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9회차! 네 번째 텍스트에 접어든 생-기 세미나는 아주 흥미진진해지고 있습니다. 에세이의 열기가 후끈했던 토요일 저녁, 저희는 규문각에 모여앉아 온라인으로 접속하신 샘들과 책을 펼쳤습니다. 주디 와이즈먼의 <페미니즘과 기술>이었는데요. 앞서 읽었던 기술철학 개론서에 개괄적으로 소개되기도 했었고, 문장 자체가 차분하고 담백해서 그런지 많이 끄덕이고 납득하며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와이즈먼의 탁월함인듯합니다. 페미니즘을 다룸에 있어서든, 과학기술을 다룸에 있어서든, 그는 시종일관 지금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현실들과 그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권력관계에 주목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읽는 저희 역시 각자의 경험들로 되돌아가 재해석하고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기술이라는 복합적 ‘권력-장’에서 젠더에 주목하기
와이즈먼의 접근법은 아주 신중합니다. 그것은 어떤 본질주의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고, 그동안 기술 논의에서 배제되어온 젠더관계를 살펴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초, 반도체 혁명과 더불어 점점 더 자동화되는 사회를 두고 여러 기술담론이 있어왔습니다. 여기서 와이즈먼은 두 가지 관점을 참고하여 나아갑니다. 하나는 ‘새로운 기술사회학’입니다. 이는 기술이 사회변화에 끼치는 영향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기술결정론) 그 반대의 경향, 즉 기술변화를 이끌어 내는 사회적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기술과 사회를 서로 갈마들고 있는 앙상블로 보아 그 역동성과 우발성, 복잡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페미니즘’으로, 설계부터 작동과 담론까지 기술이라는 영역에서 두드러지고 있는 젠더적 분업화와 위계화를 조명하는 담론들입니다. 단 기존의 페미니즘적 비판이 기반으로 삼곤 하는 보편적인 여성/남성이라는 전제에 빠지지 않고 각각의 구체적인 문화적(계급, 인종, 세대) 배치 속에서의 독특한 젠더 구성을 고려하려는 노력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적 페미니즘’의 접근을 수용합니다.
와이즈먼은 “기술 자체가 성별화 되어있다는 주장”(18쪽)을 핵심으로 삼고 있지만, 그 이유를 본질주의에서 찾지 않습니다. 에코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몇몇 페미니즘적 입장들은 여성성을 직관-감성-모성-자연친화로 연결시키면서, 남성성-이성-논리-지배-기술친화라는 이분법을 강화합니다. 이는 젠더가 계속 변화하는 문화범주라는 사실을 간과한 접근입니다. 과학에 대한 탁월한 비판이론들도 종종 풍성한 직관과 접속력으로 대표되는 “여성적 가치를 포함하는 과학을 요구”하며 “특유의 페미니스트 과학을 보편적인 여성경험의 특징들 안에 위치”시키곤 합니다. 와이즈먼은 말하죠.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들 모두는 여전히 생물학주의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38쪽) 그래서 그는 1장 전체를 섬세한 접근 경로를 만드는 데에 할애합니다. 어떻게 본질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과학과 기술 영역에서 ‘현행적인’ 그리고 ‘성차별적인’ 젠더 관계를 살펴볼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요.
“어떻게 하면 ‘기술은 남성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남성적인 것이다’라는 동어반복을 벗어날 수 있는가?”(61쪽)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1)기술은 본래 가부장적이라는 본질주의의 입장을 수용할 위험. 2)‘여성’과 ‘기술’ 범주의 역사적 가변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젠더관계의 구조를 보지 못할 위험. 와이즈먼은 “이 책에서는 제3의 길을 모색해 보기로 하겠다”(62쪽)고 말하는데, 그 방법은 클로즈업입니다. 즉 구체적인 역사자료로 접근하는 것이죠. 거기서 확인되는 것은 첫째로 역동성입니다. 기술(이론, 실천, 제품)은 ‘본래’ 가부장적인 것이 아니고 가부장적으로 조직되는 사회배치가 계속 투영되면서 그렇게 출현하는 것입니다.
2장부터는 기술배치에 대한 구체적인 클로즈업이 들어갑니다. 첫 번째는 임노동 영역, 즉 임금노동의 생산현장입니다. 여기서는 물론 자본에 의한 계급관계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맑스주의의 분석에 의거한 담론이 임노동 영역의 권력관계를 조망하는 절대적인 틀이기도 했습니다. 와이즈먼은 그 담론에서 기술운동에 역동성은 빌려오되, 그것이 언제나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왔던 젠더 관계에 주목하고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상을 본질이 아닌 운동으로 보기. 그러나 지배적인 운동학으로 환원하지 않기.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기술과정과 산업기계류의 설계는 압도적으로 남성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흔히 기계장비는 ‘평균적인’ 여성들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게 제조 조립”됩니다(103쪽). 하지만 와이즈먼은 이것이 의도적인 과정이라거나 음모인 것만은 아님을 말합니다. 이는 산업생산력과 관계가 있을 수 있고, 숙련 노동자를 생산하는 문화적 습속이나 교육적 배치와도 관련될 것입니다. 기술의 설계와 개발은 그 배치를 반영합니다. “새로운 기술이라는 형태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은 다름 아니라 공학자와 그 기계를 사용하는 노동자의 지식과 경험이다.” 그렇기에 기술과정에서의 젠더 비평형성은 기존의 권력형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형태는 늘 일방적이지 않고 복합적입니다. 거기에는 젠더적 이해관계뿐 아니라 계급적이고 인종적인 이해관계가 함께 얽혀 있습니다.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자본의 이해관계는 하나의 젠더로서 남성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03쪽)
우리들의 블루스 : 세대공감 젠더 수다?
와이즈먼의 문제의식과 방법들, 그리고 역사적 사례분석을 짚어 본 후 저희는 왁자지껄 저희들의 이야기를 꺼내보았습니다(어쩌면 와이즈먼은 이런 독서를 원하지 않았을까 저 혼자 생각해봅니다). 지난 시간 스티글레르의 텍스트처럼, 중년 샘들이 겪어온 시대에서 노동 영역에서 젠더적 권력 배치는 어떠했고, 또 요즘의 젊은 세대가 느끼는 배치는 어떠한지가 흥미롭게 섞여들었습니다.
동현샘은 솔직한 심정으로 임노동 환경만 놓고 보면 젠더적 차이가 이 책의 예시(19~20세기)처럼 큰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 모두 일을 하시고, 겉으로 보아서는 또래 친구들 중에도 성별에 관계없이 취직을 하고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제게도 들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업종별 고정 관념은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런 일은 남자가/여자가 해야지, 하는 분위기 말이죠. 선생님, 유치원 교사, 군인, 공학자, 간호사 등 성비가 확연한 직업군이 보입니다. 대학의 경우는 어떨까요? 기계공학 분야는 남성이 압도적입니다. 입학 비율부터가 분명하죠. 하지만 왤까요? 입학사정관에도 배우는 커리 자체에도 젠더적 위계나 차별성은 없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그것은 아마 사회적 분위기와 이미지(공대에 여자가!) 그리고 어느 정도는 향후 가게 될 직업 활동에서 유지되어 온 남성의 비율 등이 계속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복합적 요소들이 교육 단계에서의 선택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는 유아교육분야나 간호 분야로 가면 역전되어 나타나지요.
남순샘께서는 과학적 사고 및 사회 속으로 오래도록 놓여온 개념적 이분법들을 인상 깊게 읽고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문화 대 자연, 마음 대 몸, 이성 대 감성, 객관주의 대 주관주의, 공적 영역 대 사적 영역 등 각각의 이분법에서 전자는 후자를 지배해야 하고 그리고 각 이분법에서 후자는 체계적으로 여성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29쪽) 와이즈먼은 이 ‘이분법적인 젠더 비유’가 중립을 표방하는 과학적 사고 내에서 계속 작동해왔음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의미들을 반영하는 동시에 사회적 의미들을 재생산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이분법이 마치 자연스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남성과 여성을 훈육해왔습니다. 가정환경부터 학교교육까지 남녀의 정형서을 만들어왔지요. 남학생은 기술을 배우고 여학생은 가정을 배우고,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엄혹한 시절’이 존재했었습니다. 저희는 이런 가정과 학교와 일터를 가로지르는 이런 이분법에 기반한 담론들과 교육과정이 모두 권력장치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5남매 중에서 아들들이 아닌 딸이 설거지를 도맡아야 했는지는 지금 돌아보면 참 이상한 노릇입니다. 샘들의 시대에는 이런 이분법의 정형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제한했던 경험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파일럿이 아닌 스튜어디스를 꿈꾸고, 데이트할 때는 어떤 여성성의 미적 기준을 참조하여 긴머리에 구두를 신게 되는 경험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지금 우리시대를 돌아보게 합니다. 요즘 친구들은 어떨까요? 봄샘에 따르면 성적 고정관념은 덜하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부터 성평등 교육이 이뤄지고 기존 통념들에 반대하게 된다고 합니다. 다만 반면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 근거 없는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아주 복잡한(예상이 가능하면서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요소들로 인해 생긴 좋지 못한 감정 같은데요. 최근 뉴스에서도 보도된 폭력처럼 ‘페미’라는 용어(담론이 아니라 유형화)를 둘러싼 기이한 혐오가 보이는데요. 이것은 SNS와 커뮤니티의 악기능에 기반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희윤샘이 이야기했듯 이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와 담론에 대한 엄청난 오해입니다. 페미니즘은 본디 모든 억압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가령 끊임없이 근육질의 몸매가 좋은 것이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마르거나 퉁퉁한 몸을 걱정해야 하는 남성들 역시도 젠더적 억압 구조 속에 있으며, 페미니즘은 이 억압에도 반대합니다. 이 문제는 계속 고민하고 나눠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젠더적 차별은 계속 문제시되어야 하지만, 사실 차이 없는 평등은 이상합니다. 젠더적 문제가 소모적인 이권다툼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신체적 경험에서의 다름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할듯합니다. 가령 밤거리를 걷는 경험을 비롯해, 가정과 학교와 직장 그리고 재생산(성경험과 임신 출산 육아 돌봄)에서의 경험까지. 저희는 다음시간에 재생산 영역과 가사노동에 대해서 배웁니다. 그때도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4.27) 공지입니다.
- <페미니즘과 기술> 3장과 4장(106~191쪽)을 읽고 자신의 경험에 입각한 공통과제를 적어옵니다.
토요일 7시 규문각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