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만물-되기’라는 제목과 더불어, 인간/비인간, 유기체/비유기체, 주체/객체, 전체/부분 사이에 그어진 경계와 위계를 넘어선 세계에 접속해보고자 했던 저희의 간절한(?) 시도는 조금의 수확이 있었을까요? 지난 한달 간 <생동하는 물질>을 읽었던 저희는 개념들의 난해함과 화려함에 사로잡혔던 동시에 제인 베넷이 그토록 조심했던 ‘이미지화-실체화’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생기라는 특성이 물질에 덧붙어 있다는 게 아니라, 물질 자체가 이미 상호 변형하며 소용돌이를 품고 또 펼쳐내는 힘들이요 생기라는 것. 그런 과정적 생동성만이 물질일 수 있고 또 정신일 수 있다는 것. 다분히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비전으로 이어지고 있는 베넷의 이 시도에 상식을 사는 저희가 가닿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항을 전제하는 언어들을 넘어설 개념들-경험들이 필요해 보였는데요, 그 역할을 해줄 흥미로운 텍스트가 바로, 베넷이 직접 언급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산책 외>였습니다. 채운샘께서는 소로가 말하는 ‘야생’과 ‘자연’이라는 것을 베넷의 개념을 경유해 풀어보라는 질문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저희는 저희의 방식으로 텍스트를 만나 이렇게 저렇게 자신의 감동을 유쾌하게 나누었습니다.
소로의 자연-야생을 어떻게 이해할까?
저희의 이야기는 ‘소로에게 자연은 무엇이며, 그것은 문명과 어떤 방식으로 대립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맴돌며 나아갔습니다. 몇몇 샘들은 과제에서 산속이나 시골 풀밭에서의 경험을 환기하시며, 그곳에서 신체가 힘을 쓰는 방식이 지하철이나 아파트 같은 도시의 매끈한 공간에서와 극명하게 다름을 적어주셨습니다. 물론 이런 경험을 소로가 말한 자연-야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 신체에 최적화된 도시 조건과는 전혀 다른 배치임은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소로는 도시의 이러한 계획되고 계량된 환경을 못 참아 합니다. 그는 마을에서 한참을 걸어 나와 숲으로 습지로 초원으로 나아갑니다. 거기서야 편안함과 활력을 되찾습니다. 그리고는 야생 속으로의 산책을 즐기지 못하는 오늘날의 문명인들을 개탄하기도 하지요. 이런 대목들이 저희에게 의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소로는 지금 문화/자연 혹은 문명/야생 사이에 이분법을 도입하고 있는 것인가? 밋밋한 문명인과 진정한 산책자 사이에 위계를 도입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몇몇 구절은 또 그런 이분법을 넘어갑니다. 가령 두세 번 꼼꼼히 읽어야 할 <산책>의 첫 문장이 그렇죠.
“나는 인간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거주자 혹은 자연의 주요한 일부분으로 간주하기 위해, 단순하게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유나 문화와 대조되는 것으로서의 자연Nature, 즉 절대적인 자유와 야생wildness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소로의 자연은 문화와 대조되지 않습니다. 자연은 인간 사회 울타리 바깥쪽에 위치하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인간과 인간 문화는 자연 안에서 자연의 거주자이자 한 현상입니다. 인간은 개척자도 지배자도 관리인도 아닙니다. 모든 비인간이나 모든 비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자연 안의 한 행위자이지요. 진동하는 물질 세계 위에서의 존재론적 평등함을 이해하기. 잘못 설정된 위계를 허물기. 이것은 베넷의 기획과 유사한 비전입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절대적인 자유와 야생’이 사유되고 체험되어야 한다고 소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두 가지 문제가 놓입니다. 하나. 야생-절대자유는 어떻게 인간중심적 경계들을 풀어버리는가? 둘. 그런 체험은 어떻게 가능한가?
저희가 확 이끌렸고 빙빙 돌았던 지점이 여기입니다. 특히 저는 <산책>의 후반부에서 소로가 수탉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새로운 신약 성서, 즉 이 순간에 맞는 복음”이라고 표현하는 구절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그때 그는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은 때맞추어 있다는 것, 즉 시간적으로 가장 앞서 있다는 것”(72쪽)이라고 말하며 온전히 현재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저는 이때 소로에게는 과거의 기억들과 개체적인 시간 구성이 질적으로 다르게 작동되는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의 말대로 온전히 현재에 있으며 “시간의 이 마지막 수난을 축하하기 위해 갑자기 나타난 봄의 건강함”을 이해합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으로 대단한 일몰의 묘사도 이어집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 광선들 속에 있는 유일한 티끌인 거처럼 보이게 한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빛이었다. 그리고 대기 또한 너무나 따뜻하고 잔잔해서 그 초원을 낙원으로 만드는 데 모자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유일한 현상이 아니고 수없이 많은 저녁때마다 영구히 일어날 것이며 그곳을 최근에 걸었던 아이에게도 기운을 북돋아주고 격려해준다는 데 우리 생각이 미치자 그것이 더욱더 영광스러워 보였다.”(73쪽)
저는 이 구절을 좀 더 해석해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소로의 체험은 정말로, 모든 과거가 구제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는 니체의 영원회귀적인 체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소로와 같이 마을 밖 숲을 하루 서너 시간 이상을 산책하는 자, 그렇게 달궈진 신체로 야생사과의 톡 쏘는 맛과 접속하는 자에게 가능한 체험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을의 사건, 마을의 시간, 마을의 가치로부터 멀어져 풀들과 빛과 흙이 이뤄내는 기운장(배치)과 같은 주파수로 들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그에게 측량과 예측에 기반한 마을의 시간은 끝나고 변형과 분출(야생사과와 소의 상호 형성)에 기반한 야생적 시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간 간극과 공간 간극이 사라진 상태 같은 것...일종의 물아일체...
(*여기서 잠깐! 저희는 이런 소로의 표현들을 낭만주의적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생각보다 낭만주의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채운샘 찬스로, 낭만주의는 현실에서 찾지 못하는 것을 환상에서 찾으려고 하는 하나의 태도임을 배웠습니다. 때 묻지 않은 영혼, 영원한 사랑, 순수한 어린양 등. 여기 현존하는 것들과 별개로 이상적이고 원래 그러한 것을 꿈꾸는 경향들이죠. 그렇게 보면 숲속에서 온갖 맛과 온도와 빛깔을 거닐며 환희에 차는 소로는 낭만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소로는 그랬을지 모릅니다. 다른 배치 속에서 다른 사물-권력을 느끼고 또 발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희들입니다. 소로의 체험을 하나의 대단한 경지로서 때, 저는 혹시 그와 그의 산책을 제게서 분리된 특별하고 우월한 것으로 분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예찬과 더불어 또 하나의 이상을 만들고, 그것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위험합니다. 소로는 소로대로 놓치고, 제 현실도 달라지지가 않죠. 이런 식의 은근한 찬미 및 우상화와 분리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시 말해 소로가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든 우리 자신의 현실로 가져와 풀어내려면 두 가지 방법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선은 소로와 우리 사이에 놓인 150년이라는 시간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21세기적 문제의식 속에서 누구보다 소로를 많이 그리고 강렬하게 읽었을 제인 베넷의 해석을 참조하는 것.
기계들 속 산책자-되기
거리를 지우면 만날 수가 없다, 고 채운샘은 당부하셨습니다. 모든 텍스트는 그 고유한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계를 지적하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로 자신의 예언대로, 그가 거닐던 숲은 도로로 덮였고 이제는 월마트 주차장이나 고속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흙 위를 걷지 않습니다. 흙 걷기는 탁월한 웰빙 프로그램으로 소비됩니다. 소로는 그런 식의 도시화가 들이닥치기 전, 그러나 이미 징후로서 도래해 있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전반기는 미국의 황금광 시대입니다. 인디언 학살을 마친 자리에 새로 놓인 철도는 신대륙의 황금과 목재와 석탄을 유럽으로 옮겨대고 있었고, 수많은 ‘러시’들과 더불어 개간된 마을에는 농사와 노동과 장사가 신성시되었습니다. 소로 자신도 얼마간 알바처럼 종사했듯, 측량하는 일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면서, 시간도 인간의 활동도 사물의 가치도 개량되고 수량화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법과 제도와 교육과 더불어 인간의 행동과 사고도 점점 길들여졌습니다. 소로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런 시스템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세금 납부를 거부했고, 정기적인 노동도 싫어했습니다.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했던 그는 태생적으로 법-학교-국가 시스템을 혐오했습니다. 물론 인간을 양화하고 길들이는 시스템을 못 참아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별수 없다며 따르거나, 다른 사회를 꿈만 꾸며 살아갑니다. 소로의 위대함은 그런 시스템에 불복종하고 뛰쳐나갔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그에 따르면 숲이 그를 이끈 것이지만요. 소로는 자유롭기 위해 기꺼이 곤궁하고자 합니다.
“오 야생의 습성을 가진 사람, 자고새와 토끼들, / 덫을 놓는 일 외에는 / 어떤 관심도 없고, / 몹시 곤궁하게 / 달랑 혼자서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삶이 가장 유쾌한 곳에서 / 끊임없이 먹는 사람.”(30쪽)
이것이 소로이고 소로의 시대입니다. 아직 마을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자기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었던 시대. 동시에 자신처럼 시스템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던 시대. 하지만 그로부터 두 세기 후를 사는 우리에게 울타리 바깥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숲은 관광화되었고, 습지는 인공적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심지어 해외여행조차 산책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로가 산책했던 그곳을 걸을 수 없습니다. 야생사과도 야생 너구리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로의 체험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와 비교하는 것은 어느 쪽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소로와 만나기 위해서,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산책을, 자연을, 문명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개념들을 우리 방식으로 변환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를 바꾸고 긍정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인 베넷이 베이스에 깔고 있는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것은 자연 안에 있습니다. 스스로 변용되면서 모든 양태를 펼쳐내고 그러한 양태로서 현존하는 자연-신. 그것은 우리가 ‘녹색’, ‘깨끗함’, ‘오염되어서 보호받아야 할 것’으로 묘사하는 자연이 아닙니다. 자연은 펼쳐지고 다시 펼쳐지는 생성 소멸 혹은 생노병사의 원리 자체입니다. 수많은 행위소들이 그 안에서 양태로서 작용하고 작용 받고 있습니다. 행위소는 주체 대신 쓰는 말이 아니라, 행위들과 권력들의 흐름에서 중심을 해체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행위소라고 할 때 ‘나’와 ‘외부(자연)’의 분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상호-작용으로서만,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인 것으로서만 존재합니다. 변화된 것이 변화시키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만들면서, 오직 맞물린 작동들로서만 존재하는 자연이지요. 인간 역시도 그런 자연의 행위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자연에서 문명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문명은 만들어진 것, 만드는 작용입니다. 하지만 만드는 일, 행위소들의 연합은 인간만의 특권은 아닙니다. 지렁이 역시 땅의 조성을 만들고, 비버가 댐을 만들 듯, 존재하는 것들은 자신의 환경을 변환시키며 스스로에게 유용한 질서를 만듭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질서 만들기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언제나 비인간 행위자들이 항상 개입되고 있습니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증여적 참여가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도시와 산업은 곤충이나 식물들 동물들에게는 유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부의 몇몇 종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환경이겠지만, 도시는 너무나 많은 수의 비인간 행위자들에게 죽음과 고통을 몰고 옵니다. 단 한 종의 편의와 번영만을 위해 제작된 시스템-배치라는 것. 이 점이 문명을 자연과 등치시킬 수는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문명은 자연에 대립되지도 자연 밖에 있지도 않습니다. 문명은 자연 안에서 자연에 의존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명은, 오직 인간적 척도들만이 부각된 이 시스템은 계속해서 자연의 중요한 원리를 가리고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 하게 만듭니다. 그 원리란 바로 운동과 과정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사람을 만날 때, 건물들 사이를 거닐 때, 우리는 반복될 수 없는 우발적 마주침을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맛은 당도-염도-칼로리로 환원되고, 만남은 용무와 시간으로 재단되고, 풍경은 구도와 색감으로만 여겨집니다. 우리는 잘 알던 시스템 속에서 잘 알던 방식으로 사물들을 스칩니다. 우리가 소로에 가닿지 못하는 건, 그처럼 울타리 밖의 습지를 거닐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걷는 거리에서 경계와 시스템으로 환원되지 않고 빠져나가는 차이들과 정동들에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배치들이 환원불가능한 기운 혹은 뉘앙스 혹은 표정으로 말 걸어오고 있음을 보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채운샘은 한 가지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파트 단지에 조성된 하천 길을 걷는 것과 소로의 산책은 같은가, 다른가? 표면적으로도 무척 달라 보입니다. 우리의 길은 이미 엄청난 토목공사와 조경산업과 도시계획의 산물입니다. 그 방식은 아주 폭력적이었지요. 그러나 그 안에도 여전히 비인간 혹은 비유기체적 행위소들이 힘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역시 하나의 야생일 수 있지요. 채운샘은 두 산책의 가장 큰 차이는 산책자가 ‘운동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하천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옆을 보지 않습니다. 헤드폰을 끼고 ‘운동’을 하려고 걷지요. 물론 이 운동은 헬스나 다이어트를 위한 걷기 활동입니다. 그러나 다른 운동이 있습니다. 보기 위한, 듣기 위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예기치 못한 맥락을 만나기 위한 움직임이랄까요. 똑같이 하천변을 걷지만 끊임없이 발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기 오리가 있었네’, ‘여기서 풀이 나네’, ‘저 사람은 기운이 좋네’, ‘구름이 저런 모양이네’. 그는 계속해서 “어라-?”하고 놀라며 언어화되지 않은 정동 속에서 공간들의 역사를 읽습니다.
채운샘은 메넷이 소로를 소화해내는 방식을 배우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넷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는 이 도시가 자연이고 이 빌딩이 숲입니다. 그리고 한 그루의 나무보다 널브러진 쓰레기더미가 더 말을 건네옵니다. “넌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하고요. 사실 모든 것은 다르게 드러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행위소들의 배치에 접속될 수 있는가, 우리가 충분히 운동 중인가 입니다. 이런 접속은 물질적 양태들과 뿐 아니라 개념적 양태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른 시대의 개념들 사이를 거닐며 그것들을 다르게 변환시킬 수 있습니다.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이 잘하듯 다른 색채 다른 질감으로 연주해낼 수도 있지요. 채운샘은 이것이 정신의 산책일 수 있겠다고 말하셨습니다. 사실 정신의 산책 없이는 우리 자신의 변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로의 텍스트와 베넷의 텍스트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사실 야생 사과를 비롯해 함께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재미난 구절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잘 익혀두었다가 다음 기회에 불러오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생-기 세미나4는 여기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는 <세상 끝의 버섯>이라는 향기 나는 책과 함께 오프라인으로 만나요!
오! 소로를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자연과 문명은 대립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연과 문화를 대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며 존재론적 평등함을 주장하는 소로의 태도가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인 베넷의 행위소 개념도 흥미롭네요! 문명을 건설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특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비인간 행위자들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재밌습니다. 인간 종만을 위한 편의와 번영의 배치-시스템이 아닌 다른 방식은 어떻게 가능할지 고민하게 합니다!
저에게 후기를 쓰라고 하더니 기다리다 못해 이렇게 올리셨군요! 민호샘이 이번 생기세미나를 하면서 든 생각들을 잘 알 수 있네요.
그리고 지난 세미나 시간에 잘 이해되지 않았던 내용들을 후기를 읽으며 다시금 되새겨봅니다.
그동안 조금씩 후기를 작성하느라 늦었지만 여튼 저도 내일중으로 올려보도록 할께요! 세미나 시간에 시간상 못한 이야기들을 조금 써보았어요~ㅎ
남은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