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전제들과 경계들을 헤집으며, '되어가는 중'인 존재성을 탐사/해체하는 세미나, 생-기 세미나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일도 토요일로 바뀌었고, 텍스트도 바뀌고, 멤버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익숙한 샘들, 새로운 샘들, 그리고 대학생과 청소년 샘들까지 합세해 상당히 신선한 분위기였는데요. 새로운 긴장감을 동력 삼아 으쌰으쌰 신나게 읽고-쓰고-떠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기술과 도구의 산물인 우리 자신의 배치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이러한 물음으로 저희는 기술철학을 배워갑니다. 첫 번째 책은 여러 기술철학자들을 소개한 입문서인 <현대 기술·미디어 철학의 갈래들>입니다. 단 두 개의 챕터(질베르 시몽동과 발터 벤야민)을 읽었을 뿐인데도 낯선 용어들이 마구 튀어나왔습니다. 사실 처음에 스윽 읽었을 때는 ‘음, 인간과 기계는 역시 분리 불가능한가 보군’이라는 수준으로 이해되는 듯했지만, 과제를 하려고 다시 읽고 나니 용어 하나하나, 개념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발제를 주절주절 길게 썼음에도 ‘기계-인간 앙상블’이란 개념의 맥락과 효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샘들도 저와 같은 심정이셨을까요?). 저는 뭔가 더 피부에 와 닿는 문제들, 가령 초고도로 발달하는 스마트기기들 앞에서의 우리의 무능력 등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근하고 디테일한 문제들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기술적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해 보다 근본적으로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워낙 낯선 분야이기도 하고, 텍스트도 해설서다 보니 시작이 다소 갈팡질팡했었습니다. 그래서 중간중간 질의자 채운샘께서 논의의 방향을 잘 갈무리해주셨습니다. 세미나 때 나왔던 몇 가지 요점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기술 ‘철학’ : 발생의 차원에서 기술을 묻기
1장 ‘인간과 기술의 공생이 우리의 미래를 개방한다’를 읽다보면 마치 시몽동이 ‘발명가’가 되라고 얘기하는 건가 하는 의문일 들기도 합니다. 기술성의 발달에 따라 기술과 관계에서 인간 소외가 나타는데요. 이를 막기 위해 기계의 작동과 생산을 잘 이해하고 그 과정에 개입하여, 인간이 소외되지 않는 구조를 개선하고 설계해서 더 나은(평등한) 관계를 만들면 될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노동’이 아니라 ‘기술적 활동’을 하라... 동현샘 말씀처럼 저도 역시 이 부분이 가장 모호하고 헷갈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기술 철학, 즉 ‘기술을 철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칠 때 나오는 것 같습니다.
과학이나 공학과 다른 철학의 특징이 있다면 ‘발생에 대한 사유’일 것입니다. 어떤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활용되며,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가? 이렇게 묻고 정리하는 것은 과학과 공학의 일입니다. 둘은 원리와 작용, 적용과 효율을 다루죠. 그렇기에 그 영역은 증명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현상들에 국한됩니다. 철학은 좀 다릅니다. 어떤 것을 그것으로 출현시키는 조건과 그렇게 작동하게 되는 배치는 어떠한가? 보다 근본적인 차원과 경계선들을 질문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렇기에 철학은 증명 가능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시몽동이 현상으로 나타난 개체들만이 아니라 ‘전 개체적인 실재’나 ‘포텐셜 에너지’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기술 과학이나 기술 공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철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 철학은 ‘기술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기술적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가?’를 묻습니다. 기술이라는 것이 이미 있다고 치고 그 기술의 효과나 효율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기술적 대상’들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들을 그렇게 작동하게 하는 토대, 조건, 배치를 묻는 작업이죠. 그래서 시몽동의 저서 제목이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일 것입니다.
기술에 대한 기존의 접근들, 즉 효용성을 묻고 이익과 손해를 묻는 상식적 접근들은 두 가지로 귀결됩니다. 기술 비관주의와 기술 낙관주의이지요. 이는 여전히 기술을 이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둘 모두 기술이 인간에게 편의와 이득을 안겨줘야 한다는 전제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시몽동은 다르게 묻습니다. 인간과 기술을 구분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인간의 존재양식과 기술의 존재양식은 애초에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며 얽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들입니다. 시몽동이 벌써 반세기 전에 던졌던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배워갈 ‘기술 철학’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직 용어도 접근법도 낯설지만, 우리의 상식을 넘어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한 것 같습니다.
‘결합’이 아닌 ‘앙상블’ : 협주적 존재론
첫 시간, 채운샘께서는 이 개념 하나만 알고가면(감을 잡으면) 오늘 세미나는 충분하다고 알려주셨는데요. 바로 ‘앙상블’입니다. 주로 음악회 포스터에 등장하는 ‘앙상블’이라는 용어를 시몽동은 기술적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씁니다. 즉 기술적 대상들은 언제나 공장이나 실험실 같은 환경들과 더불어 앙상블로만 존재한다는 것이죠. 기계는 ‘기계-인간 앙상블’입니다. 왜 ‘결합’ 혹은 ‘협동’ 등의 표현이 아닌 ‘앙상블’이라고 썼을가요? 이는 고유한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협주에서 한 악기의 소리는 다른 악기의 소리가 스며들면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즉 소리들은 서로가 서로의 환경이 되면서 고유한 선율을 만들어내지요. 여기서는 주체와 객체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역동성과 상호협력성을 표현하기 위해 ‘앙상블’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 같습니다.
시몽동이 개체화이론에서 말하듯,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이든 무생명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기계도 그렇습니다. 어떠한 배치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작동하느냐와 별도로 존재하는 기계는 없습니다. 최첨단 기술이라는 아이폰은 영하의 날씨에서 먹통이 됩니다. 그러한 기온과 습도의 배치에서는 아이폰은 우리가 알던 아이폰이 아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기계의 작동은 언제나 예상과 계획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오작동할 때 우리는 다른 발열 장비들을 활용해서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고장난 아이폰’이 우리의 또 다른 환경조건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합된 환경’이 되고 있습니다. ‘연합된 환경’은 ‘연합된 존재’의 다른 말이며, 이것이 앙상블의 의미일 것입니다.
기계가 앙상블이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기계-인간 앙상블’일까요? 인간적인 담론과 무관한 기계 발명품은 없기 때문입니다. 매년 새 버전이 나오는 아이폰은 혁신의 이미지, 미적인 이미지, 다양한 활용도의 이미지와 함께 출시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매번 환경영향평가, 저작권 침해 여부, 인권침해 및 사생활 보호 문제 등 여러 ‘사회적’ 평가와 제제들이 논의됩니다. 즉 기술적 대상 주변으로는 미학적, 기능적, 상업적, 사법적, 교육적, 생태적 담론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지요. 달리 말하자면 언제나 정보가 기계의 구조와 작동 안팎을 가로지릅니다. 기술적 대상은 정보(담론)과 함께 진화하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보(사고방식) 또한 기술적 대상들과 함께 변해갑니다. 담론이 바뀌면 사고가 바뀌고, 사고가 바뀌면 신체가 바뀝니다. 변형과 발명을 거듭하는 기술적 대상과 함께 인간의 신체 역시도 변형되고 재조직됩니다. 인간과 기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갈마들며 존재를 형성하고 있지요. 그렇기에 기계는 언제나 기계-인간 앙상블인 것이죠. 인간도 마찬가지고 인간-기계 앙상블이고요.
첫 시간 후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 시간(3.9)에는 <현대 기술·미디어 철학의 갈래들> 2부 5장과 6장(150~213쪽)을 읽고 과제를 적어옵니다.
*과제는, 여기서 소개되는 기술철학자들(스티글레르와 라투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지를 써 봅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어떤 개념을 풀어내고 있는지를 정리해보고, 그때 자신의 질문을 적어옵니다.
그럼 토요일 저녁 7시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