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고백록》을 끝까지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고백록》의 마지막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인사가 아니라 신학적 논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네요. 어째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는 ‘개심’과 함께 끝나는 걸까요?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상은 ‘집어 들고 읽으라’는 신의 음성에 갈등과 방황을 끝마치고 극적인 개심을 이뤄내는 것으로 끝납니다. 마치 뻔한 드라마들이 온갖 역경과 오해를 겪어내고 주인공들이 사랑에 골인하는 것으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것처럼. 그렇지만 제가 궁금한 건 ‘그 다음’입니다. 주님 품에서의 삶은 어떤지, 여전히 죄와 번민 속에서 살고 있는지, 어떤 점에서 이전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나 삶의 태도가 달라졌는지, 여전히 막막한 지점은 어디인지. 요런 것들이 궁금한데,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요. 핵심은 이겁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신의 선한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는 것.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과 땅은 그 자신의 존재와 관련하여 아무런 공로가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창조를 위한 재료들까지도 직접 창조했습니다. 중요한 건 신이 피조물들을 ‘필요로 해서’ 창조를 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는 데 피조물들을 필요로 했던 것도 아니요,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것도 아니요, “오로지 주님의 저 풍성하신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창조하신 것”(458쪽)입니다. 이에 따라 전적인 의존관계가 확립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는 원인은 그것들 바깥에 있습니다. 그것도 오로지 선하신 신의 무사무욕한 의지에 달려 있지요.
저는 이 말이 조금 섬뜩하게 들렸습니다. 신이 사랑으로, 선하심으로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은 아름다운 말 같습니다. 그런데 좀더 생각해보면, 이는 피조물들 자신 안에서는 그것들이 존재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그 존재의 의미도 찾을 수 없고 오직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상정해야만 이 세계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은 신뿐이고 주님에 비하면 이 우주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게 이 우주를 절대자에게 헌납하는 정신적인 희생 제의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존재의 원인과 근거를 그 외부로부터 찾을 것인가 그 내부에서 설명해낼 것인가. 이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존의 충분한 원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것들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존재가 성립하려면 전 우주의 운동이 개입해야만 하죠. 그런데 이것은 ‘의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다른 모든 것들의 실존에 개입하고 참여하고 그것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이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로 살아가고 있지만, 또 그러한 관계망 안에 하나의 원인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많은 원인들 속에서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 실존하고 행위하도록 규정되고 있다는 것. 이는 우리의 실존이 지닌 의존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필연성과 완전성을 입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다음 시간에는 《요한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은성)을 ‘담화 5’(~172쪽)까지 읽고 과제를 써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미영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