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현재 엔드류 핀버그의 <기술을 의심한다>를 읽고 있습니다. 네, 한 장 걸러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에 읽기에 뻑뻑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주 유용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 동안 인문학 공부의 장에서 만나보지 못한 시각이 행기고 새로운 번뜩임이 찾아옵니다. 온라인 둘, 오프라인 둘. 단출하게 진행되었지만, 찬찬히 내용을 따라가다 보니 너무나 우리 시대와 와 닿기에 세미나 시간이 또 모자랐지요.
확실히 1999년 텍스트다보니 남순 샘의 말씀대로 인공지능을 비롯한 최첨단 기술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윤샘의 말씀대로 기술을 둘러싼 우리의 사고가 놓인 지평을 아주 근본적으로 짚어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기술-사회가 분리 불가능한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다시 나 자신과 사회의 전제들을 살펴볼 귀중한 기회가 된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이것이 고전을 읽는 맛이기도 하구요. 가령 지난 시간에 배운대로 우리는 아직도 도구주의와 기술결정론을 당연시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도구주의란 ‘인간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기술을 만들어 사용한다’는 상식이고, 기술결정론이란 ‘기술은 기술은 단선적 진보 경로를 가지며 인간 문화의 토대를 변형한다’는 진부한 상식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술의 발생적이고 역동적 가장자리를 사유하지 못하고 일종의 블랙박스로 간주합니다. 전문가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지요. 이것이 우리가 맞서야할 기술관료주의적 감각입니다. 모든 것이 기술과 함께 돌아가고 있는 시대에 이러한 사유가 얼마나 위태롭고 편협한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핀버그의 주장은 ‘기술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구성주의적 테제를 아주 첨예하고 밀고나가며, 구성주의가 놓치거나 모호하게 만든 문제들을 표면으로 끌어올립니다. 그것은 바로 기술의 ‘비결정성’으로부터 곧바로 따라 나오는 ‘정치적 함의’입니다. 구성주의는 기술이 단선적으로 진보하거나 사회의 토대를 형성한다는 기술 결정론을 넘어섰지만, 그로부터 행위자들이 뒤엉킨 네트워크 혹은 권력망에서 도출되는 대안적 벡터들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못했습니다. ‘앙상블’로서의 기술은 언제나 그 네트워크가 다르게 코드화될 여백을 함축하고 있으며, 우리는 기술 과정의 참여자로서 그 잠재력을 다르게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핀버그가 낙관론에도 비관론에도 빠지지 않고 ‘기술적 존재’인 우리가 ‘기술 속에서, 기술로부터’ 다른 연결망을 자아낼 길을 열어간 주장의 핵심인 듯합니다. 물론 이처럼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고 디테일한 개념들을 경유해야 하지만요. 그럼, 세미나에서 나온 재미난 이야기 조각들을 추려보겠습니다.
‘기술 코드’와 규문의 계단
‘기술은 헤게모니적이다’ 이것은 핀버그의 테제 중 하나입니다. 기술적 대상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뜻인데요. 우리에게 너무 당연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물건들이나 시스템들은, 사실 그저 ‘이 시대 이 문화’에서 그러할 뿐입니다. 기술적 대상이 자연스러우면 자연스러울수록 그 시대의 중심적 가치에 부합할 뿐인 것이죠. 이는 푸코가 분석했던 ‘진실 체제’(진리 레짐)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자명함은 그저 ‘우리’의 자명함일 뿐입니다. 기술은 대부분의 경우 그 시대의 지평, 즉 문화적으로 자연스러운 지배 구조 속에서 설계되고 채택되면서, 역으로 그 헤게모니 형성을 돕습니다. 그러한 속성이 바로 ‘기술 코드’이지요.
“이러한 코드는 대체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술 코드 역시 문화처럼 자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작업도구나 작업장이 성인의 손과 키에 맞게 설계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설계표준이 도입되면서 어린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공장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167~168쪽)
저는 이 구절로부터 규문의 계단을 떠올렸습니다. 지난 금요일, 전장연 활동가들과의 미팅이 있었는데요. 권리중심일자리 복직 투쟁을 위해 규문을 방문하려 하셨으나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했던 명륜쎄레노 건물이 달리 생각되기 시작했는데요. 이 건축물의 설계에는 이미 비장애중심주의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의 중심 가치의 코드가 기술 디자인 이전 단계부터 부여되고 있었고, 그렇게 디자인된 건축물은 또 다시 어떤 코드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우리 주변의 수많은 장치들이 이미 수많은 중심적 사회 가치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횡단보도의 시간 초, 보도블럭의 턱, 오른손잡이용 도구들, 수많은 안티에이징 미용품 등등. 그러나 헤게모니는 영원하지 않으며, 절대적이지도 않습니다.
명륜 쎄레노가 지어졌을 당시에는 그 코드가 의심되지 않고 헤게모니에 부합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최근과 같은 몇 가지 경험과 그 경험으로부터 촉발된 이 기술-네트워크의 참여자들 사이의 논의는 기술의 설계를 변형하는 합의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즉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거나 경사로를 만들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죠. 구성원들은 그 변형을 위한 기금을 지자체나 정부에 요청할 수 있고, 그런 정책을 요구하거나 채택하는 정당을 투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결코 기술 진보는 일방향성을 띠지도 특정한 합리성에 복무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국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 안에서 헤게모니의 영향력은 굉장히 강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고 못하고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기술이 선택되는지는 지배적 이해관계에 따라 당시의 기술들에서 가능한 여러 배열들 가운데서 결정된다. 기술이 놓여 있는 지평을 정의하는 정치 문화적 투쟁에 의해 설정된 사회적 코드에 따라 선택이 유도된다. 일단 어떤 기술이 도입되면 이런 문화적 지평을 물질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기술적 합리성은 겉으로는 중립적이지만, 기술 발전 과정에서 획득되는 편향에 의해 특정 헤게모니를 지지하게 된다.”(166쪽)
기술의 진보에 참여하는 건 비경제적이다?
“기술진보의 목표는 프랑스 기술학자 질베르 시몽동이 말한 것처럼, 복수의 변수들을 동시에 최적화하는 ‘구체적’ 설계를 고안해 내서 이런 딜레마를 적절하게 피하는 데 있다. 교묘하게 설계된 메커니즘은 하나의 구조로 다양한 기능을 충족시키는 등과 같은 방식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수요에 부응할 수 있다.”(178쪽)
또 하나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기술의 발전’ 대 ‘대중의 참여’라는 대립구도를 훌쩍 넘어가는 핀버그의 논의였습니다. 하나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기술이 민주적으로 규제된다면,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환경적으로 건전한 설계나 공공복지를 향상하는 정책은 사회의 번영과 성장을 가로막는 일 아닐까? 발전과 대중의 영향력 사이의 대립에 관한 극단적 사례는 원자력 발전에 있습니다. 20세기 후반들어 기술적 설계가 철저하게 전문화되고 블랙박스화되면서, 대중들은 ‘합리적인’ 이유로 기술에 대해 공포를 갖게 되고 신기술에 대한 이의제기를 해왔습니다. 핵발전의 경우 1990년대 큰 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핀버그는 이러한 저항과 개입이 기술의 발전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잠재력을 자극해 그 설계가 보다 안전하고 보다 덜 소외적인 방향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령 아동노동에 대한 반대는 당시에는 경제적 손실과 인플레이션의 우려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학교 교육과 그로부터 더 숙련된 노동자가 양산되었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설계는 경제학적인 제로섬 게임이 아닙니다. 본질상 역동적인 기술설계는 효율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사회집단들이 갖고 있는 다중적 가치에 부합할 수 있는 양가적 문화 과정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술의 미시정치학 : 논쟁, 전유, 대화!
“민주적인 기술적 대표를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기술 코드를 변경하고 기술 코드를 계속해서 주입하고 있는 교육과정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기술영역에서 가장 흔한 투쟁형태가 앞장에서 언급한 민주적 합리화나 기술 코드를 변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논쟁, 전유, 대화인 이유를 알 수 있다.”(251~252쪽)
핀버그는 68혁명이 무엇보다도 ‘기술관료주의’라는 통제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 저항이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가 아니라 통제 혹은 길들임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그러한 대규모 집단 궐기는 어렵고 통하지도 않습니다. 권력은 ‘전략가 없는 전략’입니다. 푸코는 이미 “근대사회에서 권력은 개인으로부터 분리되며, 어떤 기관으로부터도 분리된다”(202쪽)는 점을 간파했습니다. 권력은 권력 주체보다 선행합니다. 주체의 기반을 이루는 실천 일체가, 즉 주체를 조직하고 통제하고 유도하는 사이사이의 관계적 전략들입니다. 권력은 미시적입니다. 그렇다면 저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항 또한 미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 기술 네트워크의 중심부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민주적 주체들의 속성이 더욱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저희는 이 책에서 소개되는 미시적 저항의 형태인 기술 논쟁, 혁신적 대화, 창조적 전유를 우리의 세미나와 연관지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저희의 공부가 기술 설계에 급진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미 그 일부인 기술적 대상들의 앙상블에서 기술 코드들을 읽어내고 그것들을 변경하고, 또 그 코드들을 계속 주입하고 있는 과정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4.6)에는 <기술을 의심한다> 3부(259~370쪽)까지 읽고 공통과제를 써 옵니다. 과제의 질문은 곧 올려드리겠습니다~
토요일 오후 7시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