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본격적으로, 우리의 현실적 ‘먹기’에 대해, 먹기를 둘러싼 ‘어려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채운샘이 던져주신 두 가지 질문을 두고 머리를 맞댔습니다. 1) 동물을 죽이는 것(육식)과 인간을 죽이는 것(전쟁)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2) 인간-백인-남성 중심 권력에 균열을 내는 글쓰기란 어떤 것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리적 채식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제우스의 복수에서 : 페미니즘-채식주의 텍스트들의 저항
<육식의 성정치> 2부의 제목은 ‘제우스의 복부에서’입니다. 왤까요? 제우스가 치근덕거린 끝에 메티스는 아이를 갖게 되는데요. 이 아이가 여자아이이며 또 아이를 가지면 아버지를 권좌에서 몰아낼 거라는 신탁을 듣고 메티스를 삼켜버립니다. 메티스의 지혜의 여신으로, 제우스의 뱃속에서 복수가 아니라 그를 돕기로 합니다. 메티스의 딸이 아테나입니다. 저자가 ‘제우스의 복부에서’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육식으로 점철된 가부장제 문화에 삼켜진 처지이지만 거기에서 지혜의 목소리를 내는 페미니즘-채식주의 저술들을 소개하기 위해서이지요. 물론 시대를 앞서간 이 여성들의 채식주의 텍스트들은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되거나 그 메시지가 간과되고 비하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와 단어들은 또 다른 작가들에게 반향을 일으켜 육식-가부장 지배 담론에 저항의 물음표를 던져왔습니다.
일찍이 18세기 초의 저술가 조지프 릿슨은 <도덕적 의무로서 육식을 금하는 것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는데, “인간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없애려”(203쪽)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인류가 원숭이나 오랑우탄 같은 초식 동물과 비슷하다고 지적하며 인간이 생존하는 데에는 고기 필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엄청나게 급진적이었죠?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비판과 조롱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로 그 책을 판단한 기준이 채식주의의 말들을 해체하는 고기의 텍스트들이기 때문”(210쪽)입니다.
19~20세기에 등장한 여성-채식주의 작가들의 소설들은 더 세련된 방식의 저항을 이어갑니다. 캐럴 제이 애덤스는 이들 사이에 공명하는 문학 관행을 ‘채식주의 단어 낳기’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앞선 저술가들의 어휘와 표현들을 그대로 따오고, 역사 속 채식주의 인물을 오마주하고, 죽은 동물들의 맥락이 지워지지 않게 하고, 무엇보다도 “개인들이 채식주의 관련 텍스들을 읽은 일이 계기가 돼 육식을 중단한다고 말”(212쪽)하는 대목을 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채식주의 관련 텍스트에 새겨진 채식주의자의 서명은 고기의 텍스트에 자기 이름을 새겨넣는 육식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다. 그런 노력은 자기의 말이 살이 되게 하려는 시도이며, 고기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려는 시도다.”(216쪽)
동물은 고기가 되었고, 그 고기의 텍스트(실제 고기 조직이자 고기를 둘러싼 맥락)에 온갖 양념들, 환상들, 영양 담론들이 뿌려집니다. 채식주의 텍스트들은 그들의 말이 살이 되도록, 지배 담론의 조리법을 중단시키고 거기서 고기를 꺼내어 살과 영혼을 부여하려는 언어적 시도입니다. 대표적인 시도들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괴물’ 프랑켄슈타인은 채식주의자입니다!), 이사벨 콜케이트의 <사냥 대회>(1982), 마거릿 드레블의 <빙하기>(1977), 메리 미글리의 <동물들, 왜 중요한가>(1984) 등이 있습니다. 거의 번역되지 않았는데,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현실의 식탁과 윤리의 문제
우리가 이렇게 급진적인 텍스트들을 읽고 고기의 맥락에서 새로운 이해나 감각을 훈련한다고 해도, 우리 앞에 놓은 것은 ‘현실의 식탁’입니다. 가족들 모두가 육식을 즐기기에 고기를 요리해야 하는 상황, 혼자 혼밥을 하는데 편리하고 값싼 음식은 모두 육식인 상황, 보다 내부적으로는 수많은 광고와 컨텐츠 문화와 더불어 고기 맛이 계속 땡기는 상황. 이런 부조화와 딜레마 속에 있는 것의 우리 먹기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중립적 평균인이 아닙니다. 채식을 실천해야 하는 자리는 우툴두툴한 관계들, 시선들, 물음들이 가득한 까다로운 식탁이지요.
저희가 함께 고민했던 문제는, 자신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가족들을 위해 육식 식단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몸은 거부하는데, 손으로는 고기를 씻고 반찬을 만들고 있을 때 마주해야 하는 모순과 이중성. 여기서 실천은 무엇일 수 있을까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 결국 표현하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갈등을 만들고 논쟁에 들어서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공감할 수 있고 공명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고기를 요리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아프게 느끼는 사람에게 억지로 요리를 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음식 준비를 맡은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면, 육식을 즐기는 가족들은 다른 생각과 행동을 시작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해 먹든, 밖에서만 먹든, 아니면 자신의 먹기를 의문에 붙이기 시작하든. 문제는 자신의 몸의 반응에 충분히 주목하고, 그 감수성으로부터 관계를 조금씩 바꿔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
저희는 ‘윤리적 채식’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윤리적’이라는 게 뭘까요? 그리고 채식은 왜 ‘윤리적 채식’이어야 할까요? ‘윤리’를 둘러싼 고민이 이어집니다. 동물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채식을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보입니다. 과일의 생산에 사용되는 살충제는 엄청난 수의 새와 곤충을 죽이고, 커피와 아보카토 농장을 위해 어마어마한 숲이 베어져 나갔죠.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채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윤리적 순결성을 보장해주지 않죠. 우리는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채식이 ‘윤리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채식을 취향에 국한시켜서는 안 될까요?
누군가 “왜 고기를 먹지 않아?”라고 물을 때, 가장 쉬운 것은 ‘못 먹어서’ 혹은 ‘싫어해서’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답은 비록 다툼과 번거로움은 피하게 해주겠지만 분리를 낳을 수 있게 합니다. 마치 먹는 행위가 사적인 음식취향의 문제이며 비정치적인 것처럼 말이죠. 은근한 무시와 외면을 낳기도 하고요. 하지만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우리의 먹는 행위가 수많은 존재들과 연관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채식의 이유는 모든 것의 연결성(글로벌화)이 더 촘촘해지는 시대에 더 나은 삶을 함께 살기 위한 노력입니다. 우리는 먹음으로써 사는데, 우리를 살게 하는 행위가 가공할 폭력의 구조를 증식시키는 것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런 바람을 갖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채식인 것이죠. 그런데 이때의 ‘폭력’이란 무엇일까요? 육식과 직결된 그 폭력의 맥락을 얼마나 직시하고 기억할 수 있는가, 그것을 자기 자신과 상대에게 납득 가능한 언어로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가 핵심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느낌을 바꿀 맥락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왜 채식을 하는가? 근대식 축산/도살 시스템에 반대하기 위해서. 다른 종들이 절규와 분노 속에서 살다가길 원치 않아서. 가부장제의 폭력에 반대하기 위해서. 생태 위기의 가속화에 반대하기 위해서. 이렇게 채식을 둘러싼 맥락들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어디까지나 함께 잘 사는 길을 위한 ‘윤리적 채식’을 시도하기 위해서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변형을 쓰기
지배구조와 맞서는 일에 있어서, 저항에 있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글쓰기는 어떨 때 저항이 될 수 있을까요? <육식의 성정치> 2부는 확실히 글쓰기-실천에 대한 글쓰기입니다. 채식주의 여성 작가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문학이라는 전략으로 표현합니다. 그들 자신이 그들의 시대, 그들의 국가, 그들의 환경에서 겪은 것들을 서사와 픽션적 요소를 더해 출판한 것입니다. 그리고 캐럴 제이 애덤스는 그들의 작업을 성정치적 저항성을 다시 부각하고 강조하지요. 이 역시 연구자로서의 캐럴이 할 수 있는 방식의 글쓰기 실천입니다. 저는 이 작업이, ‘글로벌 노스’의 환경주의 작가들에 대해 쓴 롭 닉슨의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와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사자성을 가진 작가들은 자신의 피부에 와닿는 문제들에 대해서 쓰고, 학자나 연구자들은 그 작품들에 공명해 그것들을 해석하고 들리는 언어로 재번역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자연히 질문이 듭니다. 폭력의 피해자도 아니고, 폭력의 현장에 가 있지도 않은 우리는, 우리의 글쓰기 실천은 무엇일 수 있을까? 아니 여러 실천중 글쓰기는 어떤 힘이 있을까?
우선 글은 말보다 신중하고 오래갑니다. 조직적 운동보다는 덜 강렬하지만 전염력이 더 강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글이 더 전염력이 있을까요? 우리는 당사자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마추어의 글이라고 = 해도 누군가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논리적 일침이나 신랄한 비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어떻게 타자를 만나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 자기도 모르는 존재가 되어가는가 하는 과정이 드러나는 글은 읽는 사람들을 움직입니다(일례로(광고!!) 경덕샘께서 ‘문탁 인문약방’에 연재중인 <돼지를 만나러 갑니다> 같은 글이요!) 결국 이런 것 아닐까요. 인간-백인-남성의 지배구조에 균열을 내는 글쓰기란, 자기 안에 있는 지배적 코드가 균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것이요.
이번 시간에는 육식이라는 주제로 저희 각자의 이야기들을 꺼내고 섞어보고 머리를 맞대보았습니다. 어떻게 먹을 것인가, 제 안에도 새로운 맥락들과 정서들이 꿈틀꿈틀 생겨나고 있는데요. 우리가 함께 사는 존재임을 기억하며 공부도 실천도 함께 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육식의 성정치>를 끝까지 읽고 질문거리를 준비해옵니다!
6월 6일 화요일 저녁 6시30분 줌에서 만나요!
느낌을 바꿀 맥락을 모은다는 말이 와닿네요. 반사적으로 선언하기보단 자신의 변화를 살피고 자신을 점검하는 실천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저도 느낌을 바꿀 맥락을 모은다는 말을 계속 곱씹었네요. 과정을 겪어내고 살피고 보듬는 일 그 속에서 윤리도 만들어 질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