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크랩으로, 예술로 규문을 처음 접한 제게 생태 문제는 참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예술'과 '쓰레기'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부 환경 단체들이 불편했고, 생태라는 말을 들으면 찾아드는 반감(이 문제를 왜? 이미 많은 사람이 생태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바뀐 게 없지 않나?)이 걸림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세계 끝의 버섯』의 차분한 문장들이 겉돌았고 『분해의 철학』을 읽을 때는 낯선 개념들 사이에서 헤매던 기억이 납니다. 분명 제게 생태란 너무나 먼 문제였고, 예술의 문제와 분리되어 있었음을 느낍니다. 그런데 세미나를 지속하고, 선생님들의 재치 있는 입담에 집중하면서 어느덧 책의 딱딱하던 개념들이 일상의 사건들, 구체적이고, 솔직한 말들로 풀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비록 두 학기를 겪은 신참이지만, 2023 생기 세미나동안 있었던 배움을 중심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자연'은 이미지보다 크고, '나'와 분리할 수 없다.
흔히 우리는 ‘단편적인 자연’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합니다. 제가 있던 미술대학에서도 자연을 위해 태평양의 ‘고래’를 위한 작업을 고민하고, ‘에코백’을 생산하는 동기들이 있었는데요. 이는 ‘자연’을 나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상으로, 즉 ‘자연’을 ‘고래’와 ‘에코백’의 이미지로 떠올린 결과입니다. 그러나 채운 선생님께서는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에서 문제 삼는 것이야말로 자연을 대상화하는 태도라 말씀하셨습니다. 가타리는 생태를 본질적으로 모든 무기물질의 유기적 조직화라고 보았는데요. 때문에 가타리에 따르면 사회도 이미 자연에 관계하는 만큼 사회 생태가 있고, 환경과 사회 안에서 정신을 형성하는 만큼 정신 생태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생태(자연 생태, 사회 생태, 정신 생태)간의 경계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자연 바깥에 존재하지 않으며, 관념 또한 자연으로부터 동떨어져서 생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생태학의 문제는 자연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 정신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대상의 맥락을 소거해 버린 채 '이미지'로 만들고, '나'와 '자연'이 분리된 대상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자연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할 거 같고, 그 결과는 샤넬이 생산한 '에코백'을 사는 모순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혹은 무력감에 지쳐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신경을 꺼버린 채 살게 만들지요. 그러나 문제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이미 '자연'이므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타리의 논의는 개인이 세상을 느끼는 방식, 즉 미학의 문제로 나아갑니다.
미학의 문제, 주어진 것을 새롭게 느끼는 감수성.
매스미디어는 우리의 감수성을 획일적으로 만듭니다. 동일한 상품(유행)을 갈망하고, 제 때 소비를 못하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타리는 ‘세상을 다르게 느끼는 감수성(특이성)’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채운 선생님께서는 이를 예술적으로 욕망의 권리를 스스로 형성해 나간다는 말로 풀이해 주셨습니다. 각자 신체, 정신, 기질이 다르므로 우리는 주어진 것을 각자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 다름을 붙잡고, ‘자기만의 것’으로 조직화해나가는 사람이 곧 가타리에게는 예술입니다. 모방이 아니라, 획일화로부터 벗어나는 감수성. 그것을 고민하는 것이 미학의 문제입니다.
어떤 환경 운동가들은 예술을 '쓰레기'라고 말하지만, 예술적 시선에서는 쓰레기야말로 곧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들입니다. 가치가 가득한, 언제든지 주울 수 있는 ‘공유지’가 당장의 무가치 속에 가득합니다. ‘쓰레기’가 더는 ‘쓰레기’로 보이지 않게 만드는 시선이 ‘관계를 재발명’한, 예술의 시선, 미학의 시선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예술은 '이미 주어진' 진부한 것들을 ‘다 버리고 새로 사는(쌓는)’ 자본의 감수성을 의심하고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새롭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는 점에서 생태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생태와 예술도, 생태와 저의 삶도 거리가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거리는 애초에 없었고, 다만 제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감수성을 이루는 생-기 패치워크
다만, 저의 감수성을 '제가' 변화한 게 아니겠지요. 우리가 독립적인 개체로서 감수성의 변화를 혼자 실행해 낼 수는 없습니다. 감수성은 우리가 보고, 듣고,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서 형성됩니다. 그럼, ‘나는 누구와 감수성을 이룰 것인가?’ ‘그들과 어떻게 오염될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자기의 감수성을 구성하는 발단이 될 수 있겠습니다. 문제 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접속하는 것이기보다는, 접속한 장 안에서 또 다른 문제 의식을 만나고 자기의 특이성을 구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규문에 오고 인스타를 만지는 시간이 많이 줄었습니다. 강박적이던 연말 만남이 적어지고, 충동적으로 사들이던 전자기기도 시큰둥 해졌는데요. 이는 행동을 바꾸고자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결과적으로 드러난 변화였습니다. 그럼 생태적 삶이란 죄책감 없이 즐겁게 고민하는 감수성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함께 감수성 나눠주신 생기 선생님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일 년간 패치로서, 서로 섞이고 수고하신 선생님들의 소감을 정리하며 이만 마칩니다!
은동: 4월부터인가 생-기 세미나에 참여했던 것 같은데, 벌써 12월입니다. 지역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도움이 될까 싶어 시작한, 나름 목적의식이 분명한 공부였죠. 그런데 이 세미나는 결국 삶에 관한 공부였어요. 모든 공부가 그렇긴 하지만요. 나중에는 범위가 너무 넓어져 버려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가닿기에는 말이죠.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여러 가지로 부족했는데 또 어이없을 정도로 불성실해서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써버렸어요. 그래도 이런 놀라운 책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답니다. 채운샘과 민호샘, 같이 공부한 샘들에 감사의 말을 전해요. 마지막 책이 ‘세 가지 생태학’이었죠. 아랫글이 좋아서 책에 밑줄을 진하게 그었네요.
“이 에세이는 사소할지라도 이제 주위에 퍼져있는 단조로움(그리자유)과 수동성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일상은 대부분 별일 없이 흘러가고 재미도 없죠. 그래도 이 회색 같은 단조로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기어코 칼라풀한 무언가를 발견해 내겠다는 의지를 불태워 봅니다. 더 좋은 것은 저도 그 칼라풀한 무언가가 되는 것이겠고요.
수빈: 생태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혼란스러웠고, 기준을 정립하고자 생-기 세미나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세미나에서 우리는 정답이 아닌 질문을, 정립이 아닌 해체를 찾아 헤맸습니다. 매번 딱 떨어지지 않는 결론이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이제는 그 답답함이 생-기의 본질이자 동력이 아닐까 싶네요.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세계에서 좌절하지 않고 질문을 동력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신발을 얻은 기분입니다.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답을 찾아 혼자 고민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문제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함께 질문하고 걸어갈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남순: 우연하게 참여한 생기세미나였습니다. 책은 좀 읽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터라 책 내용을 이해 못할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기존에 제가 가진 개념이 전복된 새로운 개념들에 귀한 머리카락을 얼마나 잃어야했던지...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다' 외치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저를 추동 했던 힘은, 여기(규문-생기 세미나)가 아니고서는 접하지 못했을 텍스트란 점, 그리고 어렵다고 투덜대면서도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 저의 모습을 보는 남편의 시선(나름 존경이 담긴)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채운샘 질문은 왜또 그리 어렵던지요.ㅎ) 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해석 할 인식의 확장을 가져다준 공부였습니다. 함께 한 벗들과 진행을 맡은 민호샘, 그리고 채운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소리없이 퍼져나가는 버섯의 포자들이 숲과 사람을 연결하듯, 우리가 하는 공부가 나와 세상을 매개하는 재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또 뵙게 되길 바랍니다.
난희: 여름 휴가지에서 <생동하는 물질>을 폈다가 금방 메모를 열심히 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정말 '쎄끈한' 언어로 그 즈음 공부하고 있던 철학을 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뒤 이어 읽은 <세계 끝의 버섯>도 쓰고자 하는 글의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할지를 암시받은 것 같았아요. 저로서는 너무도 귀한 수확의 기쁨을 맛본 시간이었습니다.
채운샘의 질문을 줄기로 매주 한편씩 올리는 과제도 저에겐 좋은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가타리의 책을 꼼곰히 읽지 못해 아쉬워요. 겨울 방학동안 꼼꼼히 읽고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내년에 많은 샘들과 더 많은 생각을 공유하기를 바랍니다. 함께 공부하신 도반샘들께 감사드립니다. 민호샘 앞에서 이끌고 뒷정리해주시느라 무지 수고 많앗어요. 늘 감사히 생각합니다.
신우: 돌아보면 처음 시작은 생기 영화제였던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영화 3편을 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고 보았는데 기우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날 본 영화의 이야기들 중 무언가가 저의 가슴을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생기 세미나를 통해 읽었던 책들. 비인간존재의 진동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생동하는 물질>, 경계를 허물고 폐허 속의 버섯을 찾아 숲을 걷게 해준 <소로>와 <세계 끝의 버섯>, 분해되어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전복하여 창조와 생성의 기쁨으로 사유하게 해준 <분해의 철학>, 놀랍도록 지성적인 언어로 생태적 삶과 함께 예술의 지평을 넓혀준 <세 가지 생태학>까지. 재미있기도, 어렵기도 했지만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어 가며 더 많이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연이 과정이듯이 생태적 삶 역시 과정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잠시 부패와 침잠의 시간을 갖고 내년 시즌 다시 생태적 삶의 과정 중에 만나 뵙기를 소망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해피 뉴이어입니다~ ^^
호정: 버섯 책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생-기 세미나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생태 문제에 대해선 찜찜함과 머뭇거림 속에서 거리를 계속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으로 들어가 활발히 펼쳐지고 있는 논의들을 만나니 그렇게 절망적일 것도, 슬플 것도 없어서 좀 놀랐습니다. 알게 모르게 그런 표상이 있었나 봅니다. 더 알게 되면 더 슬퍼질 거라는..?
이번에 세미나 하면서 인간인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해주어야 한다는 착한 생각이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것인지를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그 생각으로부터 동반되는 죄책감/조급함/슬픔/무기력을 이제는 조금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함께 공부를 나눈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보나: 가정과 회사를 오가는 번잡한 일상에서 함께하는 책읽기를 하고 싶었지만.. 제한된 시간 속에 할 수 있는 세미나는 많지 않았어요. 생기세미나는 평일 저녁 , 온라인, 게다가 항상 염두해 두고 있는 주제! 안하기가 힘들었지요^^ 세미나에서 함께 읽은 책들은 관심사로 시작한 저를 한없이 깨뜨려 주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세계를 펼쳐보여줬고, 우리의 삶이 그 세계에 어떻게 가 닿고 있는지 일깨워 주었지요. 결국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다시 또 생각하게 했습니다. 폐허에서 움튼 버섯, 분해된 것에서 보여지는 생기로 답답하고 위축되는 느낌을 어느 정도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채운샘은 매 차시 질문들로 생각이 흩어지지않게 중심을 잡아주셨고, 민호샘의 정성스런 후기는 미천한 기억력에 영양제 같았습니다. 충실하지 못했지만 제게 너무 감사하고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2주마다 한번이라 덜 부담될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많다고 꼼꼼히 읽을 수 있는건 아니더라구요. 분량을 줄이고 매주 해도 좋을 거 같아요^^
해민: 생기세미나를 통해 경계의 영역에 놓여있는 삶을 들여다보고, 분해의 세계를 상상해보고, 감수성에 대해 질문하며 어떤 종류의 유연함을 지니게 된 것 같아요. 우린 이미 오염된/분해되어가는 존재라는 이야기는 희한하게도 힘이 되었고요. 세상 끝에서 함께 작은 춤을 출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내년에도 함께 춤출 수 있길!
영은: 몇번 뵙지는 못했지만 마음 전합니다. 저는 책 읽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 타입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살며 마주치는 문제들을 풀어가기위해 책을 찾게 되는데요.
몇년전 일리치를 통해 ‘규문’을 알게되고 그때 경험했던 지혜의 시간들을 다시 나누고 싶어 이번 생기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분해의 철학> <세가지 생태학>을 만나고, 읽고, 그 이야기 거리를 중심으로 수다하며 저한테는 앞으로의 이런저런 삶의 방향과 방식,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가지 생태학>에서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사람(집단)의 말과 행위가 곧 문화“라는 내용이 계속 맴도네요. 요즘과 같은 생태, 정치 위기의 시대에 휩쓸리지 않으며 나는 어떤 말과 행동으로 우리의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p.s.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해 정말 아쉽네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또 들르면 환대해주실거죠? ( 물론입니다! ^^)
돌아보면 생-기 세미나는 '생태'라는 말 주변에 알게 모르게 우리가 늘어놓은 과격함, 슬픔, 무력함의 잔가지들을 넘어서 유연하고 명랑하게 함께 여기를 살아갈 힘을 확인한느 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즌별로 주제별로 오가셨던 선생님들, 멀리서 접속해주신 은동샘과 남순샘, 화력을 더하며 텍스트와 세미나를 더 강렬하게 만들어주신 크크랩 팀 제현샘, 수빈샘, 신우샘(또 오랫동안 함께해주시다가 이번시즌에 잠시 쉬어가신 승현샘과 인영샘도!),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오신 보은샘과 영은샘, 마음속의 물음표를 조심스레 꺼내주시며 고민에 고민을 엮어주신 호정샘과 해민샘, 모두 감사했습니다!
내년에 또 재미난 텍스트를 머리 맡대고 함께 읽으면서 '강렬해지는' 경험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패치2: 올해의 마지막 세미나 후기까지 정성스럽게 작성하셔서 한번 더 생태(生態)적이 삶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네요~
제현샘의 마지막 후기를 읽으니 생태는 '살아있는 것들의 모양이나 양태'일 수도 있고 또 '살아가는 태도'로 번역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동안 생태라고 하면 환경 중심의 생각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마지막 세미나는 그것을 넘어서 사회적 생태학과 정신적 생태학으로 사유가 확장되는 영감을 주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 확장이 아직은 관념적이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공부하면서 자꾸 패치를 덧붙여 나가다보면 이해가 되겠지요!
내년에도 새로운 패치를 덧붙여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