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육신에게 명령하면, 육신은 거기에 즉시 복종합니다. 반면에,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하면, 마음은 거기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합니다.”(255쪽)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의 몸은 우리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손을 뻗고자 하면 손은 뻗어지고, 눈을 감고자 하면 눈꺼풀이 닫힙니다. 뭐, 물론 의지하지 않아도 눈꺼풀은 알아서 감기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다리가 떨린다거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려운 곳을 긁고 있다거나... 하는 현상들을 보면 우리 몸도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는 건 아닌 듯하지만요. 어쨌든 문제는 몸이 대체로 의지에 순응하는 것에 비해, 마음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욕망하는 바에 따라 움직이지만, 무엇인가를 마음대로 욕망하거나 욕망하지 않기를 결정할 수는 없지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은 언제나 마음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합니다.
의지에 반하는 의지와 마음에 저항하는 마음. 동요와 방황을 겪을 때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게 됩니다. 어째서 우리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나쁜 것을 행하는가!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올리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이런저런 핑계로 일을 미루게 되는지(^^;)! 아우구스티누스로 치자면, 어째서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하게 그를 붙드는 것인지? 아우구스티누스는 놀랍게도 이러한 의지의 분열과 마음의 불복종이, 결국엔 돌고 돌아 우리의 의지의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있게 된 것도 내가 원했기 때문”(244쪽)이라는 거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원수 마귀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까닭으로 우리의 의지는 뒤틀리게 되었고, ‘뒤틀린 의지’로부터 ‘정욕’이 생겨났고, 계속해서 정욕을 좇다보니 ‘습성’이 만들어졌으며, 습성에 대적하지 않았더니 ‘필연’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의지’가 이토록 무력하고 미약한 것은, 우리가 그동안 살면서 쌓아온 굳건한 습관 때문이고, 이러한 습관이 형성된 것은 결국 최초에 우리가 악마에게 우리의 의지를 내어줬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의 의지는 이렇게 나약하고 쉽게 유혹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죄, 그리고 그 죄로부터 탄생한 후손들인 우리는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요.
그렇지만 여기에는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구원이라는 사건은 신으로부터 비롯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분열된 의지에 신음하던 그는 ‘펼쳐서 읽으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드라마틱한 회심을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구원이라는 것이 이토록 의존적이고, 자기 부정적이며, 스스로의 과거를 완전히 심판해버려야만 이를 수 있는 것일까요? 인간은 스스로 깨달을 수는 없는 존재일까요? 이런 의문들이 들었습니다. 자기 포기가 아닌 자기 구원의 길. 이러한 길을 마련하려면 좀더 섬세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섬세해진다는 건 ‘선’, ‘악’으로 퉁쳐버리지 않고 우리의 삶의 조건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보면서도 나쁜 것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조건. 선과 악이 아니라 필연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필연성 속에서 우리 자신을 이해할 때 우리는 악한 것들을 잘라내고 선한 것으로 향한다는 식의 단순한 관점에서 벗어나서, 외부의 원인들에 일방적으로 좌우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행위를 구성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러한 의미의 구원은 모든 것이 기대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백록》을 끝까지 읽고 만납니다. 세미나 일정이 변경되었습니다. 원래 읽기로 했던 텍스트들 가운데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는 읽지 않구요,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을 2주에 걸쳐서 읽습니다. 그럼 금요일에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