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유예할 수 없는 생태 문제들을 테크놀로지의 명암과 더불어 탐구하는 생-기 세미나 첫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시즌에는 “모두를 살리는 접속, 모두를 죽이는 접속”이라는 제목으로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를 읽는데요, 아주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삶에서 ‘디지털’을 빼고 나면 일상은 완전히 중지되고 말 정도로 인터넷과 스마트 기기는 우리 존재에 깊숙이 스며 있는데, 그것들이 남기는 생태적 부하는 한 번도 생각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신체에서 분리 불가능한 스마트폰과 스마트 기기들, 어디서든 로딩 없이 재생되며 쏟아지는 동영상들, 전자책과 게임과 지도와 배달 앱 등의 서비스들 등은 날로 빨라지고 정교해지고 편리해지지만, 그것들과 더불어 우리의 인지 방식 및 관계 방식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환경에 가해지는 부담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까요? 달라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스마트 기기와 배터리는 근 10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그들을 개발하고 제조하고 충전하기 위해 들어가는 전기는 세계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10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물과 광물과 화석연료도 엄청나고요. 물론 아직 그 기계들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매년 밀려드는 신제품의 파도에 밀려 아무런 ‘재활용’의 시도 없이 어디로 보내지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보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비약과 더불어 속도와 소비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 자체가 얼마나 달라졌는가였습니다. 매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버퍼링, 배송지연, 기다림, 화려하지 않음 등)을 못 참게 되어버리고 있는 걸까요?
생-기 세미나를 시작합니다
먼저 각자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되었는지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환경교육과 운동을 업으로 삼고 계신 선생님부터, 시골에서 그리고 각자의 가정과 일상에서 생태적인 삶을 고민하고 공부하며 각종 시도들을 도모하는 분들이 모였습니다!!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질의자 채운샘께서는 인트로 격의 모두발언(?)을 하셨습니다. 생-기 세미나를 기획한 문제의식이었는데, 같이 나눠보고 싶네요. 나이가 들면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생각들이 있답니다. 살아가는 동안,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뭐라도 보탬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해가 되지 않는 삶이어야 할 텐데. 이런 고민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생태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공부를 하시는 분들 그리고 지금 세대의 친구들은 누구라도 생태적 위기를 심각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많은 이들이 먹고 소비하는 것들에 대해 예민함을 가지고 있지요. 이는 이전 세대, 사회의 계급적·정치적 부조리와 싸우며 ‘인간적’ 변혁에 힘썼던 이들의 실천과는 또 다른 결의 실천들입니다. 그 모든 시도들을 존경하고 응원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기후위기를 둘러싼 다양한 실천들 사이에서 종종 두 유형의 마인드로 빠지고 맙니다.
첫째는, ‘게임 오버’의 감각으로, 내가 뭘 해도 그것은 미미하며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다소 체념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반응입니다. 나름의 죄책감은 갖지만 그 사실로 자신을 위안하며 하던 것을 하며 사는 모습이지요. 두 번째는 모든 건 자본주의 때문이고, 사태의 책임은 대기업에 있다며 실태를 고발하는 투쟁적 반응입니다. 제도와 권력의 시스템을 문제 삼으며 적극적인 변혁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탓하고 나면 할 게 없죠. 종착역은 다시 재활용과 에코백 사용 같은 익숙하디 익숙한 실천입니다. 가라앉거나 들뜨거나(다시 가라앉지만)하는 이런 두 생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벗어날 것인가. 이것이 채운샘의 고민이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따라 나오는 우리의 두 비전이 있습니다. 1) 우선 뭐라도 한다. 배운 것에 입각해 지금 여기서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하나를 고안해 일상을 다르게 꾸려가는 것이죠. 2) 그럼에도 계속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나간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어떤 영향력을 남겨가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게 될 것인지, 인간과 비인간, 문명과 자연에 대해 묻고 또 묻기. 그것은 물론 제자리에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생각의 틀을 벗어날 도구를 마련해야 하며, 그 중 하나가 바로 기술철학입니다.
기술철학이 뭐냐고요? 사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이제 공부해나가려는 참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분명 기술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기술들을 모른다고 해서 기술 바깥에 살진 않지요. 가령, ‘내 생각은 어디에 있지?’라고 질문해보면 간단합니다. 우리가 쓴 글들, 보낸 메시지들, 저장한 번호들, 다시 말해 내게 ‘앎’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대개 기기의 디스크 혹은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으니까요. 우리에게는 이제 검색능력도 하나의 지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챗GPT가 상용화되면 더 복잡해질 것입니다. 과연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나의 생각일까요? 이런 경계들을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분명 기술철학과 연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와 우리 실존의 경계들을 질문하는 이런 기술철학이 어떻게 생태문제와, 정확히는 생태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길과 직결될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술철학의 모든 질문들이 우리 자신을 묻는 일인 동시에 세계를 묻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분리가 없습니다. 시스템을 탓하며 분노하거나 체념하고 그것과는 별개인 듯한 작은 실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먹고 보고 듣고 소통하고 생각하는 모든 일상이 점점 더 밀접하게 네트워킹될수록, 그런 디지털 행위들이 남기는 생태발자국은 더욱 무거워지고 있고, 동시에 우리의 감수성도 점점 더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살다가는 싸워야 할 지점에서 멍때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테크놀로지와의 관계를 배우고 나누는 일은 우리의 조건을 묻는 작업이자 구체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입니다. 근본적 질문은 구체적 실천을 미약하지 않게 만들고, 반대로 실천들은 전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공허하지 않게 만듭니다. 생-기 세미나는 이런 고민들과 더불어 기획이 되었습니다.
기후세대, 리바운드 효과, 심리적 흡족감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를 반 읽고, 충격과 성찰에 휩싸인 저희는 이런저런 질문과 경험이 담긴 글들을 나누었습니다.
경덕샘께서는, 저자가 디지털 문화의 팽창을 우려하며 언급한 ‘기후세대’의 감각에 대해 살짝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기후 감수성과 디지털 친화성을 가진 이들을 특정 세대로 지목할 수 있는지, 혹시 저자가 먼저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죠. 이에 대해 여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실 디지털 기기의 소비나 활용의 적극성에는 연령적 구분이 잘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장년 분들도 엄청난 구매력과 관심으로 그 기여도가 크지요. 하지만 확실히 연령이 주는 차이도 있습니다. 스마트 기기 이외에 아날로그적 소통, 필기, 오락의 방식을 전혀 경험한 적이 없어서 그 ‘이전’을 모르는 세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디지털 문화가 아닌 것을 상상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텐데, 이는 자기 자신이 놓인 자리를 보는 일에 있어 많은 차이를 빚어낼 듯합니다. 또한 송이샘께서는 ‘기후세대’라는 명칭은 젊은이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자신들을 누릴 것을 다 누린 기성세대가 물려준 기후위기의 희생자이자 해결을 도맡은 이들로 여기며, 적대감과 책임감을 동시에 떠안으며 기후세대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이야기죠. 사실 그 이름을 어느 쪽에서 부여했는지는 무의미합니다. 분명한 것은 세대에 상관없이, 동시대를 사는 우리가, 어쩌면 지극히 불편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자연스러움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지 않고서는 위기 앞에서 비난과 냉소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안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재미난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한솔샘께서는 우리가 디지털 도구에 친숙해질수록, 점점 더 그 쾌적한 디지털 환경을 만들기 위해 끔찍하고 열악한 노동으로 내몰리는 이들에 대해 무감해진다는 점을 지적해주셨어요. 실제로 흥미롭고 자극적인 동시에 안전한 유튜브 알고리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매일 열몇 시간씩 포르노와 잔혹한 영상들을 걸러내는 노동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전 세계에서 번쩍이는 수억대의 스마트 기기들의 리튬배터리를 위해 콩고의 광부들은 노예노동에 내몰리고 마을 전체가 중금속중독에 시달리고 있고요. 디지털은 그것이 조장하는 이미지나 색깔과는 정반대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동샘께서는 지리산 지역에서 414기후정의파업에 참여한 청년들의 재기발랄함과 그들의 디지털 친화성을 대비시켜주셨는데요, 시골이라고 해서 디지털 기기 및 SNS 사용에 거리를 둘 거라는 기대는 틀린 것임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서는 트랜드와 최신 밈에 더 민감한 집착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어쩌면 뒤쳐진다는 감각일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시골 출신인 저로서는 매우 공감이 되기도 했구요.
그리고 ‘리바운드 효과’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론의 진중한 문구가 많이 인용되었는데요. “당신이 새로이 갖게 된 비건 취향, 로컬푸드 취향이 가져오는 환경 차원의 이득은 당신이 남기는 디지털 발자국의 폭발적인 증가와 그 디지털 거인이 발생시키게 될 리바운드 효과로 상쇄되어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24쪽) 리바운드 효과란 일종의 반동 효과로서, 특정한 행위로 얻은 유익함이 그 행위와 연관되어 이어진 다른 행위들이 낳는 유해함에 의해 무마되어 버리는 상황입니다. 대표적으로 미니멀리즘이 있습니다. 간소하게 살기 위해 모든 가재도구를 처분했지만, 그런 쾌적함과 윤리적 만족감이 스스로에게 다른 물건들(친환경이라 이름 붙은)의 소비를 정당화하고 촉진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봅니다. 환경 운동의 전선에서 일하는 분들의 박수 받을 만한 기여들은 어쩌면 그들의 온라인 기반 활동과 스마트 기기 구매 등으로 다시 무효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이것은 뼈아픈 지적입니다.
더 나아가 저희는 은동샘이 표현해주신 ‘윤리적으로 좀 더 낳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어쩌면 환경주의의 가장 큰 복병은 에코이미지가 제공하는 트랜디함, 멋스러움, 힙함과 같은 ‘심리적 흡족감’이 아닐까요! 텀블러를 사용하고 전기차를 타면서 리사이클링 제품을 사는 나, 조금 멋있는데? 이런 심리는 특히 잘사는 나라의 각개각층에 만연합니다. 이 에코-심취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르시시즘에 머무는 동안 우리가 용인하고 외면하고 정당화하는 문제들은 아주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더 회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 세상을 이미지로 보고 자신도 이미지로 만들며 질문하는 힘을 잃는다는 것. 이는 꽤나 큰 위험입니다.
책과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가령 베트남에서 날아온 ‘친환경 천연 수세미’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것이 자연분해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여기 오기까지 투입된 물질(MIPS)을 따질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었고요. 대체 클라우드의 심리는 무엇인지, 기업들은 왜 그렇게 백업과 동기화를 강조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나왔었습니다. 사실 성심껏 꼼꼼하게 채워진 책을 두고 해볼 수 있는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은데, 시간이 좀 부족했었죠. 인트로 소개도 있고 해서 저희의 첫 만남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책이 던져주는 질문들을 나눠보기로 했습니다. 뒤로 갈수록 더 흥미롭고 깊어진 문제들이 등장하니까요!
다음 시간(5.2)에는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를 끝까지 읽어옵니다.
그리고 과제가 있습니다.
1) 지금 나에게 있어서 디지털 테크놀로지 활용도는 어떠하며 그 임계점은 어느 정도로 설정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기.
2) 이런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착취-파괴적인 연결과 공생-공존적인 연결의 경계는 무엇일지 생각해보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림자는 무엇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을 구성할 수 있는 영역을 생각해보기.
‘
5월 2일 화요일 저녁 6시20분 줌에서 만나요!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는 여러모로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는 책이 틀림없습니다. 제가 아무 생각없이 '엄지척'을 누르기까지 이 디지털 기술 역사 맥락에 얽혀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 무관심과 무지했을 뿐 아니라, 그저 구매자와 소비자로 내돈내산 이러고 난 아무 책임없지... 나몰라라 하고 있었다는... 그게 가장 큰 충격이었죠. 디지털 세계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믿음이 마치 사이비 종교처럼 제 안에 있었던 것 같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교묘히 섞여 커넥티드 되는 세계 이면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정작 사람들과는 벽을 쌓고 지내고ㅠ 여튼 막 쫓기듯 암 생각없이 따라가고 있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에는 명암이 있고 그 명암이 발생하는 논리를 잘 파헤쳐 이해할 기회로 삼아, 생기 세미나 팀과 각자의 저항의 지점들을 발견하고 함께 고민을 나누며 길을 모색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뼈아프게 읽어 봅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