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4차 생기세미나 후기를 조금? 늦었지만 올립니다.
세미나를 하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정리하다 보니 길어지고 늦어졌네요.
감안하시고 읽어주세요~ㅎ
이번 생기 세미나의 마지막 책이었던 소로의 ‘산책’은 시작부터 무엇인가 제게 혼란을 안겨주었습니다. ‘산책’ 이란 제목이 주는 가벼움, 여유로움의 느낌은 미술사 시간에 배운 부르주아들의 ‘산보’와 유사한 관념을 떠올리게 하였지요. 거기에 더하여 초반부 등장하는 산책가를 십자군에 비교한 은유, 특히 은자 베드로의 비유는 당시 주교들의 선동에 의해 일어난 군중 십자군의 약탈과 파괴의 역사가 떠오르는 동시에 종교적 이상에 대한 환상으로 전쟁을 일으킨 십자군에 대한 서양 남성의 중심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오버랩 되어 처음부터 삐딱한 시선으로 책이 읽혀졌습니다.
제가 ‘산책’이란 용어를 너무 고정적인 하나의 용법으로 생각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소로의 산책 개념은 문명에 대한 비판과 자연에 대한 감각의 사유로 가득하여 소요逍遙와 같은 느낌입니다. 하루 4시간씩 헤집고 돌아다니는 걷기는 배회나 방랑에 가까워 부르주아들의 산책과는 결이 다른 행위입니다. 세미나 시간에 나온 난희샘의 의견처럼 소로는 ‘예측 불가능한 만남’의 걷기를 하며 세계를 탐험하는 열정적인 모험가 같기도 합니다. 책의 제목이 <산책>으로 정해진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아마 소로가 한국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자연주의, 사색, 평화의 이미지에 더하여 우리를 휩쓸고 있는 건강, 힐링이란 열망의 배치 속에서 ‘산책’이라는 책 제목이 가장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겠지요. 책의 제목이 어찌 되었든-사실 중요하기도 하지만- 산책에 대한 용법은 채운샘 말씀처럼 책을 읽으며 각자가 고민하고 생각하여 적절한 개념으로 번역할 수 있으면 되겠지요.
그런데 저는 소로를 참 좋아하고 그의 삶을 따르려고 하였는데 소로에 대한 나의 생각에 왜 이런 간극 또는 변화가 생겨났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용문산 근처의 시골에 살고 있지만 이곳에 오기 10년 전까지 전 도시의 아파트 숲에서 살았습니다. 그전에 읽은 소로의 ‘월든’은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문명과 사회에 대한 비판에 공감하며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낭만과 이상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곳 양평으로 이사를 와 집을 짓고 살게 된 데에는 소로의 지분이 적어도 1/4은 되지 않을까? 나머지 지분은 간디-정확하게 말하면 <간디의 물레/김종필>, 박근혜의 당선-더 정확하게는 <논어>, 그리고 작은 학교일 것입니다. 이 복잡한 연관관계는 언젠가 이야기 할 날이 있을테고 아무튼 전 시골로 와서 한 3년간 ‘지속가능한’ 자급자족의 삶을 꿈꾸며 뒷산에 버려진 빈 땅을 발견하고 개간하여 온갖 작물을 심으며 반농반업의 이른바 투잡의 생활을 했습니다. 겨울에 김장을 할 때 필요한 거의 모든 채소를 밭에서 자급했으니 꽤나 열심이었지요. 심지어 고추를 태양볕에 마당에서 말리며 비가 내릴까 노심초사하기까지 했으니...(그때는 건조기에 고추를 말리는지는 알지도 못했지요.) 3년이 지나서부터는 본업과 함께 하기에는 시간의 한계와 더불어 몸도 힘들어졌고, 무엇보다 나 하나 이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기도 하고 또 지구의 환경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무기력한 마음이 의식 한 편에 강하게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농사를 점차 줄여갔고 지금은 20평 남짓한 텃밭으로 그냥저냥 먹고 싶은 채소를 조금씩 심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민호샘이 ‘무기력’에 대해서 쓴 글을 흥미있게 읽었는데, 저 역시 무기력이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이나 지향점이 상실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기력이란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싶은 욕망-대체로 소유욕-으로 가득 차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지해 있는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욕망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실망하거나 허무에 빠져 무기력해지는 경우가 많지요. 이런 측면에서 저는 욕망의 방향을 제대로 찾을 수 있는 길로서의 이상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환상fantssy에 사로잡혀 이상을 실체화하지 않고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꿈꾸고 상상하는imagine 것 자체를 중지해서는 우리는 방향을 잃고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저냥 하루하루를 반복하며 살아가는데 무슨 힘이 나고, 욕망의 지향점을 잃어버렸는데 어디로 걸어가야 할까요?
공부를 하면서 저의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경향을 해체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는 않네요. 소로의 산책을 읽으며 그의 표현이 낭만적이라고 비판하였지만 그것은 저에 대한 투사이기도 했음을 느낍니다. 그런데 또 내 안의 자유나 낭만적인 경향을 해체하려고 하면서도 그에 대한 변론을 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낭만주의가 환상을 추구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 경우엔 그 환상幻想이 리얼러티와 결합되고 변용되어 상상像想이 되고 현실에서의 실천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환상과 상상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도 앞으로 더 생각해 볼 일이긴 합니다만... 이를테면 세계 자체가 환幻-변화, 시뮬라크르의 의미로서-인데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과연 리얼러티가 배제된 것인가라는 질문도 떠오르고요. 세미나 시간에 나온 낭만주의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오르네요.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면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은 그리스 전쟁에 참여하여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보존한다는 이상을 실천하기도 하고, 이성 중심의 근대적 사고가 강조되던 시기에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과 상상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자유주의와 낭만주의 사상은 당연히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시대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시대를 풍미한 모든 사상에 해당될 것이고 소로가 살던 19세기 초중반은 자유주의와 낭만주의가 만연한 시대였으니 책이 쓰여진 시기의 그의 생각과 표현은 그 시대를 살아간 동시대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그동안 전 소로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를 살아간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에 책을 읽으니 거의 200년 전을 살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착각했을까요? 그만큼 소로의 사상과 실천이 책을 읽은 21세기 초에도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이 될 만큼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는 인간의 자유와 낭만이 강조되던 시대에 자연을 파괴하는 근대 문명에 맞서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숲으로 가서 고요한 삶을 실천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소로의 책을 읽으며 근대 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에 공감하고 자연으로 회귀하는 삶을 동경하게 되었지요. 모르긴 몰라도 우리 나라의 산속에 은거하는 ‘자연인’들 중에서 태반은 소로의 <월든>을 읽고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저는 그동안 소로가 월든 호수에서 쭉 살았다고 생각-이것도 책에 다 나와 있는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저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입니다-하고 있었는데 <산책>을 읽으며 그가 2년 후에 마을로 돌아감을 알게 되었고 그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월든>을 다시 읽게 되었고 덕분에 <산책>에서 소로의 생각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산책>에서 소로는 첫 문장부터 야생을 강조하기 위해 문명과 자유에 대립되는 극단적인 측면에 서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의도적인 행위로 문명과 자연을 근대인들처럼 구분하여 보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문명도 인간도 모두 자연의 일부임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된 마을 사람들에게 직접 자신의 삶으로서 보이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그의 산책은 마을을 많이 벗어나지 않고 마을 밖의 경계를 헤집고 돌아다니다 귀환합니다. 월든 호수에서도 소로는 혼자 고립되어 생활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고독하게 혼자 지내며 자연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찾아온 사람들과 대화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들은 마을로 가서 여러 곳-길거리, 술집, 우체국 등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소로가 월든 호수에서의 생활을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2년 만에 떠난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는 원래 마을과 사람들을 떠난 적이 없었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하니까 소로가 마치 자연인처럼 사회를 떠나 혼자서 고립되어 고독하게 살았다고 여겨지는 것이지 그는 마을 사람들이 야생이라고 여기던 경계에서 자연과 문명이 둘이 아님을 직접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문명과 자연을 둘로 나누어 보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월든>을 다시 읽으며 소로의 생각과 글에는 대략 두 가지의 결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하나는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의 서술이고, 또 하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신체로 느끼며 관찰하고 묘사하는 글입니다. 십수년 전 처음 소로의 책을 읽으면서는 문명과 사회에 대한 비판에 공감하고 그의 삶을 따르려 했다면 지금 새롭게 다시 읽으며 그때와는 다른 측면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소로가 자신의 신체로 걸으며 자연을 감각하는 방식과 야생과 공명하며 느낀 사유를 매일 글로 기록하는 태도였습니다. 저는 베넷도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아래 문장이 바로 그렇습니다.
“ 나의 감각은 나의 사유만큼이나 유유자적해야 한다. 내 눈은 보되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대상에 다가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내게 다가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중 소로의 일기 ”
그래서 그런지 <산책>에 있는 여러 편의 글 중에서 ‘겨울산책’이 공감이 잘 되었는데, 소로는 여기서 마치 프로스트가 되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손을 잡고 대지 위를 함께 조용히 날으며 차가운 겨울 대기와 풍광을 그의 은빛 날개 위에서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처음 소로의 책을 읽을 때 문명에 대한 비판에 공명했다면 이제 그가 자연을 감각하는 신체의 방식에 더 공감하게끔 제 삶의 배치가 바뀌었음을 느꼈습니다. 아마 크크랩의 올 해 공부의 주제가 ‘감각’이고, 나이도 먹어가고 있고, 또 10년간 시골에 살면서 신체의 감각 역시 이곳 생활에 맞게 변용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미나에서 채운샘께서 말한 산책의 용법은 자연과 문명을 구별하지 않는 전제에서 ‘정신의 산책하기’를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초록의 자연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도시가 자연입니다. 도시 안의 야생성 wildness 을 발견하는 것이 이 시대 산책의 새로운 용법이 될 수 있겠지요. 이때 야생성의 의미는 규정성을 허무는 것, 길들여지지 않는 것의 의미로도 볼 수 있는데 도시에서 산책하며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베네이 본 것처럼 죽은 쥐의 사체와 병뚜껑에서, 그렇게 소외된 비인간 존재들에게서도 우리의 정동이 느껴질 수 있을까요? 이 지점에서 예술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대두되겠지요.
저처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산책의 용법을 만들어내야 할까요? 도시와 시골을 분할하는 사고를 버려야겠지만 도시가 생기를 느끼기 쉽지 않은 무기체적인 비인간 존재들로 가득하다면 시골은 밖으로 나가 한 걸음만 걷기 시작해도 생기가 가득한 비인간 존재들이 느껴집니다. 확실히 이곳에 살면서 여기에 맞는 나름의 신체를 가지게 되었는데 계절이 되면 느껴지는 대기의 숨결, 바람에 실려오는 계절의 냄새, 대지의 변화를 느끼는 감각이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자랑이나 특권으로 여기기보다는 그 자체가 내가 사는 곳의 환경이고 나 또한 이곳의 환경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걷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베넷이 말한 것처럼 ‘가볍게!’ 이번 세미나에서 <생동하는 물질>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베넷이 말한 ‘지구를 가볍게 밟기 tread lightly on the earth’란 결론이 처음엔 조금 미흡하고 실망스러웠는데 이제 깊은 의미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동안 점점 오염되어가는 지구와 환경을 보며 느꼈던 무력감으로 인해 이제 남은 해결책은 인류 소멸뿐이라고 혼자 생각하곤 했습니다. 50억년의 지구 역사를 살펴보면 6번의 큰 기후 변화로 인한 지질학적 변화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생태계가 크게 바뀌었고, 항상 멸종하는 생물은 그 시대 지구의 가장 상위 포식자-예들 들자면 백악기 이후 공룡의 멸종-였습니다. 홀로세 또는 인류세로 명명되는 현세의 상황에서 최상위 포식자인 인류의 소멸은 그동안의 지구의 역사를 유추할 때 당연한 수순처럼 보입니다. 또 인간 개체의 누구도 생로병사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요.
저는 베넷의 제안처럼 가볍게 지구를 밟으려면 그 순리를 따라 저부터 인류 소멸 프로젝트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저의 인류 소멸 프로젝트는 히틀러나 타노스와 같은 인간 박멸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소멸시키기 위한 계획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그때가 되었을 때 세계에서 소멸하기 쉽도록 몸이 가벼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려면 우선 내 신체의 밀도나 질량이 가벼워질 필요가 있겠지요. 내가 먹는 것이 나의 몸을 구성하는 기본이니 우선 밀도와 질량이 가벼운 음식으로 신체를 변용하도록 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렇다고 다이어트 선언이나 채식 선언이 아닙니다. 여전히 필요하면 고기도 먹을 것이고 방사능에 오염되었을지 모를 생선도 먹겠지요. 다만 필요한만큼 조금씩만 먹으려고 합니다. 그동안 가리지 않고 너무 잘 먹었거든요... 이제라도 신체가 소멸되기 쉽도록 변용하여서 지구를 가볍게 밟으려는 행위를 조금씩 실천하려 합니다. 어쩌면 소로가 베리를 좋아한 이유도 자신이 쉽게 소멸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소멸은 죽음과 동시에 또 새로운 창조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아무튼 도시에 살건 시골에 살건 우리는 각자가 살고 있는 자연에서 자신의 신체에 맞게 ‘지구를 가볍게 밟기 tread lightly on the earth’를 나름의 방식으로 실천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가볍게 지구를 걸으면서 사유하면 방향을 못 찾고 몸 속에 가득 차서 공회전 하고 있는 기력氣力도 힘쓸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걷기’를 사랑합니다. 정신의 운동을 촉발하기 위한 ‘걷기’로건, 신체의 운동을 위한 ‘걷기’로건 무엇이든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둘은 속성이 다를 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운동이자 행위소이기에 중요한 것은 ‘걷기’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걷기 시작하면서 발생하는 운동과 정지를 통해 우리의 신체와 정신은 더 능동적으로 세계와 마주치고 감각하며 사유가 가능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소로의 <산책>에서 배운 ‘걷기’입니다.
이제 버섯을 찾으러 걸어갈 시간입니다. 1부까지 읽어보았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사유를 뒤흔드는 문장이 마구 나오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제게 와닿은 구절을 조금만 소개해 보자면...
“ 많은 사람이 외면하려 하는 망령은 세계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단순한 깨달음이다....
만약 우리가 전 지구적 혁명의 미래를 믿지 않는다면 (항상 그래왔듯이) 현재를 살아야만 한다.”
- 에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 24쪽
‘1945년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으로 파괴됐을 때, 폭탄 맞은 풍경 속에서 처음 등장한 생물이 송이버섯이었다고 합니다.’(같은 책) 핵폭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세계 끝의 버섯 이야기에 호기심이 마구 생겨납니다. 함께 읽어가며 즐겁게 4차 생기 세미나를 시작해보시죠.
다음주 10일(화)이 첫 세미나인데 제가 버섯으로 만든 맛있는 피자를 사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버섯피자로 말하자면 멀리 도시에까지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탄소를 뿜뿜하면서 용문까지 와서 먹고 가는 피자입니다! 첫 세미나를 맛있게 시작해 보아요~ 나름 이번 세미나의 공부를 정리한답시고 쓰다보니 거의 에세이만큼 중구남방 글이 길어졌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4차 세미나에서 뵙겠습니다.
* 추신 - 지난 세미나에서 살짝 삐지시며 우리와 같은 인간 존재이심을 보여주신 채운샘도 꼭 오셔서 맛있는 피자 드세요~^^* 아직도 4차 생기 세미나 신청을 고민한는 분들은 많이 늦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되면 정말 늦은 거니까 얼른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고 참여 댓글을 달아주세요! 맛있는 버섯피자와 정신의 산책이 되는 책과 세미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후후.
http://qmun.co.kr/class/?uid=6511&mod=document
ㅋㅋ랩 에세이는 *떡처럼 쓰고 튀시더니, 생기 셈나 후기에는 뼈와 영혼을 갈아넣으셨군욥!ㅋㅋㅋㅋ
몇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산책'의 의미를 '정신적 산책'까지로 확장시켜야 한다는 거지, '산책=정신적 산책'으로 의미화하게 되면 정신주의가 되어버리죠.
걷기에서 중요한 건, 어떤 차원의 걷기이든 '자기'안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어폰 빼고! 시선 내리깔지 말고! '건강'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미지의 소리와 모양과 냄새를 만나기.^^
연휴&방학이 길어서 그런가, 예습하는 (지금까지 신우샘에게서 볼 수 없었던, 아마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여유까지 보이시고... 역시, 노는 건 좋은 거네요. ㅎㅎㅎ
"공부를 하면서 저의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경향을 해체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는 않네요. 소로의 산책을 읽으며 그의 표현이 낭만적이라고 비판하였지만 그것은 저에 대한 투사이기도 했음을 느낍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신우샘의 후기, 풍성함이 추석 보너스만큼이나 차올랐군요!!
샘의 삶의 4분의 1에 소로가 묻어 있고, 그 소로가 또 다시 변형되고 있음을 잘 녹여내주셔서 따라가기가 아주 재미났습니다!!
탄소 뿜뿜하며 팔리는 버섯 피자가 궁금하기도 하고(역시 오염된 다양성?), 세미나 홍보도 이렇게 빠빵히 해주시고, 거기에 채운샘까지 다시 불러주시니, 시월의 화요일이 아주아주 기대되는군요 ㅎㅎ
지구를 가볍게 밟는 연습이 널리널리 감염-오염-감동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연휴에 엿가락처럼 늘어진 사유의 끈을 바투 잡으려는 의욕이 샘솟네요. 그간 초췌해진 모습으로 세미나에 오시던 날들의 배경이 좀더 밀도있게 연상이 됩니다. 학생 농활 지도 더하기 20평 남짓한 텃밭관리도 그 영향이 아닌가 ᆢ 하고 ㅎㅎ
첫시간은 버섯 피자가 부르니 저도 오프로 참석해보겠습니다~~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생기 ㅡ자서전을 읽은 느낌입니다.
이렇게 생생한 후기를 남기시다니... 평소와는 완전 달리 보이는 신우쌤~~ 내공이 크크랩에서보다 생기 세미나에서 더욱 가열차게 발휘되는 듯하네요..푸핫~~ 저는 생기 4 막날 세미나 끝나고 집에 가는데 우뚝 솟은 빌딩들이 아주 조금은 달리 느껴지더라구요.. 즐비하게 세워진 불켜진 키큰 나무들... 재질은 각각 다르더라도 어쨌건 모두가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진, 인공물이 아닌 자연물로요.. 어느것 하나도 인간이 그자체로 만들어낼 수 없는 물질이지요.. 무엇을 자연물이라 여기고 무엇을 인공물이라 여기는 지 다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푸르른 자연이라는 환상의 이미지을 조금씩 깨면서 내 주위를 다시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다르게 산책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전혀 없는 "학습된 무기력" "인간먼지라는 무력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다음 생기 세미나에서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물고 늘어져봐야겠습니다. 식탁위의 재료로만 봤던 송이버섯이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게 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