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가 많이 늦었습니다!! “먹기의 윤리 : <육식의 성정치>읽기” 세 번째 시간이 있던 6월 6일은 현충일이기도 했지만, ‘육육(肉肉)데이’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링크). 일명 ‘고기의 날’로 전국 마트들에서는 대규모 고기 할인 행사가 벌어진다고 합니다. 웃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당황스럽긴 했지만 읽고 배운 것들로 세미나를 하기엔 더없이 적절한 날이었습니다.
채운샘께서 던져주신 질문은 세 가지였습니다. 1) 의미화되기 이전의 신체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점에 기반해서 ‘채식주의 신체’가 갖는 의미와 효과란 무엇일까? 2) 소비주의는 육식문화랑 어떻게 연결되고 있으며, 채식주의는 소비문화의 어떤 식의 비판이 될 수 있을까? 3) 채식주의가 남성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한 대안 내지는 대항이 될 수 있을까?
저희는 각자의 독서와 경험을 동원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덧붙여 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부터 만만치 않았죠^^. 그래도 생각하고 막히고 듣고 공감하는 시간이었고 새롭게 배둔 것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 흔적을 남겨봅니다!
채식주의 신체 : 표준-권력과 싸우는 몸의 수련
많은 자료를 수집한 결과 나는 인간이 생리상 채식에 적합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 나는 은유적으로 ‘채식주의 신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개념은 여성 억압과 동물 억압에 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주장들을 환기하면서 현재 진행되는 과학 연구가 밝히는 채식의 질병 예방 효과를 실체적으로 표현한다. ‘채식주의 신체’라는 개념은 육식 습관을 포기하고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41쪽)
캐럴 제이 애덤스는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을 넘어 ‘채식주의 신체’라는 개념을 정의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신체를 의미화하기 위한 일종의 규정이자 선언입니다. 우리의 신체가 생리적으로 채식에 적합하다는 주장이고, 가부장적 폭력과 연관된 육식의 습관(“분명히 지적하지만 육식은 습관이다.”(37쪽))을 멈추고 채식주의자가 되자 제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인간의 신체는 육식도 해왔고 채식도 해왔습니다. 신체 취향도 모르고 ‘~주의’도 모른다. 하지만 애덤스는 우리 ‘신체에 매개된 지식’을 탐구해가면서, 인간을 육식(잡식) 동물로 규정하는 지배문화에 의문을 던집니다. 해부학적으로 인간의 치아, 타액, 위산, 장의 길이 등은 초식동물과 닮았고, 의학적으로는 몸은 육식과 더불어 암, 당뇨, 심장 질환, 고혈압에 취약해집니다. 인류학 분야의 발견에 따르면 원인(原人)들의 뼈, 치아, 자취, 도구가 채식에 적합했습니다. “우리는 인체에 관련된 많은 책들을 접하면서 우리의 몸이 말하고 있는 단어가 채식주의라는 결론을 내린다.”(287쪽)
이렇게 품을 들여 신체를 채식주의 신체로 규정하고 전유하는 일은 어떤 힘이 있을까요? 그것은 그냥(체질상) 고기를 먹지 않는 것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채식주의자’인 것과 ‘채식주의 신체’가 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 논의는 저희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왜 윤리적 채식주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맥이 닿습니다(“이 책의 주된 관심사는 윤리적 채식주의다”(52쪽)).
저희는, 좀 도식적이지만 이런 예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 어려서부터 고기를 안 먹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입에 맞지 않아서이지요. 그렇기에 자연히 다른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육식 습관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종의 체질이라고 생각이 되니까요. 편의상 채식인이라고 해봅시다. 다른 한쪽에는 나름의 이유(생태적, 동물윤리적, 종교적, 혹은 트랜드)로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식사 때마다 육식중심의 문화에(혹은 자신의 욕망에) 부딪히고 그의 식탁은 때때로 투쟁의 장이 되곤 합니다. 편의상 채식주의자라고 해보겠습니다. 전자의 채식이 감각적이고 개인적인 내적 반응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후자의 채식은 보다 먼 곳, 사회적이고 의식적인 영역에서부터 구성된 도덕입니다. 네, 물론 현실은 훨씬 복잡하겠지만 계속 가보겠습니다. ‘채식주의 신체’는 이 둘과는 조금씩 다릅니다. 채식주의 신체는 신체적인 앎과 감각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채식주의자보다 덜 금욕적이고,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채식인보다 더 윤리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접근의 가장 큰 차이는 신체를 본질주의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동시에 신체를 기존의 지배 담론과는 다르게 규정하고 의미화하려는 시도를 동반한다는 것이죠. 채식주의자의 주장들은 ‘우린 채식동물이어서 채식을 해야 해’ 아니면 ‘우린 육식(잡식)동물이지만 채식을 해야 해’라는 생각을 전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채식주의 신체를 말할 때 우리는, ‘원래 인간은 채식/육식 동물이야’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채운샘은, 신체 혹은 물질은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물의 신체와 인간의 신체, 여성의 신체와 남성의 신체, 채식인의 신체와 육식인의 신체... 본질주의자라면 이것들이 ‘원래 다르다’라고 하겠지만, 신체는 ‘원래’를 모릅니다. 경계를 그어내려는 담론적 인지적 실천들 없이 어떤 신체는 따로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건강한 신체는 무엇일까요? 시대마다 문화마다 건강은 통일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건강을 규정하고 의미화하는 지식적 권력적 실천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시대는 의료 권력과 미용 및 헬스 산업이 제공하는 각종 정상수치와 이미지들이 건강의 기준들을 만들고 있죠. 정상/비정상, 아름다움/추함, 유능/무능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로, 신체가 아니라 신체를 만드는 표준화와 의미화의 투쟁이 있을 뿐입니다. 채식주의 신체는 부여되는 표준들과 싸우며 수련하는 몸입니다. 먹는 행위, 먹어야 하는 실존을 두고 훈련을 감행하는 몸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멋있게, 살리는 방식으로 먹을 수 있을까를 물으며 섭취를 특정한 방식으로 의미화하는 것이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매번 자신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일이고 세계를 만드는 수련입니다.
결국 우리 앞에는 이런 질문이 놓인다. 우주, 권력, 동물, 자기의 이미지를 우리가 먹는 음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355쪽)
우리는 먹는 존재입니다. 먹지 않고는 살아갈 도리는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먹기라는 그 행위가 우리 자신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냅니다. 동시에 동물과의 관계, 식물과의 관계, 인간들(여성과 남성, 빈자와 부자, 도시와 농촌, 빈국과 부국)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땅 바다 숲 대기의 꼴과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점에서 먹기란 우주적 행위입니다. 이것은 은유가 아닙니다. 먹기-우주 만들기가 은유가 아님을 이해하는 한, 이 시대는 다른 신체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팬더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팬더는 곰입니다. 하지만 대나무만을 먹습니다. 대표적인 잡식동물인 곰이 어떻게 이런 존재적 변환을 이뤄냈을까요? 오래전 팬더의 조상이 살던 지역은 지질학적 혹은 기후적 변화로 인해 식생 조건이 크게 달라졌다고 합니다. 생존의 위험을 느낀 팬더는 다른 포식자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섭생을 대대적으로 변화시켜 대나무를 주식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죠. 참 멋있지 않나요? 신체는, 생명은 이런 변환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팬더의 이빨이나 장기보다도 식물 소화에 더 적합합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보내오는 신호들이 지금과 같은 육식의 지속불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지요. 이런 시점에서 우리의 지혜이자 노력은 존재의 변환을 꾀하는 것, 다시 말해 먹기의 변환을 통해 다른 신체가 되는 것뿐이지 않을까요?
소비주의와 싸우고 소수성들과 연대하기
두 번째 주제는 ‘육식은 어떻게 소비주의에 연관되고 있을까?’였습니다. 은동샘께서는 축산업이 상당한 정부보조금을 받고 있다는 점과 고기값은 채소보다 등락폭이 적다는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고기값은 상당히 싼 편입니다. 자취생이나 1인 가구의 입장에서는 채식으로 포만감 있는 식단을 꾸리는 비용이 더 큽니다. 그런 점에서 고기는 우리의 일상적 음식 소비를 이룹니다. 하지만 고기는 비일상적인 소비 역시도 차지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의 유행어 “돈 벌면 뭐하게, 소고기 사먹지”가 말해주는 것처럼요. 고기는 서민적 식사부터 사치나 이벤트의 순간까지 모든 소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거대한 외식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육류이거나 유제품입니다.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채식이 더 비싸지 않은가? 때로는 투박한 육식(잡식)보다 비건 음식이 더 화려하게 미식 취향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저에게는 이런 생각이 스쳐가기도 했으나, 사실 이것은 결과적인 가격이나 외관만으로 비교할 때 성립될 수 있는 생각입니다. 고기의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것은 축산업이 상업화되어있고, 전 세계적으로 포진되어서 수입구조가 다양화된 결과일 뿐입니다. 식탁에 고기가 놓이기까지의 과정에 투여되는 에너지와 노동, 가공, 광고 등은 말할 수 없이 파괴적이고 소비적입니다. 식물의 생산과는 비교가 불가능하지요. 캐럴 제이 애덤스의 말대로, 동물의 모든 흔적을 다 지워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맥락적인 고기 조직만을 남겨놓아야만이 지금과 같은 무분별한 육식이 가능해집니다. 고기는 고기를 사고 먹는 과정 뿐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도 깊디깊은 폭력적 소비를 남깁니다. 그러므로 육식을 줄이는 일은 전적으로 소비에 대항하는 일입니다. 어마어마한 자본과 산업 구조에 저항하는 일이지요. 이걸 몸으로 이해하고 있을 때, 채식주의는 힘이 생기고 밝은 빛이 돕니다.
왜 우리는 모든 운동을 포괄하는 개혁가가 될 수 없을까? 왜 우리는 취미 정도로 한 가지 개혁만을 화두에 올리면서 다른 모든 개혁을 생각하지 않을까?(플로라 네프, <베지테리언 매거진>, 1907, 16~17쪽, (<육식의 성정치> 316쪽에서 재인용)
세 번째 주제는 ‘채식이 어떻게 가부장-남성주의 문화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는가?’였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제 주변에 채식주의를 실천하거나 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이나 퀴어 운동, 생태주의, 장애 운동이나 동물권 운동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 어떤 친구들의 경우는 그런 부문들 전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 연관성은 어떻게 된 걸까요?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은동샘께서 말씀해 주셨듯 반달가슴곰의 생존을 내걸고 지리산의 환경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채식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소비문화 무심할 수 있습니다. 운동의 부문들이 항상 섞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소수자적 문제를 고민할수록 다른 소수자 문제에도 공명하기 쉬운 것처럼 보였습니다.
채식주의는 많은 사람, 특히 여성들이 “나는 이 피조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나는 이 피조물을 먹지 않을 겁니다”라고 선언하면서 자기하고 특정한 동물 곧 고기가 될 운명에 놓인 동물 사이의 연관성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채식주의는 여성과 동물을 대상화하는 남성적 세계를 거부하는 방식이었다.(319쪽)
채식주의는 어떻게 페미니즘이 싸우는 남성 지배 문화에 대한 저항인가. 캐럴 제이 애덤스는 말합니다. “나는 착취당하는 인간이 착취당하는 비인간 존재들을 공감하고 도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43쪽) 저희는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취약성’에 대한 폭넓은 자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취약성은 허약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다른 존재들이 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진리이지요. 바로 여기에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게 손을 뻗어야 하는 의무의 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려움도 겪었었습니다. 어떻게 육식이 남성권력의 표현인지, 특히 이 시대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채운샘깨서는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의 공명을 이해하는 길은 가부장주의를 단지 남성의 억압이 아니라 위계화하는 구조로 볼 수 있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조에는 남성중심주만이 아니라 백인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이성애중심주의가 다 포함되지요. 가부장제의 얼굴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고로 가부장제에 대한 싸움은 위계주의에 대한 싸움입니다. 위계화하는 것은 언제나 규정성의 선을 가르고 폭력적 구도를 만들어내지요. 페미니즘은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라, 존재의 위계 구조에서 가장 배재된 존재들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주변으로 밀려나고, 덜 가치 있다고 의미화된 영역들에 의제를 던지고, 그들과 연대하고, 경계선을 수정하도록 하는 운동입니다. 동물권, 페미니즘, 장애운동, 퀴어운동 같은 실천들이 만날 수 있다면 세상을 ‘정점에 있는 것들’ 중심으로 위계짓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문화와 싸운다는 지점에서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억압’에 공감한다기보다는 ‘삶과 죽음’에 공감하는 것이죠. 어떤 삶이 죽어도 좋은 삶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어떤 삶이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죠. 윤리는 이렇게 소수성들의 얽힘을 타넘는 시도들에서 구성되어야만 합니다.
네, 이렇게 여기저기 뻗는 생각들, 감동들, 의문들을 남기고 생-기 세미나 시즌2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제게도 채식 실천은 점점 목전에 다가오고 있네요. 다만, 저는 어떤 의미화의 실천들로 제 신체를 단련할지 계속 고민해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신체적 연결망에 어떤 존재들을 포함시킬지, 우리의의 먹는 행위로부터 어떤 세계-만들기를 해나갈지 계속 고민해가야겠습니다.
생-기 세미나의 다음 거점은 후쿠시마입니다. 물질의 생동성 이야기로 가려던 방향을 틀고, 우선 저 난장판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벌써 다음 주가 시작이군요!
규정과 위계가 만드는 폭력에 저항하고 '삶과 죽음'에 공감하는 것.. 채식에 이런 함의가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시간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꼼꼼한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