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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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ლ(╹◡╹ლ)‘ 생-기 세미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규문에는 공식적인 동아리가 있는데요, 개그&산악 동아리 ‘공산당’, 크크랩 영화 동아리 ‘채씨네’. 그 뒤를 잇는 생태문제고민상담 동아리 ‘생기당’을 발족하고 싶은 사심으로 쓰는, 생-기 세미나2-[육식의 성정치] 두 번째 시간 후기입니다. 작정하고 생-기 세미나와 친구들 소개로 쓰는 것이라, 세미나에서 읽고 있는 텍스트의 주요 쟁점은 반장 민호샘의 꼼꼼한 후기와 공지글에 성실하게 담겨 있으니, 꼭 마음~으로 일독해 주세요!
이 세미나는 100% 온라인 진행으로, 이번이 네 번째 만남이였죠. 같은 시간에 집, 사무실, 카페에서 접속하여 옹기종기 모였지만, 화면에 비친 서로의 모습은 어른거리고 목소리는 기계를 거쳐 우리가 어디에 함께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거리를 느낄 수밖에 없는데, 이번 시간에 서로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죠. 우선 생-기 세미나에서 읽고 있는 각각의 텍스트가 던진 문제 의식에 깊은 공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 우연히도 채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해 ‘인간-나중심에서 벗어나 보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해한다는 것과 느낌의 차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그 감정의 변화를 추적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자 캐럴 제이 애덤스로부터 1970년대의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만들어낸 문구,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전달받았을 때, 그 말이 바로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사안의 분리가 너무나 익숙하고, 그런 전제에서는 문제 해결도 각각의 책임과 윤리가 따로 요구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제도권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주어진 보편적 가치를 의심없이 살기 때문에, 개인에게는 도덕적 순결주의, 정치에는 공리적 올바름과 같은 이상적 가치 감정을 투사하지만, 실제 삶에서 직면하는 것은 하나의 인과로 이해될 수 없는 수많은 부조리한 현상입니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하나... 걱정을 하면서도 거기에 나의 책임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나는 개인이니까 정치적인 책임은 없다는 말로 비겁하게 숨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에 담긴 함의를 이해해 보는 과정에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행위하는 주체가 되어 보는 것, 바로 그것이 그 '말이 살이 되게 하는 과정'이라고 캐럴 제이 애덤스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알고 있는 좁은 의미의 정치 개념을 폐기하기 위해, 질문이자 상상을 해봅니다. ‘나와 너’라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정치는 시작된다고, 그래서 무인도에 혼자 살면 정치는 필요없다고. 하지만 그 너라는 ‘타자’를 확장시켜 본다면 어떨까? 만약 제가 무인도에 떨어졌고, 그 시공간의 토대에서 당장 살아가기 위해 매순간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곳에 살기를 선택했다면 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제 섬의 모든 것들은 관찰, 이해, 실험을 바탕으로 생명으로서 나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통제와 억압과 착취의 대상물로 내 소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자연에 감응하는 자가 될 수도 폭압적 독재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제게 주어진 상황 조건들과 맺는 관계가 저라는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지, 저라는 고정된 존재가 원래부터 주어진 게 아니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됩니다. 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낯선 존재 즉, 스스로 타자로 섬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떠나기로 했다면 뗏목을 만들 자연물들의 협력과 하늘의 은총도 구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한순간 모든 것을 저주로 여겨 자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다른 공존의 용법과 효과로 존재한다면, 우리 삶에서 각자의 결단과 이행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또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 타자와의 상호 영향이라는, 삶의 필연성 앞에서 어떤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윤리도 구성되는 것이죠. 윤리가 구성된다는 의미는 상황 조건이 우선적이며 그래서 선험적으로 정해있지 않다, 일명 ‘노답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먹는지, 그것을 무엇이라 명명하고 또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다뤄져 내 식탁에 왔는지, 이런 아주 구체적인 질문을 하지 않으면 미디어 광고나 다수 사람들이 좋다는 것에 휩쓸려 그것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무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서 배움을 청하고, 개인적 일상에서 매우 구체적인 사안들로부터 질문하여, 타자를 통해 자기에 이르는 길을 가고자 합니다. 여기서 타자를 통한다는 것은, 타자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나와 우리의 문제로 끌어올리고 함께 품는다는 의미에서, 타자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하는 차원을 의미합니다.
세계는 언제나 인간 중심적 규정과 인식의 범주를 흘러 넘치죠. 악덕과 미덕,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것으로서 흘러 넘치는, 이 변화하는 세계 만물 안에서 우리는 마음을 가진 존재들로, 흔들리고 도망가고 서로 붙들고 울고 웃고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면서 어떻게든 함께 살아야 합니다. 제가 배운 바와 같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모든 것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것인가 고민해 보는 것이 정치라고 한다면, 생-기 세미나에서는 ‘우정의 정치학’을 실천해 보려고 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정은 인맥도, 친목도, 동질감도 아닙니다. 그동안 ‘잘 몰라서~~, 알면 피곤하니까,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라는 이유로 못듣고 있던 타자들의 고통과 은폐된 착취 구조를 마주하는 법,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는 법을 공유하는 ‘우정’입니다. 이 ‘우정의 정치화’가 캐럴 제이 애덤스가 [육식의 성정치]를 통해 말하는 페미니즘 활동의 근원적 힘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우정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심 지배는 단절과 분열의 문화 속에서 잘 기능하지만, 페미니즘은 연결을 인식한다” 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다시 말해 단절과 분열의 문화가 중심 지배를 요청하고, 연결을 인식하는 자들의 연대가 페미니즘을 요청한 것! 그렇다면 페미니즘 활동이 필연적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여성적인 것의 상징은 대지이고, 대지에는 중심도 주인도 없고 대지 안팎의 모든 걸 길러내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죽음에 기대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생명의 차원에서 우리가 대지를 통해 연결돼 있다는 인식은, 인간 살해(전쟁)와 동물 살해(육식)를 연결하여 질문합니다. 이것은 타자가 겪는 고통에 대한 인식이고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서 채식(전쟁과 육식 반대)이 연결되고, 이 연결은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계속 질문하게 합니다. 미디어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것과 암컷 동물을 착취하여 얻는 것을 유제품으로 분류하고 건강 식품으로 소비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 연결은 인간중심적 지배 논리가 통하지 않는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느끼는 감각의 문제와 연결되는데, 전시된 폭력을 무감각하게 소비하고 그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차원을 넘어서, 다른 방식으로 생명과 맺는 관계론적 전환이 정치적 실천이 되려면, 우리에게 정말 시급한 사안들이 무엇인지 질문이 필요합니다. “윤리적 채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생-기 세미나 친구들이 전해 준 이야기를 서로 연결 지으면서 생각해 봅시다.
(지완) 사실 사람과 관련된 쪽으론 크게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따로 소속된 집단도 없어서 억지로 식사를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 별로 없거든요. 제 페스코 식단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랑 만날 수 있는 선택권도 많은 편이고요. 그래서 문제가 있다면 스스로의 게으름인 것 같아요. 매 끼니 밥을 해 먹는데, 너무 게을러서 채식이라는 단어가 주는 건강한 뉘앙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저 육식이 아닌 정크 푸드로 해결할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스스로 느끼는 약간의 괴리감이 문제라면 문제 같아요.
- 자기 아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말해준 지완샘의 고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점을 발견했는데요, 우리는 보통 문제의 원인을 외부 조건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스스로의 일상에서 규율과 규칙이 함께 작동되지 않으면, 외부 조건이 다 갖춰져도 자신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분리되는 괴리감을 겪게 된다는 점을 지완샘이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상황 조건이 전혀 다른, 엄마와 아내라는 입장의 보은샘의 고민은 우리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볼까요?
(보은) 부끄럽게도 나의 식탁에는 여전히 ‘동물의 살점’이 음식으로 오른다. ‘잡식이 인간의 본성이다. 본성을 거스르려하지 마라’, ‘아이들 키 크게 하려면 고기를 먹여한다’, ‘고기를 먹어야 살도 붙고 힘도 생긴다’는 가족과 지인들의 말에 또 상차림에 대한 부담을 덜고 싶은 이기심에 여전히 지고 있다. 정작 음식을 준비하는 본인은 잘 먹지 않으면서.. 어쩌면 그들의 말에 수긍하는 것이 평화라고,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현실이 이렇기에, ‘윤리적 채식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라는 과제도 사실 많이 부딪힌다. 책에서 남성지배, 전쟁, 육식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어떻게 해야할까’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먹고,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나를 구성하는 것임을 알기에 내 몸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모순과 이중성이 아프다. 이 아픔이 무력하지는 않다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윤리라고 생각한다
- 울 보은샘이 울보였다는… 보은샘은 자신이 겪고 있는 모순을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간 식당에 ‘감탄이’라는 미니 피그가 살고 있었고, 감탄이가 손님들과 돼지 살점들이 지글지글 타고 있는 식탁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봤을 때 너무나 충격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맛있게 먹고 있는 그 장면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떠올랐다는. 우리는 상황이 보은 샘을 부조리로 몰아가는 것이지, 보은샘 자체가 이중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고, 보은샘이 아프다고 한 지점이 생명이 겪는 아픔에 감응하는 아픔이라는 것에 공감하고, 또 스스로 무력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에 모두 ‘만세’\( ̄︶ ̄*\))를 외쳤던 것 같은데요…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만날 날, ‘우리가 살고 있는 대지를 위해 채식파티(?)’하는 그날을 기약했기 때문입니다. 3년전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귀농을 하신 은동샘이 초대를 허락해 주셔서 우리의 눈물이 웃음으로 연결되었던 순간이 떠오르는데요, 이제 은동샘의 따뜻한 조언을 귀담아보죠.
(은동) ‘뭐 먹지?’는 살면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아닐까? 질문에 대해 답을 내는 순간들은 하루에 최소 한번은 있기 마련이고 그 과정은 대부분 습관이나 관행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완성된 요리에 들어있는 식재료가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는지, 그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며,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채식하는 삶으로 방향을 튼 후부터, 식재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고 꼼꼼이 따지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과 음식점을 갈 때마다 생각이 많아지고 조금 긴장하게 되는데, 가령 가장 무난하게 선택하는 된장찌개에도 가끔은 고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복잡한 상황을 몇 번 겪은 후부터는 조금 유연해지기로 했다. 가령 내가 달걀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밖에 나가서 먹게 되는 김밥에 달걀이 들어있으면 굳이 빼내지 않고 그냥 먹는다. 빼낸 것은 음식물 쓰레기가 되므로. 반면 내가 주도권을 갖고 음식을 주문할 때는, ‘뭐뭐’는 빼달라고 적극적으로 말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의 죽음이 필요하다. 다른 생명체들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얽혀있다. 그게 불가피한 전제라면,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즐겁게 먹자!”라는 말에 무기력하게 수긍하기보다는, 주춤하는 순간을 만들겠다. 그 순간, 분명 호기심 가득한 질문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 질문들은 다정한 행동들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새벽이(경덕이 돌보는 생츄어리 돼지의 이름)의 안부를 계속해서 궁금해할 것이다.
- 은동샘이 말씀하시는 그 ‘주춤하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며,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심의 힘은 생명을 막연한 보호의 차원이 아닌, 이해의 차원에서 관계 맺기를 촉구해 보는 시도들이 다양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졌을 때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그 시도 중에 하나, 돼지 새벽이의 이야기를 은동샘이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민호샘이 링크를 공유해줘 경덕샘의 문탁 연재글도 읽게 됐고, 새벽이생츄어리가 뭔지 첨 알았고, 또 경덕샘 이야기 덕분에 우리는 새벽이라는 정말 낯선 존재와 연결됩니다.
(경덕) 작년 7월부터 새벽이와 만나고 있다. 새벽이는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로 지금은 새벽이생추어리에 살고 있다. 나는 새벽이를 돌보는 자원활동가(보듬이)로 지원해서 보듬이로 활동중이다.
새벽이를 만나기 전에도 책과 sns를 통해 새벽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이의 존재가 '앎'의 차원을 넘어 '감각적 사건'으로 깊이 각인된 순간은 새벽이를 직접 만나 새벽이 냄새를 맡았을 때였다. 새벽이를 처음 만진 날을 기억한다. 새벽이가 울타리 가까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손을 뻗어 새벽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거친 털의 감촉이 느껴졌고 새벽이 피부와 내 손 사이에 무언가 오고 갔다. 새벽이 냄새가 내 손에 배었고 처음으로 살아 있는 돼지의 냄새를 맡았다. 익숙한 냄새(고기 냄새)와 낯선 냄새(새벽이 냄새)가 동시에 감각되어 혼란스러웠다.
새벽이 냄새는 그저 냄새로만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기억들을 불러왔다. 내 앞에서 걷고 뛰고, 내가 준 밥과 물을 먹고, 내 앞에서 오줌과 똥을 누는, 명백하게 살아 있는 새벽이 냄새는 정육 코너에서, 식당에서, 냉장고에서, 프라이팬 위에서, 주방에서 풍겨오던 냄새와 만나 극단적인 부조화를 이루었다. 냄새의 부조화는 내 안에서 즉시 해소되어 새로운 의미로 통합되는 대신, 조화되지 않은 채로 머물며 과거에 있었던 일을 환기하고 미래의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
언젠가부터 채식을 지향하고 있다. 책과 영화를 통해 공장식 축산 시스템이 가축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았다. 전염병이 돌 때마다 가축 동물들의 끔찍한 살처분 소식을 들었다. 동물과 관련된 압도적인 기호들과의 우연적이고 반복적인 만남은 '인간적이지 않은 영역'의 사유를 요청했고, 언어 바깥의 '비인간' 세계에 대한 관심을 키우다가 새벽이생추어리에 불시착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돼지, 새벽이와 조우했다. 부재 지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새벽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명의 돼지를 만나며 내 몸은 윤리적인 저항과 딜레마를 오가고 있다.
- 저는 경덕샘의 글을 읽고 살짝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머릿속 관념인 생명 일반과 살아가는 게 아니고, 아주 구체적인 대상과 그것에 뗄 수 없는 기억과 감정이 투입됐을 때, 자신과 같은 생명이 비로소 몸으로 감각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살아 있는 돼지를 본 적도 없는 제가 생명을 관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묻게 되었죠. 경덕샘의 보듬 활동 기록은 우리와 다르게 생기고 다른 언어를 가졌지만, 동등한 생명을 가진 존재를 어떻게든 이해보려 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데요, 그 부분이 감동적인 이유는 우리가 배워야 할 우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벽이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면서 우리와 다르게 생기고 다른 언어를 가진 타자들과 관계 맺기를 확장시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우정의 실천이지 않을까. 그런 노력과 자기 변혁 없는 공부의 그 헛헛함이 갑자기 두려워지는데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하고 있는 것’ 가운데 기쁨을 만들고 수 있을 겁니다. 이해를 기반한 이 우정을 믿고, 그것이 무엇인지 계속 질문하고 배워 나가 봅시다!
아자!! (〃 ̄︶ ̄)人( ̄︶ ̄〃)
(*생-기 세미나는 생태 문제를 우정으로 만들어갈 여러분의 연결을 기다립니다.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기를 이어갈 친구들,
생-기 세미나3에서 만나요~~ 많이 신청해 주세요!o(* ̄▽ ̄*)ブ)
우왕... 생-기 세미나를 이렇게 아름답게 정리&홍보해주시다니... 감격스럽습니다!
윤리가 '노답상태'로부터 구성될 수 있고 구성되어야만 하는 무엇이라는 설명, 정치란 현재 주변에 닿아 있는 모든 것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라는 통찰 깊이 와닿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영샘은 가장 후끈하게 우정의 윤리를 구성하고 우정의 정치를 실현하고 계신 것 같군요!
보은샘의 '감탄이' 이야기는 말을 멎게 만드네요...
뿜뿜하는 애정에 멤버들이 든든해질듯 합니다~~!(후기 안 부탁드렸으면 어쩔 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하고 있는 것’ 가운데 기쁨을 만들고 수 있을 겁니다. 이해를 기반한 이 우정을 믿고, 그것이 무엇인지 계속 질문하고 배워 나가 봅시다!”<—이 부분이 특별히 좋아서 두 번 더 읽었습니다.
인영 샘 글 덕택에 상투적이라고만 생각했던 ’우정’이란 말이 새롭게 다가와요. 왠지 그 ‘우정’의 느낌은 호두알처럼 단단하고 매끈할 것 같아요. 오도독오도독
정성스러운 후기, 감사합니다.
건강 때문에 육식을 멀리하긴 했지만 다른 감각을 갖는 건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책을 읽고, 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은동샘의 ‘주춤하는 순간에서 오는 호기심 가득한 질문과 다정한 행동’이란 말이 따뜻하게 느껴져요. 배움을 톻해 연결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고, 가능한 실천을 하나씩 만들어 가봐요~~ 인영샘의 밝은 기운이 그대로 전해지는 애정 뿜뿜~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