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직전에 읽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교부 철학’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주류 작가라면 카시아누스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활동한 비교적 덜 알려진 수행자였습니다.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역할’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한 라틴 교부들과 펠라기우스 학파 사이의 논쟁에서도 카시아누스는 “인간 구원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 필요하지만, 그 은혜를 수용하는 여부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렸다”라는 중도적 입장을 표방하였다고 합니다. 《담화집》은 카시아누스가 친구 게르마누스와 함께 수도원 운동이 꽃피운 이집트로 유학을 떠났을 때 만난 스승들과의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반인들을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수도 생활을 결심한 사람들을 위한 담화들이 주를 이루고 있죠. 수도사의 목적과 목표는 무엇인지, 금욕에는 어떠한 층위들이 존재하는지, 어떠한 악덕들을 조심해야 하는지 등등의 주제들이 수도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조언의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라고 행해야 합니다. 독수도생활도 이것을 위해 추구해야 하며, 금식·철야·노동·궁핍·독서 등의 덕행도 이것을 위해 행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해로운 정념에 물들지 않은 마음을 획득하고 보존하기 위함이요, 또 이러한 조처들을 취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함입니다.”(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은성, 37쪽)
저는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목표와 목적에 대한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수도사가 추구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는 마음의 평정, 정념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수도생활의 근본적인 목적은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카시아누스는 금욕수행 자체에 집착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전달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행들은 마음의 평정과 사랑이라는 목표 및 목적을 위한 수단들인데 수도사들이 그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게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카시아누스는 여기서 규약과 주체의 관계가 아니라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에 구원의 문제가 달려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책 초반부에서 언급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카시아누스에 의해서 궁극적 목표로 언급되고 있는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랑이라는 말은 마법 같습니다. 매우 모호하기도 하고요. 플라톤이 말하는 창조주는 피조물들이 자신과 같은 완전한 상태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주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신은 ‘사랑으로’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죠. 사랑이라는 이 숭고한 단어에는 대체 무엇이 숨어 있을까. 어째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우정과 지혜와 절제 같은, 비교적 사람을 혹하게 하는 힘이 더 적은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 단어들, 가치들이 중심에 놓였던 반면에 기독교의 시대가 오면 사랑이라는 저 아름답고도 거창한 말이 꼭대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갖고 카시아누스를 읽게 되었습니다. 아직 명확한 답은 없지만 계속 읽어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담화집》을 370쪽까지(담화 12까지) 읽고 과제를 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소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