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느낌적으로 알고 있는 기독교적인 감성을 형성한 저자인 듯 합니다. 고백이라는 형식도 그렇고, 특히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심판하며 신의 권능에 의존하는 특유의 도덕적 태도도 그렇고요. 저는 이번에 《고백록》을 읽으면서 새삼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제게 기독교는 그저 유일신교의 대명사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목사님이신지라 명절 때 교회에 가서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 할아버지가 설교를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종교란 저런 거구나, 신을 믿는다는 건 저런 거구나’하고 생각했었죠. 불교의 문화도 이래저래 접할 수 있었지만, 기독교와 불교는 ‘종교’라는 이름 외에는 별 공통점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연구실에서 이슬람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른 유일신교, 다른 영성도 존재할 수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번에 《육체의 고백》과 《고백록》을 읽으면서는 기독교의 고유성을 좀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종교로서 기독교가 지닌 특징은 성경에 부여된 권위와 그리스도의 육화라는 교리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성경의 권위.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는 성경 자체가 진리로 여겨진다는 것이죠. 기독교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기 때문이라거나, 탁월한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라거나, 논리적으로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진리로 여겨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것이 핵심적이라고 말하는데,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그는 기독교의 교설이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증명될 수 없거나 아예 모든 사람들에게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믿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173쪽) 합리성의 외피를 쓴(?) 마니교의 가르침보다 덜 기만적이라고 느꼈다는 겁니다(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성경에 부여된 탁월한 권위는 “너무 연약하여서 우리 자신의 이성만으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174쪽)는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고대의 현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정념의 동요를 통제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이성에 기댈 수 있었던 반면, 기독교의 수도사는 그에게 가장 진실하거나 가장 신성해 보이는 관념들 속에서 확실한 도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의 사유구조에는 언제나 잘못 생각할 위험이 따른다. 분별력은 두 위험 사이에서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몸을 동요시키는 정념을 제어하는 이성의 훈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관통하는 환상과 착각을 피하려고 애쓰는 자기반성적 사유의 작업 속에 있는 것이다.”(미셸 푸코, 《육체의 고백》, 나남, 202쪽)
저는 푸코의 이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기독교의 수도사는 자신의 이성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매우 특출난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지식과 교양이 스스로의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이에 지식 자체에 대한 회의에 이릅니다. 이런 지점에서 그에게 굉장한 호소력을 지닌 것으로 보였던 게 바로 기독교인 것이죠. 왜냐하면 기독교에는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믿으라고 말하니까. 신은 원래 계산될 수 없는 존재이고, ‘주님에 대한 앎’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성을 연마하고 스스로의 관점을 확장하려는 노력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인식을 단념하는 것, 스스로의 판단을 포기하고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을 초과하는 신의 진리에 다가가는 길이기 때문이죠.
분명 지식이 그 자체로 우리를 구원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앎을 단념해야 하는 걸까요? 차라리 좀더 확실해 보이는 수행법 같은 것을 실천해보거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신에 대한 믿음에 의존하는 편이 구원과 해방에 다가가는 보다 직접적인 방법인 것은 아닐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분명 지식의 소유가 자유와 행복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사유 역량의 확장(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띠건,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건)과 무관한 방식의 구원이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나의 이해가 커지는 것과 무관한 해방이란 언제나 외부적 조건이나 타자에 대한 의존을 전제할 것이 자명해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대상적 차원의 지식을 회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탐구해야 한다거나, 피조물들에 대한 앎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앎을 향해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앎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에게 유효한 앎은 언제나 ‘관계적인’ 형식을 띤다고 말합니다. 외부 대상 자체에 국한된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 세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 우리의 실존이 놓인 조건을 이해하도록 하는 앎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음주에는 《고백록》 8, 9, 10장을 읽고 과제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푸코의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참고하시면 너무 좋습니다). 간식은 청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