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과 기술철학을 횡단하는 ‘생-기 세미나’ 네 번째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규모도 더 커지고 주제도 새로워지니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습니다.
지난 시즌 저희는 가장 시급하고도 중대한 현실 문제인 후쿠시마와 원자력에 대해 공부했었습니다. 그리고 오염수가 방류되는 오늘, 저희의 공부가 밀려오는 무력감을 헤쳐 나갈 작은 보트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재난 이후만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에게는, 계속해서 배우고 애도하는 힘을 길러줄 지혜가 절실합니다. 그 지혜는 물론 현안적인 정치 사회 경제의 구조에서 떨어져서는 안 되지만, 사태의 폭이 넓고 복잡할수록 보다 근본적인 지평까지 내려가야만 합니다. 긴급함은 이곳에서의 즉각적 실천을 요하는 동시에 존재에 대한 전면적인 재정의를 요합니다. 계급, 젠더, 인종, 노동, 동물권 등의 첨예한 문제들에 진지해지고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와 목소리내기 위해서조차 심층을 탐구해야 합니다. 인간/비인간, 생물/비생물, 주체/객체의 경계와 전제를 뒤흔들고 허물어야만 합니다. ‘사물’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던 이미지들을 되묻고 재탐사하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천지만물이 되어가기!
이것은 사실 명상이나 찰나적 경험을 통한 임시적 정서 체험에서도 맛볼 수 있습니다. 살면서 한번쯤 사물들(물체들과 사건들)이 진동하는 경험을 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 체험이 더 번져 나와 윤리와 정치의 영역을 두드리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개념이 필요합니다. ‘이론화’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물질의 생기, 생동하는 물질성을 전달가능하고 사유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새로운 존재론을 정립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사물의 역량을 인식의 범주에 재도입하고 존재들의 배치(Agencement)를 논의 선상에 올림으로써, 전혀 다른 윤리와 정치를 기획하게 되지 않을까.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인간의 옆과 안으로 흐르는 생동하는 물질성을 명료하게 표현함으로써, 사물들의 힘을 더 정당하게 다루었을 때 정치적인 사건을 분석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9쪽)
생기적 유물론 : 비(非)유기적 생명을 사유하기
<생동하는 물질>은 절실한 문제의식과 과감한 기획(난희샘의 표현으로는 “오랜만에 만난 속이 시원한 책”)을 담고 있는 텍스트였지만, 막상 함께 이야기를 하려 하니 상당히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한 페이지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는 수많은 사상가들의 수많은 개념들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생기를 물질성에 고유한 것으로서 이론화하는”(18쪽) 작업은 맨땅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지성은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객체들에 적합하게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일상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수준을 학술적으로(소통가능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앞선 철학자들의 작업물들에 기대야 합니다. 저희가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고 한편으로는 턱 막혔던 이유는 아마 베넷의 이런 방법론이 낯설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들과 개념들을 만나면 극히 반갑다가도, 그것들이 엮이고 변주되는 방식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게 되는 것이죠.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선 잘 닦인 돌이며 목재를 빌려와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 개념들 중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면서 쌓아나가는가 일 것입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지렛대로 쓰인 후 해체되고 무엇이 들보나 주춧돌로 놓이는가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베넷은 자신이 중심에 두고자하는 노선을 분명히 밝힙니다. “나는 헤겔-마르크스-아도르노의 흐름보다는 데모크리토스-에피쿠로스-스피노자-디드로-들뢰즈의 전통에 속하는 유물론을 추구한다.”(18쪽) 이 두 흐름은 모두 유물론이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역량을 정초함에 있어서 “인간 권력의 자취를 쫓는”가 아니면 “사물적인 권력 그리고 물질적 행위성의 자취를 쫓는”가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는 전자와 달리 인간을 유일한 행위자이자 주체로서의 지위에서 내려놓습니다. 여기서는 인간 아닌 모든 사물들도 매번의 사건에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소입니다. 유기물 뿐 아니라 무기물까지도 창조적인 행위성을 갖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유지하고 다른 것에 무언가를 하게 하는 능동성, 즉 ‘권력’ 모든 사물에게 존재합니다. 이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베넷은 ‘사물-권력’(thing-power)이라는 개념을 만듭니다. 그리고 사물과 권력을 ‘-’으로 연결하는 이 시도 자체가 앞선 노선, 즉 인간중심주의를 포함한 모든 철학과의 결투이기도 합니다. 생기적 유물론에서 인간은 중심에 있지도 예외적이지도 않습니다.
“물질을 능동적인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인간 행위소의 지위를 재조정하는 작업을 요구한다. 이것은 경탄할 만하고 장엄한 인간의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권력을 우리 자신이 생기적 물질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에 대한 증거로서 제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권력은 그 자체로 일종의 사물-권력이라 할 수 있다.”(54쪽)
이렇게 베넷은 존재하는 것들의 ‘정동’affect를 다루지만, “인간 신체에 제한되지 않는 ‘정동’으로 나아”(16쪽)가고자 합니다. 이는 인간에 초점이 맞춰지고 인격에 특권화된 사유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비인간 신체 내에 존재하는 비인격적이고 비유기적인 활동성과 반응성을 복권시키는 일입니다. 그러한 시도 중 하나로, 베넷은 ‘비유기적 생명’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씁니다. 생명이고 삶이지만, 그것을 유기체가 아닌 물질도 갖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 저희가 겪은 어려움의 핵심이 있습니다. 세미나 때에도 자주 나왔던 말, ‘동물이나 나무는 모르겠지만, 돌도 정동이나 생기가 있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저희에게 일반적입니다. 이는 생기를 유기체와, 정동을 감정과 동일시하는 습관이 뿌리깊음을 보여줍니다. 베넷은 비유기체라 불리는 물질조차도 ‘자기-조직’하며 끊임없이 “어떤 행위를 하는, 극적이고 미묘한 효과를 생산해내는, 활기 없는 사물들의 기이한 능력”(46쪽)을 펼쳐내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물체body, 사물thing, 물질matter
여기까지가 제인 베넷의 기획에 대한 스케치인데, 사실 걸림돌은 많습니다. 슥 따라가다보면 알 것 같으면서도, 하나를 붙잡고 말하려고 하면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겠는 것 같아지는데요. 이것은 아마도 의식하지 않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우리의 용어들이 흔들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순샘께서는 아주 적절하게도 개념들의 맥락을 정리하고 가자는 말씀을 해주셨고, 채운샘께서 교통정리를 해주셨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의 개념이 차용되든 그 사람의 철학에서 펼쳐질 때는 다른 뉘앙스를 띠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의 유래와 의미를 밝히는 일은 쉽지도 않고 대단히 중요하지도 않지만, 낯선 철학에서 큰 가지를 잡고자 할 때는 유용하기도 합니다.
기초적인 단어들부터 짚어보면 ‘물질’, ‘사물’, ‘물체’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뒤섞여 사용되는 가운데에서도, 서구 철학에서 나름의 용례와 범주를 갖고 사용되곤 합니다. ‘물체’body는 연장적인 덩어리로서 깊이, 높이, 너비를 갖는 하나의 체(體)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됩니다. ‘사물’thing은 소위 ‘것’ 또는 ‘무엇’이라는 말에 담길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물체뿐만이 아니라 비연장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들도 모두 사물이지요. 지시할 수 있는 무언가. 인간, 감정, 개념, 심지어 어떤 시대나 사건도 사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론적 습관과 제한 때문에 우리는 사물을 정적이고 경계지어지고 수동적으로 대상화된 객체(고체-원자)로 표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넷은 ‘사물-권력’이라는 개념을 고안하고 그것이 행위하는 ‘배치’를 이론화합니다. ‘물질’matter은 사물을 가능케 하는 가장 근원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사물이든 몸체든)이 제 특성을 갖고 나타나고 또 돌아가는 질료(hyle)입니다. 들뢰즈라면 ‘충만한 몸’ 혹은 ‘기관 없는 몸’이라고 표현했겠죠.
앗, 그리고 한 가지 더 짚을 것은 하이푼 ‘-’의 사용입니다. 베넷의 핵심 개념인 ‘사물-권력’에서 뿐 아니라 ‘외-부’(out-side), ‘비-유기적 삶’ 등과 같은 표현에서 끊임없이 사용되는 ‘-’는 기호입니다. 근대철학에서는 기호도 언어이자 개념입니다. 니체는 엄청난 기호를 사용했습니다. 기호는 독해에서 일종의 효과를 나타내지요(네 기호도 생동합니다!). 특히 '-'은 들뢰즈나 푸코의 텍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에서 사용되는데요. 두 용어 사이를 이러한 기호로 연결 지음으로서 그 둘을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연결시켜보겠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정동affect, 배치agencement, 창발emergence
다음으로는, 베넷이 주춧돌로 삼는 핵심 개념이자 저희가 헤매기도 했던 개념들입니다. ‘정동’affect는 정서, 정념, 겪음 등의 여러 의미로 번역되고 1970년대부터 정치적으로 사유되기 시작하지만, 그 개념을 정립한 사람은 스피노자입니다. 베넷은 다소 친절하게 “나는 여기서 정동을, 일반적인 신체가 갖는 활동성과 반응성이라고 언급하는 스피노자적 정의에 기반해서 해석하고 있다”(17쪽)고 밝히고 있습니다. 정동은 다른 신체에 효과를 만들어내는 사물의 행위성이며, 끊임없이 다른 신체의 정동과 조합되거나 조합되지 않으며 능동과 수동의 작용들을 교환하며 합성되고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정동은 “주관적인 감정 이전에(또는 주관적인 감정 없이) 힘을 느끼는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주체성으로 경직되는 경향이 없는 힘의 장을 형성”(17~18쪽)한다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정동은 인간적인 정서나 생물에게 귀속된 감정이 아닙니다. 그렇게 정동을 그렇게 무기체에 깃든 ‘생명력’ 같은 것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생기론의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정동, 생기, 활기는 나와 고양이에게는 있지만 바위에게는 없는 그것이 아닙니다. 베넷의 기획은 인간 및 유기체의 사회에 집중되었던 정동 개념을 비인간과 비유기체들로 확장하고, 거기 부여된 위계를 허물면서 새로운 정치를 기획하는 일입니다. “나는 물리적 신체에 들어가 그것에 영혼을 불어넣는 별개의 힘을 상정하지 않으며, 정동을 물징성과 동일시한다.”(18쪽)
‘배치’agencement. 베넷은 사물-권력이라는 말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상호작용적인 간섭, 협력, 공동 작용”(76쪽), 즉 ‘외-부’의 행위성을 말하기 위해 배치 개념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베넷은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이루는 묶음인 동시에 언제나 개방되어 있어 통일할 수 없는 합을 배치라 부르며, 그 배치와 더불어서 행위소들이 행위성을 발휘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배치 개념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작동의 관점에서 존재를 바라보기 위해 ‘기계’machine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데요. 배치는 문자 그대로, 각종 밸브와 관과 배선들과 더불어서 작동하는 기계들의 배열입니다. 모든 존재는 연결과 흐름과 끊김과 고장과 접속을 통해서 작동하며, 이 작동이 달라지면 맥락도 의미도 달라져 결국 존재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는 곧 존재는 작동과 더불어 생성됨을 의미하지요. 기계들은 결국 서로 맞물린 다른 기계들, 즉 배치와 더불어서 생산되며 그 작동으로 배치를 생산하지요. 기계와 배치는 ‘유기적 사회’라는 말을 넘어가기 위한 개념입니다. 유기적 사회는 중심을 갖고 부분들이 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정태적이고 위계적인 사회/개인의 유기체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기계/배치.
‘창발’emergence. “배치를 통해 생성되는 효과는 창발된 성질이라 할 수 있다.”(82쪽) 창발이란 배치의 행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사물들은 사물-권력이자 행위소(actant : 주체주의적인 ‘행위자’를 넘어가고자 브뤼노 라투르가 고안한 행위 역량의 단위)로서 자신의 고유한 정동을 갖지만, 발생하는 효과는 그 낱낱의 힘들의 합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관계적인 장이 일으키는 능력은 부분들의 합을 넘어서는 고유한 시너지 혹은 묶음효과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보다 상위계층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해 나오는emerge 효과, 즉 창발입니다.
‘창발’의 문제가 이야기된 계기는, 니체와 소로의 섭생법에서의 차이를 말하는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니체는 소화의 배치를 창발의 결과가 아닌 계산 가능한 현상이라고 생각”(128쪽) 했다고 베넷은 말합니다. 맥주라는 음식을 둘러싼 신문-정치-바그너의 음악이라는 배치를 이해했던 니체는 어떤 점에서 창발의 문제를 놓쳤을까요? 소로가 소화를 질문하는 대목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는 식사가 작동하는 방식을 묻기 시작했다. 이 신체들이 나의 신체와 뒤섞일 때 실제로 무엇이 발생하는가?”(129쪽) 그는 시장의 베리보다 산비탈의 베리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베리의 권력이 다양하게 현실화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31쪽) 만약, 베넷이 니체보다 소로에서 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바로 음식이라는 물질이 신체라는 물질과 연합되면서 펼쳐져 나오는(창발되는) 예기치 못한 야생성과 활기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여전히 어렵군요, 다음 시간 난희샘의 말씀을 들어봐야겠습니다^^).
이렇게 이번 시간에 나눈 이야기들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았는데요. 아직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동하는 물질>은 마음을 울리고(?) 아름다운 제목의 책이지만, 베넷이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물질의 생기적 행위성을 이해하기까지는 해체하고 싸워야할 우리의 이분법적이고 유기체적 사유 습관이 두텁게 남아 있습니다. 어렵지만, 어려운 게 당연함을 기억하며, 베넷의 문제의식을 꼭 잡고 개념들의 숲을 같이 헤매 보아요! 2주간 또 재밌게 읽고 생각하고 만나요!
다음 시간(9.5)에는 <생동하는 물질>을 끝까지 읽고 과제를 써 옵니다. 채운샘이 던져주신 과제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큰 물음입니다. 더 디테일한 질문은 추후에 안내드릴게요!
이 어마어마한 후기에 댓글을 안 달수가 없네요. 우리가 이렇게 위대한 세미나를 하였나라는 의문이 살짝 들기도 하지만서도... ^^
민호샘의 존재에 대한 전면적인 재정의가 필요하다는 말에 큰 공감이 갑니다.
그동안 생명을 살아있다 여겨지는 것들의 권리로만 전제했는데 이번 생기 세미나에 참여하여 거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네요!
지난 세미나 시간에 배우고 논의한 개념들을 더욱 세밀하게 가다듬어 이해한다면 공부의 외연이 더욱 확장되리란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이탁오와 함께 하는 논어 시간에 '지, 인, 용'의 의미를 배웠는데요. 知는 지성과 판단력, 仁은 감수성과 관계, 勇은 실천력의 의미라고 합니다.
저는 생기 세미나가 '용'의 영역에 해당되어 우리의 공부가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 같습니다.
4차 세미나에는 더 많은 규문의 학우들이 함께 하시면서 공부의 외연을 확장하시면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2분만 더 오시면 세미나 시간이 7시로 늦춰질 수 있으니 많이들 참여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