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세미나를 마지막으로 작년 2월에 시작한 ‘성의 역사 세미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거의 꽉 채워 1년을 푸코의 《성의 역사》와 함께 했네요. 《성의 역사》 1, 2, 3, 4권과 푸코가 2, 3, 4권에서 다루는 텍스트들까지. 이 어마어마한 책들을 소화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세미나였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이 책들은 한 번만 읽고 말 책들이 아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요. 뭐랄까 저는 《성의 역사》 시리즈와 첫인사를 나눈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대략 어떤 내용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푸코가 어떤 개념적 도구들을 다루고 있는지를 파악했고, 이제 남은 것은 푸코를 계속 공부하면서 이번 ‘성역 세미나’를 통해 훑고 지나간 내용들을 다시 소환하고 새로운 고민들 속에서 재조합하며 실제로 ‘사용’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최근 들어 올해 푸코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한 사전 공부를 슬렁슬렁 하고 있는데요, 그 중 어느 책에서 인용된 《광기의 역사》의 한 구절에 따르면 푸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고고학’을 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언어, 우리 시대의 상식으로 동일화된 연속적 역사를 서술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상식을 동어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식에 의해 음소거된 목소리들을 발굴하는 것이 푸코의 작업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갇혀 있는 상식이라는 이름의 어항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서요. 이렇게 보니 《성의 역사》의 흐름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권에서 푸코는 ‘성’의 억압과 해방을 둘러싼 소음들 속에서 조금도 의문시되고 있지 않은 ‘성’이라는 개념이 어떤 본질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앎의 배치의 형성과 부르주아 가족 같은 장치들의 구성 속에서 만들어진 ‘관념적 실체’임을 밝혔습니다. 2, 3, 4권에서는 ‘성’을 둘러싼 주체와 진실의 상이한 구성들을 보여주었죠. 푸코는 성을 중심으로 서양 근대의 내부와 외부로부터 침묵의 고고학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성의 역사》의 논점을 놓치고 있다는 초조함이 있었습니다. 푸코는 왜 고대로 간 걸까? 성이 관념적 실체라는데 그러면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타동 주체화와 능동 주체화가 무엇인지,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면 좋을 텐데... 그런데 아마도 푸코는 상식으로부터 멀리 나아가기 위한 도구들과 재료들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성의 역사》 2권에 이르러 푸코가 고대로 향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문체가 매우 단순해졌다는 것은 중요해보입니다. 푸코는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와 동시에 ‘다르게 존재하기’를 시도해야 함을 느낀 것이 아닐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자명성에 구멍을 내는 것만으로는 ‘다르게 존재하기’를 시도하는 데 막힘이 있음을 느낀 게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의 상식 바깥에 있는 주체성의 예시들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해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의 방법론을 통해 동양의 텍스트들을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궁금함도 생기고요. 아무튼 푸코를 마음껏 사용하자면 우선 그의 방법론을 체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는 그 공부에 전념해보아야겠습니다.
아무튼, 5학기까지 ‘성역 세미나’를 모두 마쳤습니다. 분명 미진한 부분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성의 역사》를 한 번 읽어본 것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아래는 세미나를 함께 한 선생님들의 마무리 소감입니다.
<후남샘>
5학기를 마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하느님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약한 존재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영적인 피조물이 선하고 지혜롭기 위해서는 주님을 꼭 붙들고서 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구원은 ‘자기포기’를 통한 절대 복종에 의해서만 실현될 뿐이다. 스스로 행위 하는 문제는 배제된다. 이는 근대인이 주체화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성역 세미나를 마치며
권력은 불평등하고 유동적인 관계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행사(성의 역사 1권, 110쪽)되는 작동중인 힘이다. ‘권력은 생산한다.’ 내게 권력은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것이었다. 여성이라는 나는 이 사회 속에서 피해자였고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무기력함이 팽배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에 맞서 저항하는 것으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푸코에 의하면 이는 억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우리의 욕망이나 쾌락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의 문제를 볼 수 있을 때에 다른 삶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사유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저항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는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삶의 조건을, 배치를 신중하게 분석하는 만큼 이와는 다르게 살아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푸코는 <성의 역사> 2, 3권에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로마인의 삶을 통해 이들이 자신의 삶을 조형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에게는 욕망도 쾌락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것이 고백이라는 제도를 통한 기독교의 주체화와 우리 근대인들이 주체를 구성하는 것과 다른 쾌락의 활용과 관계된 주체화 양식이다. 고대인들의 삶의 양식은 어떻게 자기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능동적인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중요했다. 뭘 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행위를 할 것이냐를 고민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행위를 하는데 따르는 자기 훈련의 과정은 필수였다. ‘쾌락의 활용’이라는 문제가 더 많은 쾌락과 더 많은 경험을 하는 것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나의 쾌락과 욕망을 어떻게 구성하고 절제하면서 능동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지가 이들에게는 관건이었다. ‘새장 속의 새는 다른 사람에게 억압받고 있어서 문제가 아니다. 남들에 의해 길러질 뿐, 스스로 뭔가 해 볼 여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채운 샘 강의)
<난희샘>
성역 세미나를 마치며
2021년 푸코의 역작 ‘성의 역사’ 전권을 부천의 비움샘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제 발로 규문을 찾아 처음 푸코 세미나에 합류하게 되었을 때부터 인연 맺어 온 비움샘들, 햇수로 근 3년 정도 길벗이 되어 함께 걸었죠. 많이 ‘비워진’ 샘들이어서 그런지, 저는 비움샘들에게서 따뜻함이랄까 넉넉함이랄까 이런 걸 느꼈습니다. 비록 공부는 나간 듯 만 듯 우리 모두 총체적으로 지지부진했지만 그래도 중단하지 않았고, 그 와중에도 간식은 늘 풍성했었죠. 형형한 눈빛의 푸코와 되도록 어렵게 말하는 그의 저작과 다채로웠던 우리들의 간식,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아무튼 지나고 보니 좋았습니다.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을 처음 읽으면서 만난 푸코는 제게 한마디로 두통 유발자였습니다. 수원평생학습관에서 채운샘께 푸코 강의를 들었을 때 지~~잉하고 지나갔던 충격을 붙잡고 푸코를 만났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더 모르겠고, 중간중간 채운샘께 정리 강의를 들었을 때는 아, 맞다, 그거다 하고 무릎을 치고는 돌아서면 또 모르겠고, 때려치우기에는 푸코가 너무 매력적인 남자고, 갱년기에 이 무슨 바람인지!
‘성의 역사’, 푸코는 이 인용부호에 나름의 중요성이 있다고 했어요. 푸코는 ‘성’, 대단히 일상적이고 극히 새로운 이 개념 앞에 멈추어 서보고자 했다면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이 자명한 ‘성’이란 것에서 비껴나 그것과 관계된 이론적. 실천적 배경을 분석하고자 했다는 겁니다. 즉 성의 역사의 키워드는 성이 아니라 성을 둘러싼 권력이라는 것을 명심하려고 합니다. 나의 표상 속 ‘성’은 근대적 성이고 그것은 19세기 초에 뒤늦게 등장한 개념 더하기 내 일상 속 미시적 권력의 테크닉, 즉 장치 (일리치의 ‘제도’와 같은 의미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속에서 만들어진 ‘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의 역사’를 욕망인의 계보학이라고 했던 푸코의 정의를 다시 떠올립니다. 저도 그동안 ‘성’하면 바로 욕망이 떠오르고 그것은 은밀하고도 사적이고 어두운 이미지와 연결시켰거든요. 그리고 그 ‘성’의 진원지인 육체를 두려운 무엇으로 여겼던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비대한 내면을 지닌 주체가 되었는지를 푸코 보살이 그 방대한 작업을 통해 짐작케해주었지요. 푸코를 공부하면서 제가 달라진 게 있다면 욕망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과 욕망할 때 하더라도 그것을 죄악시하지는 않게 됐다는 점이랄까요. 다르게 욕망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에게 충분하다는 해방감을 맛보았달까요. 그래서 저는 망설임 없이 다시 한 번 더! 푸코를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아마도 또 헤매겠지요.
두 문단 정도만 쓰려고 했는데, 좀 더 붙이자면, 다섯 학기의 세미나 중에 고대와 중세 기독교 교부들의 텍스트도 읽었네요. 아마 푸코가 아니었다면 제 인생에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를 텍스트들이었습니다. 세네카. 히포크라테스, 플루타르코스를 거쳐 기독교 성인이라는 아우렐리우스의 고백록과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을 읽었죠.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저작을 읽으면서 ‘성’이 어떤 조건 속에서 진실의 관건으로 자리 잡아왔는지를, 우리가 아는 ‘성’이 고대인들에게는 쾌락과 관계 맺는 방식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저는 기독교에서 성인이라 받드는 아우렐리우스의 고백록이 픽션 중의 픽션 같이 느껴졌습니다. 읽기가 대단히 거북했습니다. 반면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을 읽으면서 영적 수행의 팁이 가득하구나,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왜 그토록 인류에게 먹히는지, 나름 거대한 영적 보고라고 느낀 한편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유의 메커니즘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올해 푸코의 초기 저작인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니체와 연결시켜 좀 더 세밀하게 사유를 훈련해갔으면 좋겠습니다.
<장청샘>
5학기를 마치며
푸코의 ‘주체화’의 능동성에 꽂혀 있었던 때문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키시아누스의 『담화집』을 읽는 내내 참으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설득력 있는 것 같은데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귀결되는 패턴이 반복되자 지루하고 고문이 따로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바람에 기독교적 윤리가 주체를 형성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가는지 제대로 파악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내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어쨌든 집중이 안 된다는 이유로 게으름을 많이 피웠다. 앞으로 이 책들을 다시 볼 시간이 있기는 할는지. 그러나 다시 읽으라고 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ㅠㅠㅠ
성역 세미나를 마치며
나는 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성역’을 1년간 공부를 했지만 여전히 ‘성’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고 보니 막막한 느낌이다. 40여 년 이상 결혼 생활을 해왔으니 뭔가 한마디쯤 할 수 있을 것 같은 데도 그렇다. 이것은 평소 그만큼 성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 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감추고 외면하려 들었던 것일까. 성적 욕망은 식욕처럼 자연스러운 욕구이며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 ‘성’ 그 자체에 대해 진지하고 솔직하게 마주해 본 순간이 있기는 한가?
나만 그런 건 아닐테지만 성은 그만큼 모호하고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운 영역이었다. ‘성역’을 공부하기 전까지 입 밖에 내어 말해보거나 성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다. 성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 해봐야 여기저기 출처 불분명한 곳을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이 전부다. 사회가 주입해준 성은 그랬다. 순결하고 성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반면 불결하고 더럽고 수치스럽다고 하는 모순되고 이중적인 것이었다.
이런 정도의 앎을 가지고 고대인에 비해 현대의 성 의식 수준이 진보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가운데 접한 것이어서 고대인들의 성에 관한 관점은 조금은 충격(?)처럼 다가왔다. 고대인들의 성은 멋대로이고 무질서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성은 각자의 조건에 따라 적절하게 조절하고 관리해야 하는 양생술이었고, 성을 쾌락을 활용하는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고대인들에게 성은 사회가 정해준 규율적 이데올로기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체 스스로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실천하는 ‘존재의 기술’ 차원이었던 것이다. 무지할 거라고 생각했던 고대인의 성이 현대인보다 오히려 더 진화된 성 지식과 성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의외였다.
사실 성은 인간의 삶에 있어 중요한 일부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고대와 같은 성 지식과 성 윤리가 있기는 한가? 성적 관계는 신체적 접촉뿐 아니라 정서를 교감하는 일이다. 성적 교류란 몸과 마음이 오고 가는 일이다. 그러나 성이 대상화되고 상품화된 현대는 상대에 대한 배려나 감성적인 소통과 같은 인터페이스 없이 직진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그 증거가 n번방과 같은 왜곡된 현상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많은 청소년들이 이처럼 말초적 쾌락을 추구하는 포르노같은 영상 매체를 통해 성 지식을 습득한다는 데 있는 거 아닌가. 이런 풍토 속에서 성을 도덕 속에 가두고, 법으로 심판하고, 실용적인 성교육을 강화하는 것으로 성 윤리가 확립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성 윤리란 무엇일까?
각자의 성 윤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이득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대인들처럼 스스로에게 적절한, 과도함을 피하고 절제된 성생활을 정립하고 실천하는 일. 내 몸을 관리하는 유용한 방법은 어떤 실천이 좋을까를 구체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내 몸을 돌보는 일. 이것이 능동적인 성적 주체로서의 실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 자신과 관계 맺기, 존재를 조형하기 위한 실천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것은 결국 철학적 성찰로 이어지는 공부가 우선되어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다.
<소현샘>
5학기를 마치며
저에게는 쉽지 않은 5학기였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와 카시아누스가 전하는 이야기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그 절정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자신이 인지하지도 못했던 과거 유아기의 잘못까지 낱낱이 꺼내어 하나님께 읊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들의 이야기와 푸코를 이어나가야 하는데 늘 푸코는 실종상태였습니다.(^^;)
성역 세미나를 마치며
푸코는 처음부터 자신의 관심사는 ‘주체화’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의 전제와 다른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기독교까지 넘나들며 주체화를 파고듭니다.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주체화가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 푸코가 말하는 주체화는 바로 자기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자기역량 강화를 위해 나와 관계하는 사물에 대한 앎이 중요했습니다. 넓게는 우주의 이치를 좁게는 자신의 습관을 살피고 알아가며 관계적인 삶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모든 잘못을 하나님에게 고백하고 용서받고 구원받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하면 언제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메커니즘을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능하게 만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도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모든 문제는 자본이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고 있죠. 자본보다 돈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돈만이 우리에게 자유로운 삶을 보장한다고 믿습니다. 돈만 있다면 과학과 기술이 만든 것을 소비하며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오직 하나님, 지금을 사는 우리도 오직 돈. 나와 관계하는 사물들이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관계가 단절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해도 무엇이 원인인지 찾을 능력이 없어졌습니다.
<미영샘>
5학기를 마치며
기독교 초기교부들의 저서들은 신앙적 내용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 부대끼는 것이 많았다. 우선 종교적으로 너무 모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비판적 시선으로 보게 되니 책이 좀처럼 잘 읽혀지지가 않았던 것. 푸코의 ‘성의 역사’에서 논점으로 잡았던 것들에 대해 연속성있는 연계 공부를 했다면 원래의 취지대로 확장되고, 깊이 있는 공부가 되었을텐데 하는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초기교부들이 얼마나 진실하게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펼치려고 했는지 자기고백의 과정은 영성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를 분석하고 카시아누스는 육체의 정절과 마음의 순결을 위한 묵상의 방법을 고안하였다. 정념에 따라 변화하고 예속되는 존재,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한 앎은 영원한 사랑의 본질인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방식으로 나간다. 다함없는 복종과 믿음의 실천, 초기교부들은 복종-구원의 관계를 체계화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과 의식을 끊임없이 탐구한다. 나약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선악의 명확한 구분과 악마의 유혹을 극복해야 하는 구도체계가 형성되었다. 인간의 노력에서가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맡기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감시하는 수동적 주체로 형성되는 것이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왜 고단한 몸을 이끌고 의지하고자할까. 이상세계, 유토피아가 눈앞에서 잡힐 듯이 그려진다면 나 역시 순간 잡고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놓인 조건을 정확히 바라보고 싶고, 삶의 다양한 경험과 관계를 통해 앎의 지혜를 터득하는 기쁨이 더 나를 매혹시키니 그 유혹에 빠지고자 한다.
성역 세미나를 마치며
1. 앎의 의지, 2. 쾌락의 활용, 3. 자기배려, 4. 육체의 고백, 이렇게 이어지는 <성의 역사> 전권을 다 읽다니! 푸코는 ‘성’을 문제화하는 역사연구의 ‘시도’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기존의 개념을 해체하는 위험하고도 위험한 철학적 훈련과 같았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철학자가 자신의 질문을 풀어나가기 위해 고문서를 뒤적이며 근거를 찾고, 추론을 해나가고, 새로운 개념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과정은 그 자체로서 공부가 되었다. 공부의 태도뿐만 아니라 당연하다고 믿었던 개념들의 일반성 아래에 살아왔던 내 삶의 태도까지 고민하게 하였다. 그는 각각의 현실에 실재하고 인정되는 구체적인 실천과 경험들 속에서 ‘양식화’하는 방식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제안되어 왔는가를 계보학을 통해 우리에게 펼쳐보였다. 현재 우리가 무수한 담론을 형성하며 ‘성’이라 이름붙이고 특권화한 것은 19세기에 형성된 성장치에 의한 것이며 이전에는 차원이 다른 진실과 주체(혹은 육체)의 문제였다는 것. 우리는 주체가 성의 진실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변화되어왔는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고대로, 기독교로 이동하는 푸코의 여정을 숨가쁘게 따랐다. 자기자신과 육체와의 관계에서 자기배려, 가장으로서의 가정관리술, 타자와의 관계에서 해방의 연애술 등 ‘삶의 기술’로 형성되고 있는 지식-권력-쾌락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철학과 헬레니즘의 스토아철학에서 자기배려라는 특별한 자기인식의 방법을 알게 된 것이 반가웠다. 그들의 쾌락의 윤리는 자기수련을 통한 적절함의 절제를 활용하는 태도인데 우리시대에는 찾아볼 수가 없는 쾌락의 방법이다. ‘어떻게 내가 나와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나갈 것인가, 어떻게 자연과 세계와의 적절한 관계로 나를 변형시켜나갈 것인가’라는 “존재의 기술”은 지금의 나에게도 반드시 물어야 할 중요한 문제다.
<혜원>
5학기를 마치며
5학기나 있는 성역세미나, 이걸 완주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습니다... 5학기에는 특히 <성의 역사>에 나온 책들을 직접 읽을 수 있었는데요, 직접 읽어보니 푸코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도대체 이 책들에서 어떻게 그런 사유를 길어 올린 것인지? 푸코 특유의 역사학에 다시 한번 놀랐네요. 5학기에는 특히 <고백록>을 읽으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세련되고 정제된 언어로 오직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데 온 힘을 다 쓰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죄의식이라는 게 탄생하는 거구나...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성역 세미나를 마치며
성역세미나를 하면서 자기 진실성이라는 것이 정말 다층적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휩쓸리는 것인지, 그걸 구별하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혜샘>
5학기를 마치며
어쩌면 나는 유일한 현재 진행형 기독교인이었을텐데, 나의 이런 입장은 세미나를 함께 하는 학인들보다 조금 더 입체적이고 실질적인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그 하나는 철학과 기독교라는 두 가지 입장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도 교회의 타락(?)과 고민없는 견고함이 만들어내는 배타성을 넘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글을 신앙(곧 믿음)의 관점이 아니라 서양인의 인식에 뿌리내린 인식의 출발점으로서 읽어 보고자 하는 노력은 진짜로 낯설고 힘들었다. 그리고 서글펐다. 고대 교부들은 참 많이 애쓰고 노력하면서 기독교를 만들어 가는 정성과 지금을 비교하면...... 함께 하는 샘들들 덕분에 내 고민들을 추려낼 수 있었다. 내 문제로 안고 넘어갈 것들을 더 추리고 방법을 찾는 것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일은 다시 내 몫이지만.
성역 세미나를 마치며
성의 역사 전체를 읽는다!가 이번 세미나의 모든 것이지 않을까? 혼자라면 이번 생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하니까. 앞 뒤 안 재고 덤볐고 함께라서 끝까지 왔고 여튼 다 읽었다.
후기를 읽고보니 제가 우리의 간식은 풍성했으나 공부는 총체적으로 지지부진했다고 썼던 것이 오해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지부진은 저만의 일이고 샘들은 훌쩍 한걸음 나가신 듯 해요. 잘 읽었습니다. 올해도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난희 샘, 전 지지부진했던 것 맞아요. ㅋ 일리치 글쓰기 핑계 대고 책을 제대로 읽어 오지 못할(않을)때도 자주 있었는데 샘들 덕분에 묻어서 왔네요. 과제물 빼먹을 때가 참 많았는데 어쨌든 "반쪽이라도 쓰자!" 를 올해 목표로 삼아야겠습니다^^
샘들의 후기릴레이를 읽으니 우리가 대장정을 걸은 느낌이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푸코의 맥락을 잃지않고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며 이끌어 간 건화샘 고맙고요, 우리들의 논의는 늘 사방팔방 흘러흘러 어디론가 갔지요^^ 동양사상과 불교, 니체와 맞닿는 내용을 연결해서 풀어주신 난희샘과 혜원샘 덕분에 다양하게 생각하며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올 한 해도 비움동학들과 함께 푸코의 섬세하고도 치밀한 방식의 공부 즐겁게 해요~! 작년에는 '뭐라도 쓰자'였다면 올 해는 '내 생각을 쓰자'입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미진한 공부를 마치고 후기를 올려습니다만, 그 미진함을 릴레이 후기로 나누니 또 나름 좋네요. ㅎㅎ
건화샘, 마지막까지 애 많이 쓰셨네요!
중심 잘 잡아줘서 여기까지 왔어요.
진심 고마웠구요,
비움을 애정해주시는 난희샘~ 샘과 인연이 햇수로 3년이나 되었군요. 샘과 함께 하는 올해도 기대가 되네요.
따뜻함과 넉넉함 그리고 좀더 깊어진 사유로 또 함께 길을 나서 보아요~!^^
세미나 함께 했던 모든 샘들, 고마웠구요~
올해도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