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하는 물질>을 다 읽었습니다. 다 읽고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은 ‘어렵다!’였고, 두 번째 생각은 ‘어렵지만, 이 멋지고 절절한 안간힘에 함께하고 싶다!’였습니다. 제인 베넷의 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물-권력, 배치, 생기, 행위소, 코나투스, 클리나멘, 창발, 야생성, 형성충동, 생의 약동, 작은 행위성, 공중, 만물의 의회 등의 개념들을 경유하면서 베넷이 이론화하고자 한 ‘생기적 유물론’은 어떤 생각과 싸우고 어떤 생각으로 초대하고 있는 걸까요?
제인 베넷은 유물론과도 생기론과도, 심지어는 환경주의와조차도 결별하고자 합니다. 환경주의는 파괴자로 지목하든 해결사로 자처하든 ‘인간’을 이 세상에서의 특권적 행위자로 놓습니다. 인간중심주의와 싸운다는 그 주체도 인간이지요.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인데, 환경주의가 말하는 ‘환경’이 계속 인간 바깥에 놓인 인간 문화의 대립물로만 설정되기 때문입니다. 베넷이 싸우고자 하는 것, 의인화와 같은 전략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도 맞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이분법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물 사이의 경계선이 흔들리면, 나는 더 이상 비인간 ‘환경’의 위나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의인화를 거부하는 철학적 입장은 많은 경우 인간과 신만이 창조적인 행위성의 흔적을 품을 수 있다는 오만한 주장에 갇혀 있다.”(290쪽) 차이를 무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경계를 지우자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말하고 인간의 관점 안에서 느낀다. 그렇게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사물은 구분하는 선들은 작동하지만, 거기에 수반되는 위계짓기를 보류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구분들의 선험성을 무너뜨리면서 그 사이를 흐르고 있는 물질 흐름의 창조성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베넷 자신이 말하듯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넘어가고자 하는 이원론보다 훨씬 진실에 가까우며, 그 이원론의 역사가 낳아온 폐허에서 무척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베넷은, 물질은 다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힘으로 운동하고 변형되고 변형시키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사물은 객체가 아니다.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 행위자와 환경의 이분법,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은 낡았을 뿐 아니라 유독하다. 그는 “환경주의에서 생기적 유물론으로, 자연과 문화가 대립하는 세계에서 생동하는 신체들의 이질적인 일원론으로 입장을 옮기면서”(294쪽) 훨씬 더 급진적이고 지속가능한 정치와 윤리를 상상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인간은, 더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 “내 주장들은 인간의 생존과 행복에 대한 나의 관심과 의지로부터 우러나온다. 즉, 나는 인간의 물질성과 사물의 물질성 사이의 세심한 만남을 추구하는 접근 그리고 더 녹색인 인간 문화를 촉진하고자 한다.”(12쪽)
경고 : 환원론을 조심하시오
이 급진적이고도 너무나 필요한 생기의 이론화 작업을 저희는 수월하게 소화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 그 작업이 동원하는 수많은 현대철학적 개념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저희가 개념들 사이를 헤매면서도 질문을 스스로에게 돌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생기적 유물론'적 이해가 인간을 이해하는데 어떤 다른 실마리를 줄 수 있을까?" 이것이 저희 과제의 주제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기적 유물론’을 우리 각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논의되지 않으니, 과제를 쓰려고 보니 다소 벙벙한 정답 말하기 식으로 흘러가게 되는 듯했습니다. 중요한 건, 정작 나 자신에게 물질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느냐인데 말이죠. 그래서 채운샘께서 논의의 방향도 잡아 주실 겸 근본적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물질이 뭔지에 대한 이해가 좀 바뀌었는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만큼이 실천입니다. 만약 물질에 대한 기존 생각에 ‘생기’한다는 특성만 덧붙인 것에 그쳤다면, 생기론에 지나지 않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물질을 어떻게 생각해왔는가? 한 분씩 마이크가 돌아가고 나자, 너희에게 물질은 ‘다룰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에너지의 거처’, ‘정신이 아닌 것’, ‘생명이 아닌 것’ 등으로 여겨져 왔으나, 물질은 보거나 만질 수 없고 계산될 수 없는 효과를 일으키는 힘 자체이기도 하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을 생명이나 정신과 같다고 해야 할지 다르다고 해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질문은 생명이나 정신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베넷은 베르그손과 드리슈의 철학을 통과하면서, 그들이 물질을 생명과 구분하며 창조적이고 능동적이기보다는 무력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둔 사실을 비판합니다. 저희는, 베넷이 물질 자체의 생동성을 강조함은 알았지만 그래서 그가 생명을 뭐라고 하는가는 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정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질이 생동한다면 과연 정신은 어떻게 설명되는 걸까요? ‘물질=정신’ 혹은 ‘물질=생명’이라고 단번에 동일시할 수 있는 걸까요? 저희는 3장 ‘먹을 수 있는 물질’에 나오는 소로와 야생 베리 이야기와 4장 ‘금속의 생명’에 나오는 금속 결정들의 투과성 및 자기 변형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생명과 감정과 사유가 음식·장소·공기·관계·배치와 함께 간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물질/생명, 물질/정신, 인간/환경 등의 구분이 전보다 선명치 않아집니다. “내가 산비탈 위에서 먹은 몇몇 베리가 나의 천재성을 키워왔다”는 소로의 깨달음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베넷이 정신과 생명이 물질이다, 라고 선언하지는 않지만 그의 이론은 정신과 물질 사이에 질적인 경계를 두지 못하게 만듭니다. 저희의 토론은 이리저리 혼란한 선을 그리며 이어졌습니다.
어쩌면 저희는 ‘생기적 물질론’에서의 물질이 저희가 상상하는 생명이나 저희가 전제하는 정신을 착착착 설명해내야 한다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이라면, 물질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물질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죠. 하지만 이것은 환원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질과 정신을 둘 중 하나로부터 쫙 설명하려는 시도 말이죠. 이는 기계론과 관념론이 반복했던 환원론적 실수입니다. 환원론은, 어쨌든 질적으로 다른 것이 분리된 채 있다고 두고서 무엇이 더 근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물질로 정신이나 생명을 해명하려 할 때 보였던 태도가 딱 그랬습니다.
생기적 유물론 : 물질에 반하는 것은 실체주의다
채운샘은 브뤼노 라투르의 말을 빌려서, 이 시대(혹은 근대)의 사고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하나의 습관은 우리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태도와 ‘중심과 전체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 시대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일종의 ‘실감의 부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라인으로 세상을 보고, 숫자로 경제를 만나고, SNS로 이슈를 접합니다. 모든 것이 이미지화되고 디지털화되고 버튼화된 세계에서 우리는 스크린의 픽셀들과 대면합니다. 사건들은 실감되기보다는 명멸합니다. 지진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는 소식과 어떤 연예인이 컴백했다는 뉴스가 나란히 나오고, 전쟁과 전염병 이야기는 고양이 동영상이나 예능 클립이 밀어냅니다. 어디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든(기후위기, 지진이, 홍수, 핵폐기물 방류건, 코로나 재유행이건) 우리는 그것을 대상 세계로 봅니다. 3인칭의 시점을 유지합니다. 놀라고,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상상하는 대응은 어떻게 그 문제를 없앨까, 그런 사건 없는 세상은 얼마나 좋으며 그렇지 못한 이 세상은 얼마나 암울한가라는 식입니다. 그리고는 무력감-바쁜 일-잊어버림-또 다른 사건-무력감의 단계를 밟습니다. 이미지로 문제를 파악하고 이미지로 해결을 제시하는 것. 이런 접근은 공허하고도 위험합니다. 브뤼노 라투르는 하늘을 붕붕 떠도는 이미지와 거대 담론의 세계에서 내려와 우리가 착륙할 수 있는 지평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바로 우리가 발밑입니다. 손이 닿는 거리, 침이 튈 수 있는 거리만큼이 우리의 지평이지요.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땅의 상실, 이런 우리 자신을 바로 볼 줄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베넷과 같은 소위 신유물론을 시도하는 학자들의 목표도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상 베넷에게 ‘물질’에 반하는 것은 정신도 생명도 아닌 ‘실체주의’입니다. 실체주의란 사실상 이미지적 세계-구성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이미지로 맞닥뜨리는 세계를 훨씬 더 잘 실체화합니다. 그것들은 살갗으로 감각되거나 체험되지 않고, 원래부터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미지화된 대상을 시간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보고 만져보고 다시 고쳐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그대로 있는 객관적 현실로 자리매김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과 국가죠. 하지만 라투르가 이야기하는 구체적 지평은 언제나 감각되고 몸으로 부딪히는 번거로움에서 펼쳐집니다. 이곳은 모순성과 운동성으로 가득하지요. A인 줄 알았던 것이 다시 보니 B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료가 됩니다. 오늘은 기쁘고 내일은 슬프면서 매번 다른 기운과 다른 색채로 펼쳐집니다. 바로 이런 접촉하고 유동하는 내 안팎의 주변세계. 이것이 우리가 이미지의 실체주의로부터 회복해야 하는 세계입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제인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인 것입니다. 본질, 실체, 영원, 인간 주체의 사고방식에 반기를 드는 것이지요.
물질은 굳이 (긍정의 형식으로)정의 내리면 변화와 과정이라고 채운샘은 말씀하십니다. 유체이자 흐름이라는 의미에서 생동하는vibrant 물질. 이 유동성으로부터 창조와 항상성과 권력과 자기조직이 함께 딸려 나옵니다. 물질의 이런 균열나고 구멍나고 진동하고 투과하고 흘러가는 본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사물과 동시에 그 배치가 중요하고, 개체와 동시에 그것의 행위성이 함께 사유되어야 합니다. 창발과 행위소. 사실상 고정적 기능에 충실한 우리의 언어 표현에 잘 담기지 않는 면면들입니다. 그렇기에 상상하기도 쉽지 않지요.
다시 저희 토론이 묶인 지점으로 돌아와, 생기적 유물론이 왜 생기론도 유물론도 아닌 새로운 일원론적 시도인지를 생각해봅시다. 베넷의 이론은 모든 것이 물질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원래 물질이 아닌 것을 상정하고 그것을 물질로 덮어버리는 뉘앙스를 주지요. 베넷은 그보다는 물질에 부여된 우리의 전제들을 고장내고 뒤흔드는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물질은 생명보다 무력하고 비창조적이다, 물질은 정신보다 고정적이고 자동적이다. 물질에 부여된 비유기체적이고 비의지적인 면모는 <생동하는 물질>의 모든 페이지에서 철저하고도 정당하게 반박됩니다. 우리는 베넷이, 가장 안정되고 반-생명적이라고 여겨지는 금속조차도 자신들의 결정 조직 안에서 내부-작용하고 균열내고 피드백하면서 생동하고 있음을 보여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활기를 속박해버린 그 쇠사슬의 ‘이미지’와 달리 금속은 자신의 내부에서, 그리고 다른 모든 비금속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배치를 이루며 존재를 ‘과정’으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즉 물질은 가장 극단에서부터 이미지-실체주의를 비껴나고 빠져나오면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질이 곧 정신이고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섣부릅니다. 우리는 항들의 경계를 흐리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물질은 연장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정신은 비연장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똑같은 경향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이원론이 아닌 이유는, 정신은 그러한 연장적 흐름 위에서만 발생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물질은 정신의 비연장적인 작동들에 영향을 받으면서 나아갑니다. 한 경향이 없으면 다른 경향도 불가능하며 계속해서 상호적 발생 상호적 행위가 얽혀갑니다. 이것은 동시적 경향이기에 한쪽을 잘라서 무엇이 더 근원적이라고 말하는 환원론으로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물질’에 우리가 아는 ‘생기’를 덧붙인 게 아닙니다. 물질은 존재 자체가 이미 권력이고 흐름이고 생기라는 것. 우리와 우리 바깥은 경계가 없다는 것. 이 이야기를 꼭 전해주고 싶고 함께 고민해보고 싶은 것이 베넷의 진심임을 조금 알겠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저희는 원자력이나 지금의 과학기술 등을 이야기해보았는데요. 그런 실질적 문제에서 생기적 유물론을 작동시키는 일은 차차 더 발전시켜 나가보면 좋겠습니다.
이 구절은 꼭 나눠보고 싶네요. 정말로 사실인 이 구절을 몸으로 실감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신중함으로 빛날까요?
이 물질의 생기는 나 자신이자, 나에 앞서고, 나를 초월하며, 나 이후에도 존재한다.(291쪽)
다음 시간(9.18)에는 헨리 데이빗 소로의 <산책 외>를 읽고 옵니다. 원래 2009년 책세상 판으로 공지드렸었는데요. 책세상에서 따끈따끈한 개정판이 나왔네요. 편하신 책으로 읽고 오시면 됩니다! 그럼 다음 주 화요일 오후 6시30분 줌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