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Seminar Board
안녕하세요. 후기로는 처음 인사드립니다. 무슨 후기에 거창하게 인사까지 드리나 싶지만, 글을 쓰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므로 처음이라는 핑계라도 대어 도망칠 구석을 마련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일단 이렇게 첫머리를 열어 보았습니다.
후기를 쓸 고민을 하는 동안(이라고 쓰고 널부러져 머리를 쥐어뜯는 동안,) 시간은 흘러흘러 생기 2차 세미나가 끝난 지 2주가 다 되어 갑니다. 다행히 긴 미룸 덕에 민호쌤의 정리가 잘 된 후기가 올라와 주었습니다. 나눈 이야기와 정리된 결론, 적절한 인용을 통한 학문적 탐구는 전부 그쪽으로 미루고 저는 세미나후기를 빙자한 개인적인 감상문 비스무리한 것을 써 보렵니다.
6월 6일에는 육식의 성정치 3부 ‘쌀을 먹는 것이 여성을 믿는 것’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숙제로 3부를 읽으며 곱씹어야 하는 질문들이 있었는데요. 첫 번째로 ‘채식주의 신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지, 이를 의미화할 때의 실천적 지점을 고민해 보아야 했고요, 두 번째로는 소비주의와 육식문화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책 전체를 아우르는 채식주의와 가부장 문화, 위계라는 폭력과 취약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며 세미나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곧 우리가 먹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페스코(육류와 조류를 먹지 않는 세미 베지테리언의 한 단계)를 실천하기 시작한 지 4년 정도가 지났다. 그 시작에는 여러 이유가 얽혀 있었다. 좋아하던 작가의 비건 관련 에세이를 읽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원래 육류를 엄청나게 즐기지 않았던 것도 결심에 도움이 되었을 거다. 돼지라는 동물에 대한 애정도 작지 않은 요소였다. 입으로만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실천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으며, 결심이 어렵지 않은 주변 환경도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몇 년 간을 관성적인 실천과 눈가리고 아웅을 반복하며 지냈다. 게으른 천성 때문인지, 느슨한 실천만으로 만족하며 앎의 지평을 더 넓히지 않고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다. 마주하게 되는 질문들을 돌파할 방법을 찾지 않고 그때그때 회피하면서 아, 여기 머무르면 안 되는데, 스스로에게 종종 핀잔을 주던 몇년이었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무슨 자기고백처럼 되어 버렸는데, 아무튼 결론은 이 세미나가 반틈짜리 실천으로 자위해온 시간들을 돌이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채식 지향인으로 살며 자주 마주치게 되는 질문에는 상당히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흔한 사례는 이런 거다.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자신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때, 그 사유가 그의 건강이나 식성에 관련되어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편이다. 그러나 그 사유가 조금이라도 이념적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 테이블 위는 링 위로 변모한다. 식탁의 반대편에 앉은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논파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순간은 꽤나 자주 찾아온다. 신기한 일이다. 기호는 그렇게 쉽게 이해의 대상이 되는데 어째서 사회적, 혹은 도덕적 판단에 의한 결정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걸까? 취향 존중이 당연한 예의가 된 이 세상에서 왜 이념 존중은 그만큼의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가? 나도 변명처럼 이 피곤한 논쟁을 기호의 문제로 회피한 적이 많은 관계로,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그냥 안 먹는 것과 ‘이래서’ 안 먹는 것은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여기서 ‘채식주의 신체’라는 말이 등장한다. 문제는 이 말을 어떻게 스스로 의미화해서 열쇠구멍 안에 집어넣느냐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가치관이지만, 나는 육식이라는 행위 자체에 불쾌감을 갖지 못하는 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잘못된 것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파커의말에 공감할 수 있다. 붓다의 삼종정육 이야기 역시 그랬다. 역사적 맥락과 제의의 의미, 자연스러움이라는 어떤 가치 내에서 나에게 육식은 금기가 아니다. 하지만 현대사회 내에서 육식 행위는 절대 자연스러울 수 없다. 나라는 개인은 상품으로의 ‘고기’가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책임지고 관찰할 수 없다. 어느 순간 맥락이 삭제당한 덩어리는 툭 우리 앞에 떨어진다. 내게 ‘채식주의 신체’의 열쇠는 그 비명의 과정이 얼마나 쉽게 지워지는지에 대한 깨달음이었던 것 같다.
함께 살펴본 잡식동물인 팬더가 왜 대나무만을 먹게 되었는지의 사례처럼, 우리의 몸은 어떤 선택들로 만들어진다. 내가 내 신체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모든 순간은 의미화의 전투다. 그러므로 단순히 혀의 맥락을 벗어난 ‘채식주의 신체’는 담론구조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신체는 고립되어 각각의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서 훈련되며, 이 과정은 그 ‘몸’을 실천적 용어로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 내게 역사적 맥락 안에서 채식주의 신체를 만드는 것은 반복되어 온 폭력과 착취를 내 몸에 들이지 않겠다는 결심과도 같다.
육식과 소비문화
육식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깊숙이 관계한다. 외식을 한다는 것, 회식을 한다는 것, 현대사회의 일부로 살아가면서 육식을 피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개인적인 상황과 관계 속에서 나는 상대적으로 채식 지향 실천이 쉬운 편이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다. 장을 보기 위해 들른 마트에서 살피는 고기의 가격표는 채소보다 싸고, 거리에서 저녁 먹을 식당을 찾을 때 채식 위주로 먹을 수 있는 가게는 선택지의 수에서 확연히 밀린다. 거리에는 살이 익는 냄새가 진동하고, 배달 어플을 켜면 치킨의 이미지가 없는 곳이 없고, 유튜브 따위의 미디어 속에선 구워지는 고기 인서트가 끊임없이 시각기관을 괴롭힌다. 이 도시의 일원으로 살며 살육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란 힘들다.
죽음을 먹는 행위는 사람들에게 어떤 만족감을 주는 걸까? 세미나가 진행된 날은 6월 6일, 육육데이라는 명칭으로 대형마트 등에서 고기를 팔았단다. 그뿐인가, 3월 3일은 삼삼데이라서 삼겹살을 먹는 날이다. 미디어와 자본은 끊임없이 고기를 구울 핑계를 만든다.
탄소를 끊임없이 배출하도록 만들어진 구조인 공장식 축산업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간종과 비인간동물 사이의 권력구조를 반복하면서 남의 살을 먹는 인간들에게 의식 저편의 만족감을 준다.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넌 치킨 먹을 때 제일 예뻐.” 반복되는 싸구려 프로파간다들을 보고 있자면 이건 어쩌면 인간종에게 행해지는 집단 최면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기형적 소비구조 아래서 채식지향자들은 자급자족형 삶을 꾸릴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차리는 식탁일 경우 일을 두 배로 만든다고 꼽을 먹거나, 누군가의 먹고 싶은 자유를 해한다고 이번엔 참으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예사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식단은 건강하지 않다는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듣는 것은 하루 일과이기도 하다. 도시의 채식인은 더욱 부지런해야 하고, 성분표나 재료를 살피며 선택과 고민에 타인보다 많은 시간을 써야 하며, 강한 의지를 가져야한다. 소비자본주의로 인해 과정이 지워진 사회에서 무심코 폭력을 행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노력해야 한다.
위계라는 폭력에 저항하는 것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강, < 채식주의자>
폭력의 대물림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그렇기에 그것을 끊는 이야기는 위대하다. 채식주의자라는 소설 속에서 영혜는 가부장제의 위계적 폭력 속에서 자신이 행해온 폭력을 실감하고 육식을 멈추기로 한다. 그러나 영혜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끊이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동물이 아니기를 선언한다. “밥 같은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육식의 성정치라는 책을 온전히 공감하고 소화시키기엔 분명 어려운 지점이 있다. 서구 사회의 페미니즘과 동아시아의 페미니즘이 갖는 일부 다른 맥락들과 언어의 탓도 있을 것이다. 육식과 여성주의라는 두 가지의 큰 주제 밖에 명확한 경계를 그어 놓고 그 안에서만 서로를 연결시키려는 시도 때문이라고 나는 느꼈던 것 같다. 어쩌면 더 확장될 수 있는 이야기를 너무 가부장제와 육식문화 안으로 한정시키려고 해 오히려 억지처럼 느껴지지는 않나? 하지만 세미나를 마치고 채식주의자를 다시 읽으면서 그런 의문은 잦아들었다. 개인의 서사와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반복되는 폭력의 층위를 너무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 그것이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어야 하고, 왜 그것이 육식문화일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아직도 옳음이 정확히 어떤 가치인지 모른다. 어떤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늘 우선사항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같은 곳을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개인성과 특화된 공감능력, 각자의 맥락과 당사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성소수자성이, 누군가에겐 페미니즘이, 누군가에겐 동물권이라는 것이 멀리 느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세미나는 취약성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취약성은 허약하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어느 지점에서 취약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 영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연결된 존재들이라는 사실과 같다. 경계를 나누고, 구획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누구 일반-이라고 이름붙여 뭉뚱그리는 걸 익숙하게 하는 현대사회 안에서 우리는 규정성의 폭력과 싸우는 중이다. 비인간 동물이 각자의 주체성과 개별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감각하는 것, 우리 하나하나가 취약성을 띈 존재들이라는걸 알고 있는 것. 그건 위계적 폭력 앞에 각각의 존재지점으로 공감하며 싸울 수 있는 첫 번째 발판일 것이다.
이번 세미나의 힘은 다른 무엇보다도, 평소에 어렴풋이 갖던 생각들을 꺼내보고 나눠보고 들어보는 시간에 있는 것 같아요.
육식의 문제를 각자 느끼고 정리해온 경험의 정도가 다르겠지만, 말을 나누는 순간 명료해지는 부분이 생기고 동시에 물음표가 찍히는 지점이 이동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생명(식물이든 동물이든) 먹는 것 자체가 문제되지 않더라도, 그것을 현대사회(공장식축산과 소비주의가 얽힌)에서 먹는 것은 다른 의미의 결을 준다는 생각에 대공감입니다!
한강의 소설 읽어보고 싶네요! 후기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완샘, 후기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미루는 동안 고민했던 지완샘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또 샘의 절실한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저 자신은 어떤 질문을 가지고 책을 읽고 세미나에 참여했는지 돌아보게 되네요. 막 빠져들어서 읽다 가도 절실한 자기 질문이 없으면 금방 휘발되어 버리기 때문이죠.
민호샘 말처럼 이번 세미나를 통해 각자의 문제의식, 경험을 나누었던 지점에서 자기 신체성의 의미화를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완샘이 강조한 "우리의 신체는...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서 훈련되며, 이 과정은 그 ‘몸’을 실천적 용어로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 내게 역사적 맥락 안에서 채식주의 신체를 만드는 것은 반복되어 온 폭력과 착취를 내 몸에 들이지 않겠다는 결심과도 같다." 이 문장이 어떤 정치적 구호보다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절대 자연스럽지 않은 현대의 공장식 축산과 소비주의 문제를 가장 근본적인 자기 신체성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 채식을 지향하고,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로 활동하는 지완샘의 선택이, 다시 지완샘의 고민과 진솔한 이야기와 실천으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상호 영향이라는 그 취약성 조건 덕분에 공감하고 또 연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늦은 새벽까지 고민하면서 쓴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 (아, 저도 소개해 주신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어보고 싶네요~~)
'취약성은 허약하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어느 지점에서 취약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 영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연결된 존재들이라는 사실과 같다.' 연결되어 있음이 취약함의 증명이고 타자를 보듬는 것이 곧 나를 보듬는 것임을.. 지완샘의 고민의 과정을 통해 저 또한 힘을 얻게 됩니다. 애쓰신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지완샘 글, 잘 읽었어요. 글을 죽 읽어 내려가다가 잠시 멈춰 생각하게 되는 지점들이 많았습니다. 마음속으로 줄도 쳤습니다! 그리고 가장 오래 멈췄던 곳에서 저는 부끄러움을 느꼈어요. 지완샘 말처럼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 개개인의 서사와 맥락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노력하는 마음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취약성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취약성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자주 잊어요. 이런 글이 아니라면 더 자주 잊겠죠. 지완샘, 정성스러운 후기 감사합니다. 오늘 이른 아침, 단비 같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