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가 진행될수록, 내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가 보이고 현실적인 감각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이는 단순히 감상적인 기분만은 아닌데요. 어떻게든 그동안 보지 못했던/볼 수 없었던 적나라한 이야기들과 충격적인 맥락들 마주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따라 나오는 느낌의 변형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달 디지털에 대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고, 이번에는 육식(성정치에 직결된)에 대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실천도 구성되기 시작하죠. 하여, 생-기 세미나의 그럴싸한 비전 하나를 정해봅니다. ‘이해에 기반한 감각 혁명’!
‘분리’의 폭력 : 지워지는 맥락과 덧붙는 맥락
저희는 캐럴 제이 애덤스의 <육식의 성정치>를 읽고 있습니다. 첫 만남 때는 1부 ‘고기의 가부장제 텍스트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고기를 먹는 행위가 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지, 특히 왜 여성을 향하는 폭력과 얽혀 있고 그것을 심화하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주장들이 이 1부에서 다뤄지고 있습니다. 제목부터가 생각을 강요합니다. ‘고기의 텍스트’는 ‘고기’라는 대상을 둘러싼 역사적, 문화적, 관습적, 언어적, 생물학적, 시장적 맥락인데요. 바로 그 맥락이 가부장적 폭력으로 구성되어 왔음을 저자는 보여줍니다. 즉 남성우월주의와 여성 억압, 동물 폭력이 얽혀왔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대체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요? 사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 연결성을 분명하게 짚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고기의 분배 방식에서의 남녀 간의 불균등, 남성을 고기의 소비자로 여성을 소비되는 고기로 간주하는 상징들, 고기가 해체되는 방식과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방식의 유사성에 관한 설명들은 깊이 와 닿았습니다. 하지만 ‘고기’를 경유해 여성과 동물을 향한 폭력이 어떻게 둘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는 궁금했습니다. 단지 비유나 유사성이 아니라면 두 폭력은 어떤 방식으로 중첩되어 있을까요?
조금 헤매긴 했지만, 채운샘이 던져주신 질문을 붙들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우선 현재 저희에게 ‘고기’라는 말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고기와 맺는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고기는 저희에게 ‘단백질 보충원’이자 ‘영양소’ 혹은 ‘맛있는 반찬’으로 여겨지며, 조금 더 넓게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외식의 필수 요소라는 점에서 ‘화목함’이나 ‘격식’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물론 저희들 중에는 체질적이거나 윤리적인 이유로 고기를 멀리하는 분들도 있었는데요, 그런 실천을 하는 이상 이 사회가 얼마나 고기중심적인지를 직면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식탁에서는 언제나 질문들에 답을 해야 하지요. 그런 경우, (서로의 윤리가 부딪히므로)서로 불편해지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못 먹어서’라고 답하는 게 가장 손쉽다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 책에도 나왔던 예시, ‘식물도 생명이지 않느냐’는 유치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할까요? 지완샘은 ‘탄소발자국이 더 적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만다고 하셨습니다. 상대의 질문은 토론을 원하기 보다는 상대를 이겨먹으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쉽지 않습니다. ‘왜 동물은 안 되고 식물은 되느냐’, ‘채식도 식물 살해’가 아니냐는 이 다소 바보 같은 질문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논리를 갖춰 답할 수 있을까요? 인영샘께서는, 남을 설득할 수는 없지만 식물을 조금 더 우리의 일부라고 느끼는 정서가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치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죠. 이에 대해서는 폭력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기’를 먹습니다. 그런데 ‘고기’란 무엇일까요? 고기에 대한 가장 흔한 표상은 식재료, 단백질원, 건강식입니다.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가요? 폭력을 사유해야 할 지점은 이 자연스러움이 만들어진 배경입니다.
고기는, 누가 뭐라 해도 ‘동물의 살점’입니다. 그것은 한때 살아있던 동물의 사체를 해체해 놓은 것입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는 동물의 생명을 (강제로) 끊어야 합니다. 물론 그 전에 키워야 하고 먹여야 하는데, 지금과 같은 물량과 가격으로 공급되기 위해서 그 축산 시스템은 극악할 정도로 처참해져야만 합니다. 한 덩어리의 살점은 그 모든 역사와 맥락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고기’로서 놓일 때에는 교묘한 방식으로 지워져 있습니다. 고기에는 털도, 뼈도, 피도, 냄새도 없습니다. 당연히 그 존재의 삶과 영혼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영양소, 질감, 맛으로 환원되어 버렸죠. 우리가 너무나 쉽게 구매하고 요리하고 포식할 수 있도록 말이죠. 폭력의 구조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고기’를 그 남자 또는 그 여자가 한때 살아 있는 동물이었다는 생각에서 분리시키는 것이자, ‘음매’ 또는 ‘꼬꼬댁’ 또는 ‘매애’ 같은 울음소리를 고기에서 분리시키는 것, 어떤 것what을 어떤 사람who으로 간주되는 존재(동물과 여성)에서 분리시키는 것”(29쪽)이 모든 폭력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맥락에서 분리된 것에는 은폐가 뒤따르고 제한 없는 소비와 남용을 부추기는 쾌락적 이미지가 덧붙기 때문입니다.
“고기의 현존이 ‘고기’를 만들기 위해 죽은 동물의 존재에서 분리되는 순간에 고기는 그것의 원래 지시 대상(동물)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움직이는 이미지가 되고, 그 이미지는 여성의 상태뿐 아니라 동물의 상태를 지시하는 데 자주 이용된다.”(캐럴 제이 애덤스, <육식의 성정치>, 10주년 기념판 서문 중, 29쪽)
모든 폭력이 파편화와 절단에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왜 육식이 전제하는 폭력이 여성이 겪는 것과 같은 문제인지가 조금 선명해집니다. 여성의 신체가 파편화되어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남성의 다리가 따로 묘사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죠. 하지만 여성의 다리는 하이힐이나 스타킹과 함께 동떨어져 그려집니다. 가슴, 엉덩이, 입술, 쇄골도 그렇죠. 잘려나간 그 부위들은 수치나 이미지로 환원되어 평가되고 소비됩니다. 그 존재가 누구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는 전부 소거되고, 마음껏 성적인 욕구를 투사할 대상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맥락이 지워지고 부위로 전락한 대상은, 돈으로 사고팔거나 함부로 손상시켜도 되는 물건으로 여겨집니다. 폭력을 당하는 여성이 겪는 운명은 동물이 고기가 되는 운명과 궤를 같이 합니다.
다시 채식주의의 초점으로 넘어가 봅시다. 문제는 동물과 식물의 목숨이 같으네 틀리네 하는 소모적인 비교가 아닙니다. 마트에 진열된 채소나 과일은 고기에 비하면 배후의 거대한 폭력 구조을 은폐하거나 철저한 ‘존재 지우기’를 통해 수치로 환원시키는 작업이 덜합니다. 물론 식물 역시 GMO로 길러지고, 파괴적 유통 구조를 포함하고, 맛과 영양소로만 환원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커피나 아보카토 같은 작물들은 역시 말 못할 수탈과 폭력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한때 생명이었고 한 개체였다는 사실이 ‘고기’에서처럼 철저하게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양육(생산이라고 불림) 도살과 절단의 과정이 절규로 얼룩져 있음에도, 그 모든 흔적을 억지로 지워내고 텅 비게 된 고기의 조직(텍스트)에는 마치 향신료와 소스가 뿌려지듯 수많은 자극적 이미지들이 찾아와 결합합니다. 남자의 원기를 보충하는 상징으로, 육식인을 유혹하는 향기와 질감으로, 나아가 소비되고 대상화된 여성의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왜 고기 광고에는 근육질의 남성과 섹시한 여성이 등장하는데 반해 야채 광고는 그렇지 않을까요?
고로, 채식의 실천은 죽은 걸 먹느냐 산 걸 먹느냐가 아닙니다. 관건은 눈앞에 음식이라고 놓인 사물을 휘감고 있는 구조적인 폭력을 사유할 수 있는가입니다. 바로 이 시야 속에서 채식이 논의되고 실천될 때 그것은 저항적이게 됩니다.
이 외에도 저희는 고기와 성을 둘러싼 우리 시대의 언어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은근한 비유, 완곡어법, 중의적 의미들은 끊임없이 대상의 존재적 맥락을 지워내고 소비적 맥락을 가져다 붙이고 있습니다. 저자는 ‘고기’라는 말 자체가 그렇다고 하지요. ‘고기’는 동물의 흔적을 지워냅니다. 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을 표현하는 말을 써야 합니다. 언어적 은폐와 속임수를 의도적으로 걷어낼 때만이 보이는 맥락이 있습니다. 동물 해방은 ‘고기’를 ‘죽은 동물’이라고 부르는, 언어 해방에서 시작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육식의 성정치> 2부 ‘제우스의 복부에서’(~273쪽)를 읽고, 인상 깊은 부분을 뽑아 자신의 질문과 이야기를 적어옵니다. 이번에는 19세기부터 이어져온 문학 텍스트를 중심으로 채식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비판들이 등장하고 있어서인지 더 흥미롭군요!
*과제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 고민해 봅니다.
"윤리적 채식이란 무엇일까? 왜 먹는 것을 윤리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가?"
그럼 화요일 저녁 6시 30분, 줌에서 만나요!
민호샘, 늦은 후기 꽉꽉 채워서 쓰느라 고생 많았어요~~ㅎㅎ
저는 후기 안 쓰고 도망? 돌아다니며 ㅋㅋ 댓글만 다는 나그네 처지라... 요래 초롱초롱한 눈으로 잘 읽었슴!!!~~ლ(╹◡╹ლ)
민호샘이 강조한 '이해에 기반한 감각 혁명'에 대해 물고를 저는 요렇게 내보았어요.
어느 곳에서도 자기 고향을 찾지 않는 성숙함을 넘어 모든 곳, 모든 것을 타향과 타자로 인식하는 것이 고귀해지는 것이라면, 자신과 세상을 어떤 시선 속에서 보아야 할까요?
자기 안위와 습속만 고수하는 게 아니라, 곳곳에 폭력과 고통이 보이지 않을까...
생-기 세미나에서는 그 '타자를 느끼는 방식의 변환'을 시도하고, 스스로 반추하고, 함께 길을 도모해 보고 있죠 o(* ̄▽ ̄*)ブ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하였었는데,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에서 주인공 델핀이 식사 자리에서 육식을 거부하고 토마토를 먹자, "채식도 식물을 죽이잖아?"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자 델핀은 "나는 그것들을 나 자신의 일부로 느껴" 라고 답하죠. 저는 채식 위주의 소박한 식단을 좋아하지만, 제가 먹는 것이 나의 일부라고 잘 느끼지 못해왔어요.
먹는 것과 저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죠.
제 신체의 일부, 즉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 슬픔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신체 차원부터 단호히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육식인들에게 '고기'라고 부르는 동물 시체를 자신의 일부로 느끼는지 묻는다면 어떨까... 육식을 건강의 표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 표상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닐까?
채식인들이 자주 듣는 말, '까다롭게 굴지 말고 그냥 먹어!' '아니, 그만 죽여, 이 살인마야!' 라고 책에 써 놓은 것을 보고... 흠칫≡(▔﹏▔)≡
단백질 필수아미노산 영양소로 환원해 명명해도, 폭력과 고통으로 점철된 죽음을 자기 일부로 느낀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요?
우리는 동물에게 실존을 허락하고 생명을 부여하여, 때문에 나중에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권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특권적 사고, 서양, 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중심, 가부장제, 독재, 파시즘, 폭력적 우월 사고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육식의 성정치'에 혁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그런 논리가 표면적으로는 육식을 정당화 해줄지라도, 그것이 묵인과 미화에 기반하여 도처의 폭력과 고통을 재생산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보고싶습니다.
육식-동물살해 문제를 마주하고, 타자를 체험하고 느끼는 방식, 즉 '이해에 기반한 감각 혁명'을 시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왜 고귀한 삶에 대한 글과 수업은 열심히 챙기면서, 그것을 실천하면서 훌륭해지려고는 안 하는가? 많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실천은 자기와의 투쟁이고, 자신의 영육을 돌보는 길이며, '훌륭한 사람, 진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이 되는 길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 무력감을 떨치고, 생-기 세미나 팀원들과 함께 열심히 실천해보자고요~~~파이팅~~(~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