방을 생각해보면 서늘합니다. 사실상 핵무기 전초기지인 원전은 전면전에서 제1목표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인류의 과학기술로는 그렇게 ‘안전’이 ‘예기치 못하게’ 흔들려서 문제가 터졌을 때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녹아내리는 연료봉을 바라만 보아야 합니다. 대피해야 하고, 소개(疏開)해야 하고, 죽음의 땅으로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리고 단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 버려진 수많은 핵발전소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운전중인 422개(건설중 57개)의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관리만 잘하면 문제없어’라는 신앙은 관리가 안됐을 때 대처할 방법이 전무하다는 사실 앞에서 그저 망상에 지나지 낳습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할지 모릅니다.
인간만의 환상, 인간만의 왕국 속에서 모든 생물의 죽음을 대가로 ‘무한 발전’을 과연 계속 해야 하는가? 온실 가스만 안 나오면 허용되어야 하는가(사실은 원전 사업의 온난화 기여도는 적지 않다)?
도대체 생각이라고는 하는지 모르겠는 자들이 내세우는 알량한 수치 앞에서 우리 존재에 대한 상상력으로 맞서야 할 것입니다. 오염수를 ‘과학적으로’ 처리수라고 부르자고 하는 이들이 놓이고 있는 것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상상력입니다. 수치를 내세우는 자본과 국가의 문제틀 자체를 무화시켜야 합니다. 그들의 논리의 전제들은 진부하고 시야는 비좁습니다. 거기에는 인간밖에 없고, 그 인간은 마치 경제가 성장해야만 행복할 수 있고, 상품과 서비스로 둘러 싸여야만 웃을 수 있는 존재로 치부됩니다. 그래서 다른 동물이나 다른 국가/계급의 사람들의 불행이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잘 살기(벌기) 위한 경쟁의 결과라고 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 전제를 부숴야 합니다. 어떻게 나의 신체가 지금 만져지는 윤곽에 그치지 않는지, 왜 그들의 존재가 나의 존재인지, 어떻게 나의 생애가 이 몇십 년이 아니라 몇 천 년 몇 만 년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이해하고 말해야 합니다.
이시무레 미치코의 <고해정토>에는 저자가 미나마타산 미역을 요리해서 씹어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묵직한 물음을 가슴에 남깁니다. 그는 왜 먹는 걸까요? 한편에서는 정치인들이 후쿠시마산 수산물을 먹겠다고 쇼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는 이 바보짓과는 별개로 우리 자신의 먹기에 대해 사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동력은 ‘안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이해가 갑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반대해야 하고 몸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우리의 소중한 몸, 소중한 건강을 보존하는 것이 저항의 시작과 끝이어야 할까... 이시무레 미치코는 미나마타사람들과 고통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병을 앓는 그들과 같이 걷고자 합니다. 근대 문명을 맹렬하게 노려보는 일을 그치지 않으면서요. 아무리 싸워도 올 것은 옵니다. 문제는 재앙 이후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입니다. 그 고통을 더 전면적으로 겪는 존재들(주로 그 재앙에 기여도가 거의 없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다의 물고기들, 산호들, 조개들. 빈민들, 농민들, 하청노동자들. 그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한, 우리는 우리의 사재기나 과민한 안전주의를 재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재앙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재앙에서 가장 심하게 다친 이들과 연대하고 거기서부터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는 일뿐일 것입니다. 저에게는 배우고 글을 쓰는 일일 수 있겠습니다. 교사인 분들은 아이들과 함께 뭐라도 이야기를 나누는 일일 테고, 예술가에게는 그 문제를 직관적으로 담아내고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이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다른 직장을 가진 이들도 끊임없이 시스템과 자본으로 회귀하기를 거부하는 일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후기가 늦은데다가 길어져 버렸습니다.
다음 시간(7.18)에는 <후쿠시마 하청노동 일지>를 읽고 이야깃거리를 적어옵니다. 이번에는 후쿠시마 제1발전소 안으로 들어가 더 생생한 계급적이고 현실적인 장면들을 만나게 됩니다. 무척 기대가 되네요! 그럼 화요일 6시 30분 줌에서 만나요!
인간은 재앙 이후를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에 공감이 됩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재앙에서 가장 심하게 다친 이들과 연대하고 거기서부터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는 일뿐"이라는 말을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힘을 얻고 갑니다-!
이번 홍수로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보고 우리는 지하차도를 눈여겨보게 됩니다. 평소에 저기가 단숨에 잠겨서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을까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일이 터지고 나서 그곳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국가가 정부가 그곳을 다시 들여본다고 나아질까요? 재난 이후를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의 취약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전 여전히 절망과 체념이 가득한 상태이지만 계속 질문하게 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어리석음을 짊어지고 가는 방법을요... 값진 지난 시간의 기록을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히 읽었습니다~~ 다들 이따 뵈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