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일요일 / 생-기 후기
저희는 <현대 기술·미디어 철학의 갈래들>을 읽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5장과 6장을 읽고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와 브뤼노 라투르에 대해 배웠는데요. 처음 접한 이름들이었고 낯선 용어들에 부딪혔지만, 그래도 역시나 이 기술철학의 갈래들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인간과 세계를 이해할 길을 열어주는 듯했습니다. 본문에 대한 발제와 과제는
숙제방에 올라와 있으니, 후기에서는 세미나 때 나왔던 이야기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기억 기술(mnemotechnics)
“‘기술’을 이야기하는데 왜 ‘기억’을 문제 삼는가?” 세미나 중에 나왔던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책에 실린 다른 학자들과는 다르게,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에서는 인간의 기억과 시간성의 문제가 깊이 다뤄집니다. 저자는 심지어 “스티글레르에게 기술은 기본적으로 모두 기억 기술이다”라고까지 말하지요. 기억라고 하면 저희는 우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뇌 안쪽을 탐사하는 제스쳐를 떠올립니다. 기억은 내부에 저장된 정보라고 생각되지요. 하지만 그럴 때조차 그 정보는 어디선가 체득된 것임에 다름없습니다. 읽고, 보고, 듣고, 배운 것, 즉 전승되어온 ‘무엇’이지요. 그것들은 모두 내 신체 바깥에서 오는 기억이며, 그렇게 전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즉 우리 내부의 기억은 언제나 외부의 기억과 혼합되어 있고, DNA를 통해 유전되는 생물학적 기억을 제외하면, 한 개체에게 형성되는 모든 기억은 모두 ‘외장 메모리’를 경유하게 됩니다. 그 외부의 데이터베이스가 바로 기술입니다. 기억은 언제나 ‘기술’을 전제하는 것이죠. 스티글레르는 인간의 기억의 근간, 즉 우리가 언제나 그 안에서 존재하는 시간성이라는 것의 근본에 기술이 있다는 점을 밝혀냅니다.
요컨대, 스티글레르에게 기술철학은 반드시 인간 존재의 조건이자 지평인 시간을 이해하는 철학적 시도입니다. 시간이 개체에게 스며들고 표현되는 방식에서는 언제나 기억이 중요하며, 그 기억은 언제나 기술에 의존하고 기술을 요구해왔음을 생각하면 기술-기억-시간은 분리불가능한 중요성을 갖습니다. 그의 주저 <기술과 시간>은 다분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오마주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데요. 스티글레르는 시간 속에서 존재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술이 사유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스티글레르는 어떤 점에서 기술결정론자가 아닌가?” 저희가 논의했던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이었는데요. 기억 기술의 전승과 더불어 우리의 존재가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주체성 없이 모두 외부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된다는 식의 비판이 스티글레르를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티글레르가 강조하는 것은 기술이 도구가 아니라 유산이요 문화 자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구와 유산-문화의 차이는 뭘까요? 저희가 논의했던 결과 도구는 보다 정적이고 완결적인 반면, 유산이나 문화는 역동적이고 형성 가능한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기억 기술은 적극적인 외화를 통해 계속 변형됩니다. 우리는 그는 전승된 기억으로 살아가지만, 유산은 현재의 특정 과업에 적용할 때 간극과 부적합함을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배운 지식을 보태거나 수정을 하여 다음 세대에게 또 다른 유산으로 물려주지요. 그렇기에 내부와 외부는 상호변환적transductive입니다. 즉 서로를 횡단하고 뛰어넘으면서 제3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인간은 기술에 의해 ‘되기becoming’를 계속하며, 이는 결코 결정론적이지 않습니다.
“유튜브 등의 SNS가 과연 진정한 교호sociality의 장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쉽지 않았습니다. 기술-기억-존재를 함께 사유하는 스티를레르에게 문제의식은 현대 산업 사회에서 더 빨라지고 막강해지는 기술적 배치로 나아갑니다. 기술 기억이 인간의 진화-일생-인식을 원초적으로 횡단하고 있다면, 이 시대의 기술적 대상과 그 양상의 변형은 우리 의식과 일상 바꿔놓을 수밖에 없죠. 기억 기술이 ‘기억 테크닉’에서 ‘기억 테크놀로지’로 발전되고, 미디어의 속도와 규모가 거대해짐에 따라, 인간의 의식 흐름이 과잉으로 덮어씌워져 빈곤화되고 있다고 스티글레르는 지적합니다. ‘기억의 초-산업화’가 역설적이게도 지식의 박탈과 상실을 야기하고 있는 지금, 그가 제시하는 SNS 상에서의 ‘새로운 쓰기’의 감각과 비판적 사고를 위한 훈련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저희는 디지털 업계의 견고하고도 정교한 지적이고 물리적인 인프라 내에서 건강한 연결을 만든다는 것이 잘 상상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브뤼노 라투르 : 기술적 배치가 사실을 만든다
“기술이 사실을 구성한다고?” 브뤼노 라투르의 급진성은 과학적 사실(fact), 혹은 자연적 실재(reality)가 아예 구성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1960년대 소크연구소에서 발견되어 연구자에게 노벨상까지 안겨준 TRF(갑상선 자극호르몬 발생호르몬)이 1960년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느냐, 그것은 그 시대 그 장소(실험실)를 둘러싼 모든 담론과 기술의 배치 덕분입니다. 라투르가 보기에 당대의 최신 물리학 및 생화학 이론, 고도의 관측 기기, 특수한 실험 설비 및 규정 등의 기술적인 요소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실재란 없습니다. 예측-측정-계산-발견에 적절한 모든 기술적 배치가 존재하기 이전에 전자기파, 전자, TRF, 힉스입자 등이 존재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주 보수적인 과학관입니다. 그런 주장이 유효하려면 연구에서 그 연구를 가능케 한 물질적 요소들과 조건들을 모두 없는 셈 쳐야만 하지요. 과학적 발견을 위해서는 특정한 기술적 배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기술적 배치가 자연의 실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과학은 언제나 혼종적인 것, 테크노-사이언스입니다.
“우리는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 근대성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근대의 특징이자 문제를 ‘분리’에서 찾습니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 이성과 상상력의 구분, 자연과 사회의 분리,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 등”(200쪽)이 바로 지금의 인간적이고 지구적인 위기의 발안이라고 말이죠. 이런 구분을 라투르는 ‘정화’purification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 분리 현상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과학의 무용함을 비판하거나 자연법칙을 원용해서 사회와 문화를 비판했습니다. 이것인 문명비판적 생태주의나 사회비판적 과학주의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테크노사이언스를 말하는 라투르에게 정화는 제대로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사회와 자연은 엄격하게 분리된 적이 없고, 그 과정 뒤에는 언제나 ‘번역’translation이라 불리는 개입과 혼용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지식에는 항상 사회적인 것들이 포함되었고, 사회에는 기술과 같은 테크노사이언스가 사회의 요소요소들을 강하게 결합시켜주고 있었다.”(201쪽)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근대인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물들의 의회가 어째서 정당한가?” 저희의 세미나에서 큰 어려움을 차지했던 것은 라투르가 어떤 맥락과 비전에서 ‘사물들의 정치’를 말하고 있는가였습니다. 라투르의 논의에 따르면, 과학적 사실이 만들어지는 실험실은 인간과 비인간들의 요란한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장소이고, 비인간들을 인간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편리하고, 돈을 벌어다 주며, 병을 낫게 해주는 등) 길들이는 과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주로 과학자와 기술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현대 사회의 권력의 핵심을 쥐고 있으며, 이들을 누가 통제하는가 하는 문제가 현대 사회의 권력의 중심적인 초점입니다. 라투르는 그동안 정치 엘리트와 대표직 관료들에게 집중된 그 통제권을 훨씬 더 많은 시민들에게, 나아가서 사물들에게로까지 확장하는 것이 정치의 과제이자 이 시대의 위기들(원자력, 온난화, GMO, 나노기술, 유전자 편집, 공장식 축산, 산성비 등)에 응답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사물들과 비인간들을 정치의 행위자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희는 라투르가 사물을 실체적 물체가 아니라 행위자로 이해한다는 점에 대해 주목해보았습니다. 라투르의 초점은 개체와 개체, 존재와 존재가 아니라, 존재들의 연결망, 즉 네트워크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비인간의 이종적인 네트워크이고, 상당히 변덕스럽고, 와해될 수 있으며, 마치 유체나 리좀처럼 변형됩니다. 어떤 과학적 사실들, 혹은 그 사실들을 낳는 기술들은 끊임없이 네트워크를 진동시킵니다. 가령 미세먼지(PM10)라는 실재는 2010년대에 본격적으로 담론화되고 사회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요(환경공학도 시절 유일하게 진행했던 실험이었습니다^^). 그 후 모든 뉴스에서 미세먼지를 보도하고 알리기 시작했고, 그 덕에 공기청전기와 황사마스크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렇다면 미세먼지는 이러한 사회 네트워크 변화의 한 행위자이며, 그 미세먼지를 예측하고 측정하는 수많은 실험실 장비들과 집진 테크놀로지 또한 네트워크를 변형시키는 행위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라투르는 이러한 행위자들의 정치의 문제에 당연히 참여해야 하며, 인간에 의해 인간만을 대변하는 지금까지의 정치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요?
물론 대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대변인의 자리에 누가 오느냐가 중요해지죠. 가령 CO2와 간은 비인간 행위자를 논의의 장에 포함시킬 때, 과학 기술자들만 그 대변자로 올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팩트만이 문제가 아니라 가치들도 문제입니다(*이 구절을 더 논의해보고 싶어집니다!). 그렇기에 철학자, 경제학자, 예술가, 외교관 등의 전문가가 함께 포함되어야 하며, 그뿐 아니라 농부, 시민, 주부, 노동자, 자본가에 의해서도 CO2는 대변되어야 합니다. “광의의 전문가들과 시민이 토론을 통해 합의를 만들어 갈 수 있으며, 이렇게 할 때만이 기후변화와 같은 불확실한 위험의 문제를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라투르의 결론인 것이다.”(210쪽) 얼추 따라가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잘 상상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은 어떻게 선출될 것이며, 얼마나 많은 행위자들이 포함될 수 있으며, 그 행위자들은 누가 선별하는지... 사실 라투르의 저서를 읽어야 더 분명해지는 것도 맞겠죠. 세미나 때는 행위자들의 범위가 로봇이나 AI로 넓어지는 경우에는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들도 나왔었죠. 샘들께서 후기로 질문과 논의를 더 이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 번째 시간(3.16) 공지드립니다.
-<현대 기술·미디어 철학의 갈래들> 7, 8, 9장을 읽고 과제를 적어옵니다
1주차, 질베르 시몽동의 기술 철학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인간-기계 앙상블 개념은 그동안 기술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점에 갇혀있었던 제 눈을 틔워줬죠. 더 깊이 파고 들게 싶게 만드는 시몽동의 논의를 읊자면, "형상은 일방적으로 부여되는 주형틀이 아니라, 불일치하는 것들 사이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산출하는 정보"라는 점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무규정적인 질료라는 흐름에 형상이라는 틀에 의해 개체들이 찍혀져 나온다는 고래의 관념을 뒤집는 장면이었습니다. 형상이 정보라니! 그러면 그 정보는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질문이 피어나네요. 더 공부해보고 싶어요.
2주차, 공지를 확인 안 한 죄로 저는 엉뚱한 부분을 읽고 엉뚱한 과제를 하느라 잠을 설쳤습니다. 덕분에 빌렘 플루서를 만났어요.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플루서의 <피상성의 예찬>은 크크랩의 사진반의 교재인데도 저는 기꺼이 그 책을 구입했습니다. 플루서는 인류 문화사를 코드, 즉 상징체계의 변천사라고 하면서 20세기 이후 텍스트가 점으로 분해되어 그 기능을 상실한다고 했어요. ㅇ차원의 탈문자 시대라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의 읽기, 쓰기는 어떻게 되지? <글쓰기의 미래는 없는가>라는 책을 급구입했습니다. 짬짬이 (될지 모르겠지만) 탐구해볼 생각입니다. 함께 하면 더 좋겠죠.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스티글레르와 라투르의 철학을 마주했습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지만, 반장님의 곡진한 준비에 힘 입어 새로운 사상을 듬성듬성 주워들었습니다. “‘기술’을 이야기하는데 왜 ‘기억’을 문제 삼지?” 거친 질문이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으로 뚫고 들어가는 관문이 되다니, 때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맨 밑바닥에 있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새로운 앎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될 수도 있구나, 싶습니다. "우리 내부의 기억은 언제나 외부의 기억과 혼합되어 있고, DNA를 통해 유전되는 생물학적 기억을 제외하면, 한 개체에게 형성되는 모든 기억은 모두 ‘외장 메모리’를 경유" 하고 "그 외부의 데이터베이스가 바로 기술"이라는 대목을 꼭 되짚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DNA를 통해 유전되는 생물학적 기억"은 '내장 메모리'인가요? 이때 내장과 외장을 가르는 기준은 개체의 신체 안과 밖이라는 의미일까요?
덧붙여 라투르의 '사물들의 정치'는 지난해 감명 깊게 읽었던 제인 베닛의 행위소 개념과 맞닿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