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끝! 단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페이지가 이렇게 안 넘어갈 수가! 낯선 용어들과 첨예한 질문들로 저희에게 기술철학이란 분야의 매운맛을 보여줬던 엔드류 핀버그의 <기술을 의심한다>를 이번 주에 다 읽었습니다. 과제를 잘 못하고 물음표를 많이 쳐 두었더라도 일단 완주했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냅니다. 채운샘의 지원사격으로 이뤄진 강의에 준하는 질의응답 덕분에, 책에서 다뤄진 논의의 배경들을 따라갈 수 있었고, 난해한 내용들을 좀 더 찬찬히 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기술을 ‘철학’하기
역사철학, 예술철학, 과학철학, 법철학.... 어떤 분야 뒤에 붙는 ‘철학’은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며, 그 분야와는 뭐가 다를까요? 예술‘철학’이 예술과 다르다면, 그것이 예술이라 불리는 것의 조건과 울타리를 질문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그 대상의 발생과 존재방식을 집요하게 헤집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균열과 얽힘의 면모들을 드러내 보이는 일을 주로 합니다. 기술 철학도 마찬가지이지요. 대체 기술이라는 것은 무엇이어왔는지, 그 경계와 구성의 역사는 어떠한지를 물어가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기술을 하나의 철학으로서 사유해야 할까요? 막연하게, ‘이 시대에는 기술이 우리 삶에 너무나 막대한 힘을 발휘하기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답변에서는 기술에 대한 질문이 충분히 시도되지 않고 있습니다. 시대, 기술, 삶이 마치 구분되는 속성을 가진 별개의 항처럼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요? 더 내려가야 합니다. ‘인류세’라는 호명과 함께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이자 파괴자로 자처하며 위세를 떨칠 수 있는 것은 무엇 덕분일까요? 확실한 건 우리의 신체능력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날개도 발톱도 없는 인류가 매머드를 멸종시킨 건 불을 다루고 창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즉 기술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어디서 왔을까요? 프로메테우스가 전해준 걸까요? 짧은 시간단위밖에는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기술적 대상들을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 모든 기술물들은 사물의 변형이자 신체의 연장입니다. 진화학적으로 인간이 사물을 변형함과 동시에 신체도 변형되어왔지요.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형된 사물들-기술물들과 더불어 관념도 다르게 작동합니다. 저희는 이를 스티글레르의 ‘기술 기억’ 개념으로 배우기도 했었죠. 우리가 기술을 묻는 한, 인간의 신체는 어디까지이며 정신은 어디까지인지를 묻게 됩니다. 여기에는 사물과 인간 사이의 끝없는 상호변용과 공진화가 있습니다. 결국 기술에 대한 사유는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인 것이죠. 기술 철학은 어쩌면 다른 어떤 철학보다도 더 첨예하게 인간 존재의 발생에 관한, 그리고 정신문화의 토대에 관한철학이기도 합니다.
핀버그 철학의 배치
앤드류 핀버그는 지금도 활동 중인 기술철학자로서, 20세기 말 기술에 대한 담론들을 아주 촘촘하게 분석합니다. 그는 기술 낙관론에도 비관론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기술과 더불어, 기술을 변형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음을(그래야만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기술적 사물을 위해, 그리고 기술적 사물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술적 사물과 함께 거주할 수 있다.”(332쪽) 그는 동시대 학자들의 논의를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기술을 고정된 실체나 고유한 본질을 가진 것으로 일반화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데요. 그 행간마다 쉽게 절망해서도 쉽게 희망해서도 안 된다고 외치는 것 같아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그의 철학은 기술을 본질주의적으로 보는 실체론 및 결정론에 반해서, 사회구성주의와 비판이론을 경유합니다. 그리고 기술민주화론에 다다르지요. 채운샘께서 짚어주신 바를 따라, 그가 경유하는 사유들의 배경을 잠깐 스케치해볼까요.
1) 비판 이론 : 비판 이론은 말 그대로 현대 산업사회의 기술적 지배 양식에 대한 비판입니다. 대표 주자로는 하이데거의 제자들 또는 영향을 받은 마르쿠제,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하버마스 등 프랑크프루트학파로 불리는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전쟁과 나치즘에 의해 풍비박산이 된 유럽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으로 떠났지만, 그들이 신대륙에서 목도한 것은 일종의 물신주의였습니다. 이미 1940년대부터 TV가 보급되었고, 60-70년대에 PC가 보급될 정도로 미국은 기술적 측면에서 앞서 있었습니다. 최신식 가전제품을 비롯해 수많은 자동차, 뻥 뚫린 도로망, 거대한 교각, 마천루 같은 빌딩, 원자력 발전소, 수력발전소, 우주연구기지, 입자가속기 등의 최첨단 기술적 대상들이 운영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기술 관료, 즉 합리적 지식으로 무장한 엘리트들이 대학을 통해 양산되어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죠. 비판 이론가들은 이 풍경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막스 베버가 제시했던 문제의식을 떠올립니다. ‘종교적-봉건적인 신학적 질서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던 근대적 합리성은 어떻게 다시 인간을 통제하고 구속하는 쇠우리가 되는가!’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으로, 계몽적 이성이 하나의 도구가 되면서 소외적인 제도로 인간을 침몰시키는 새로운 질곡이 됨을 역설했습니다. 그 대표적 결과가 나치즘이었던 것이죠. 나치즘은 미친 사람들의 무식한 이들의 만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과학적 합리성에 기반한 진보 이론을 주창한 사상이었습니다. 광기와 잔학임이 아니라 이성과 계몽이 나치즘의 동력이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비판 이론가들은 합리성과 테크놀로지가 불러오는 이 ‘새로운 야만’에 질렸으나 미국에서도 비슷한 기술적 합리성의 지배를 발견하지요. 그들은 기술의 매개적 성격을 직시합니다. 기술은 법이나 돈과 마찬가지로 행위를 규정하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술이 권력이다.” 이 정식은 기술 자체가 이차적 이용물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 관념, 생각과 행위를 바꾸는 힘으로 작동함을 말합니다.
핀버그는 비판 이론가들의 분석을 상당 부분 수용하지만, 거기 심겨 있는 본질주의적 견해(기술이 자체의 생리를 갖는다는 실체론, 기술이 역사의 토대를 만든다는 결정론)와는 맞섭니다.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며 개개의 인간과 사회를 바꾸며 작동합니다. 하지만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비인간 네트워크 역시 기술의 흐름, 즉 기술이 분기되고 상용화되고, 제지되고, 설계되는 전 과정에 영향을 행사합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 기술설계-작동 과정과 사회관계는 아예 완전히 분화될 수 없는 하나의 앙상블입니다. 기술은 단순히 장치나 기능으로 추상화될 수 없습니다. 기술은 사용 맥락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지요.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핀버그 또한 시몽동의 ‘인간-기계 앙상블’ 개념을 참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 기술 민주화 : 여전히 논쟁 중인 개념
“기술을 단일한 본질로 간주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본질주의자들이 가정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현재는 미미하더라도 미래에는 더욱 중요해질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 이런 차이들이 교육, 의료, 노동에 대한 우리의 경험, 자연환경과 우리의 관계, 컴퓨터나 자동차 같은 장치의 기능이 의미와 공동체를 보호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게 결정한다.”(318쪽)
핀버그는 기술에 대한 부정이론이 아니라, “다른 식의 개념화가 필요하다”(324쪽)고 소리높여 외칩니다. 기술과 관련된 문제들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우리는 ‘기술’이라는 것이 하나의 결이나 하나의 특성을 가진 무언가로 싸잡아서는 안 됩니다(사실 이는 기술뿐 아니라 모든 문제에 해당합니다). 하이데거에게서 보이는 그런 단순화는 언제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놓치게 합니다. 폐허 속에도 남아 있는 것들, 아직 한참 진행 중인 것들, 생겨나는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어쩌면 기술에 대한 본질주의는 니체의 표현으로 기술에 지친 자들의 피로감의 반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핀버그는 (애나 칭이 그랬던 것처럼) 기술의 헤게모니적 작동 속에서도 미세하게 이탈하는 오작동과 그 오작동으로부터 새로이 구성될 해방구들을 찾고자 합니다. 그는 존경과 안타까움을 모두 담아 말합니다. “하이데거는 근대기술을 위에서 내려다 본 것이다.”(330쪽) “왜 하이데거는 ‘내부’로부터, 실천적으로 근대기술을 바라보지 않았을까?”(331쪽)
기술은 우리 존재의 안과 밖과 사이에서 여전히 구성되는 중입니다(사회구성론). 하지만 물론 중심적 헤게모니가 있습니다(비판이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술이 보다 많은 존재들의 ‘차이’를 반영하도록 개입하고 압력을 넣을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존재들의 존재 양식을 포함하도록 기술 코드를 다시 짤 수 있습니다. 사실 수많은 신체들의 능력을 확장하고 변형하는 것, 그것이 기술의 출발이었으니까요. 비록 지금의 기술이 이 사회의 중심적 가치로 편향되어 있다 해도, 그 헤게모니적 질서 흐름에 미세하게라도 물꼬를 비틀 수 있습니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도록, 버스가 저상 버스로 대체되도록 목소리를 모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술 코드와 설계의 장에 더 많은 존재들의 네트워크가 가담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핀버그가 주창하는 ‘기술 민주화’입니다.
기술 민주화는 이 시대에 아주 긴급하고 중요하게 사유되어야 하는 개념입니다. 왤까요? 가령 원자력 발전소나 도로 같은 거대한 기술적 구성물들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기술은 나름의 경제적 효율성이나 환경영향평가를 거쳐 작동될 것입니다. 기술 이용자들 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겠죠. 하지만 과연 이런 기술의 설계에는 ‘직접 관련은 없어 보이지만 이 기술이 현실화되고 고장 날 때, 그 결과 앞에 가장 취약한 존재들’의 입장이 얼마나 고려되고 있을까요? 가령 원전 사고가 났을 때, 그 방사능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는 아이들, 장애인들, 어부들일 것입니다. 도로가 뚫렸을 때 길을 지나야 하는 야생동물들은 어떻게 될까요? 핀버그는 이렇게 기술이 설계에서 반영해야 하는 주변적 존재들을 ‘관련사회집단’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기술이 바로 이런 단계에서부터 논의될 때 기술 민주화는 시작됩니다.
기술 민주주의는 여전한 화두입니다. 불화와 갈등을 요구하는 어려운 논의입니다. 핀버그는 민주주의를 좀 단순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대의제를 염두에 두었고, 회의의 과정에 어떤 소수자를 어떻게 반영할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라투르의 ‘사물들의 의회’ 개념이 한 발 더 나아갔을지 모르지만 이 역시도 현실화의 문제는 충분히 고려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헤게모니가 작동할 것이고 중심권력이 기득권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정치판을 봅시다!). 그렇다면 일단은, 거시 정치적 영향력의 확보를 향하지 않는 주변 공동체들을 구성해 기술에 대한 다른 논의 다른 관계를 발명하는 실천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생-기 세미나도 그런 움직임 중 하나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시간(4.13)에는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를 읽고 옵니다. 과제는 곧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토요일 7시 규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