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크랩 대군이 무려 열 시간 가량이나 점유하고 물러간 토요일 저녁의 고요한 규문각. 저희 생-기 세미나팀은 그 잔향 속에서 주섬주섬 자리를 차렸습니다. 봄 햇살이 물씬 다가왔던 주말인지라 다소 노곤한 분위기 속에서 세미나가 시작되었습니다.
저희는 <현대 기술·미디어 철학의 갈래들>을 다 읽었습니다. 여러 철학자들에 대한 여러 저자의 서머리 책자이다 보니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술철학이라는 테마로 정리된 거장(?)들의 사유를 안내 받을 수 있어서 좋았고, 그들의 문제의식과 핵심 개념과 강조점들에 손쉽게 다가가고 또 비교도 할 수 있어서 유용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해설이자 보조문헌인지라 철학자들의 개념과 그 개념을 사용하는 맥락을 따라가기 수월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의 각각이 다루던 사유의 범위와 변화상이 충분히 얘기되지 않고 일부만 접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분명 탁월한 안내서인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기술이 갖는 역동성, 그리고 우리 신체와 정신과 욕망과 윤리 모두에 얽혀 들어가 있음을 이보다 훤히(그리고 풍성하게) 열어주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뿜뿜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에는 도나 해러웨이, 주디 와츠먼, 엔드류 핀버그의 사유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본문을 요약한 발제와 과제는 숙제방에 올라와 있으니, 세미나에서 오간 이야기들을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사이보그라는 실재, 사이보그라는 은유
‘사이보그가 은유라는 게 무슨 말일까?’ 허봄 샘의 질문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를 일컬어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자 사회적 실재의 창조물인 것 같이 허구의 창조물”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저자 이지언은 사이보그의 이미지가 “하나의 은유이자 실재로서 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반성하게 하는 중요한 기제이자 개념이 된다”(235쪽)고 말합니다. 실제 사이보그는 1960년대에 실험용으로 창조된 ‘삼투압 펌프를 이식한 하얀 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이버 기술체와 유기체를 결합하는 담론은 그 이전부터 가다듬어지기 시작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에서 기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즉 사이보그는 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가설들, 냉전시대 군사적 목적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입니다. 그래서 실재이기도 한 동시에 허구와 은유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해러웨이는 이 복합적 ‘물질-기호’로서의 사이보그를 우리 시대의 존재론이자 정치적 주체성의 비전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는 셈입니다.
겸손한 목격자 : 경계의 교차를 보고/보이고/행동하게 하는 사이보그들
‘겸손한 목격자란 무엇일까?’ 본문에서는 해러웨이의 대표적 초기저작을 쭉 다뤄주는데요. 그중에는 저희가 다음 시즌에 읽게 될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각각의 장소에서 출현한 사이보그 가족(혹은 동종)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기존까지 견고하게 유지되어온 항들의 경계에 서서 그 경계의 구분을 되묻고 있습니다. 유인원은 인간/동물, 여성인간은 woman/man, 앙코마우스는 유기체/상품, 흡혈귀는 서양인종/타인종, 유전자는 생물/무생물의 이항구분을 의문에 붙입니다. 양쪽을 포함하는 동시에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습니다. 역으로 지금까지의 구분이 얼마나 불충분하고 협소했는지를 고발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존재 양식을 실험하고 있는 ‘잡종’ 혹은 ‘키메라’인 사이보고이지요. 해러웨이는 그렇게 허물어지는 경계를 보고 보여주고, 자신이 목격한 내용에 책임을 지면서 어느 한쪽에 소속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구별들을 교차시키려고 애쓰는 이 사이보그들이 ‘겸손한 목격자’라고 합니다. 시대를 아프게 경험하며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겸손한 목격자이지요.
테크노페미니즘이 남긴 질문들
‘특히 임노동에 대한 와이즈먼의 문제의식을 지금의 젊은이들도 느낄까?’ 주디 와이즈먼의 문제의식과 분석은 저희 모두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와이즈먼은 앞선 기술철학과들과 마찬가지로 기술적 대상이 수많은 네트워크 안에서 역동적인 변동을 겪는다는 관점을 유지합니다. 다만 기술의 그러한 생애에 ‘여성의 삶’이 어떻게 얽혀 있는가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기술 산업의 역사에서 언제나 여성을 비숙련자 혹은 무능한 존재로 취급해 온 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문제제기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에코페미니즘의 관점 그리고 사이버페미니즘의 관점과도 결을 달리하면서, 기술 반대도 기술 찬미도 아닌 ‘기술이 여성의 삶을 매개하는 방식’에 주목해 나가는 것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왜 기술 혁신이 일어나도 여성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 이 질문이 데려다주는 배치에는 살펴볼 것이 아주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임노동 영역, 가사 노동 영역, 재생산(임신 출산 양육) 영역에서의 구체적 정황들을 짚어주니 더 와 닿았습니다.
하지만 지숙샘께서 질문해주셨듯, 지금 중년이 된 세대(주디 와이즈먼의 세대)가 겪어온 세월에서 성차별이 만연했다면 지금의 세대는 여전히 똑같이 느끼고 있을까, 하는 물음을 품어보는 것은 유용한 듯했습니다. 비혼 및 비출산의 경향이 강해지고, 디자인부터 경영이나 교육까지 ‘기술적인’ 노동의 범주가 너무나 넓어진 지금은 지금의 문제틀은 너무나 복잡한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와이즈먼이 묘사했던, 일자리 때문에 기술 혁신에 거부했던 남성 직공들의 심리는 더욱더 위축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듯도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시끄러웠던 군 가산점 제도의 요청은, 군복무가 취업전선에서 남성들이 불이익을 준다는 투정을 보여주는 한편, 그만큼 각종 기술 활용분야에서 여성과 남성의 능력상 위계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젠더 논의에서 임노동 현실이 복잡해 보이는 것은, 그것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재생산 영역과 너무나 밀접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전 세대보다는 결혼-출산-육아의 압력이 덜한 것은 사실이지만,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신체에서 일어나고, 육아와 돌봄이 요구되는 비율이 여성에게 편향적인 것 또한 여전한 사실입니다. 한때는 사회 전체를 통해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역할이었지만 지금은 그 당연함을 의심하고 되물어야 할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는 기술의 역사가 영향을 미쳤지요.
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앞에서 저희는 문제의 틀을 여러 가지로 설정해야함을 느꼈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말했듯 이는 모든 가치가 임금으로 환원되고 서로의 환원불가능한 고유한 힘이 무시되기 시작한 산업 사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남순샘께서는 병역이나 임노동에서 평등 같은 논제에서도 ‘젠더 간의 갈등’의 양상은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짚어주셨습니다. 갈등하고 분노를 터뜨릴 곳은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 시스템과 담론들이지요. 또한 지금 우리나라처럼 병원 시술과 외모 관리에 진심인 사회에서는 아주 격렬하게 사이보그의 논의가 펼쳐질 법도 한데, 이 논의가 많지 않은 것에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다음 시간(3.23) 공지드립니다.
엔드류 핀버그의 <기술을 의심한다> 1부(5~142쪽)까지 읽고 과제를 써 옵니다. 과제는 텍스트와 연관지어서 다음의 질문을 중심으로 자기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적어오시면 됩니다!
=기술이 과연 중립적일 수 있는가? 기술이 정치적이라면 그 정치성이라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