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下 첫시간이었습니다. 下권에서는 서민대중의 급진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쭉 펼쳐질텐데요, 오늘은 급진파 웨스트민스터 위원회와 노동자들이 중심인 비밀조직, 그리고 데스파드 사건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위원회와 검은 램프단, 러다이트 운동이 급진주의로 묶여있어 얘기를 나누다보니 섞여버려서 혼란이 좀 있었습니다. 이런 혼란 때문인지 톰슨도 급진주의에 대해 설명을 해두었라구요. 그는 ‘급진주의’라는 용어는 운동에서 폭넓음과 부정확성 모두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1790년대 자꼬뱅들은 『인간의 권리』와 어떤 형태의 공개적 조직에 대한 헌신에 의해 명확히 식별되었다면 19세기가 진전되면서 급진주의는 아주 다양한 경향들을 포괄하게 됩니다. 이 다양한 경향들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1.웨스트민스터 위원회
1802년 나폴레옹은 세습 황제로서 지위를 수락하고 프랑스의 종신통령이 되면서 영국의 급진주의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영국 급진주의자들은 나폴레옹을 공화주의적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았으나, 점차 그가 권력을 독점하고 제국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영국의 급진주의자들은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국내의 개혁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큰 스피거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반자꼬뱅파였던 코벳이었습니다. 언론을 매수하고 온갖 부패를 일삼는 피트내각을 향해 코벳은 강력하게 비판하며 나섰습니다. “내각은 비능률적이고 부패했으며, 궁정의 아첨꾼들, 기생충 같은 인간들, 연금수령자들, 매수된 상원의원들, 큰 업자들, 납품업자들, 투기꾼들, 권력 브로커들, 장관들의 무리를 먹여살리고 있다.(……) 전쟁으로 살찐 벼락부자 신흥 부유층은 왕의 권리와 인민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오직 자유로운 영국만이 외국의 침략에 저항할 수 있다”며 그는 토리주의와 급진주의의 기묘한 뒤범벅으로 개혁파가 아닌 내각을 향해 맹공을 퍼붓습니다.
코벳은 선거권으로 저항의 뜻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소수 귀족들이 늘 차지해왔던 의석을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힘으로 의석을 얻고 싶었던 것이죠. 웨스트민스터는 토지재산 조건 없이도 선거권을 가질 수 있는 선거구로서 대다수 장인 마스터들과 일부 직인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하는 호주선거권이 주어진 곳입니다. 그는 유권자들에게 “스스로의 독립을 주장해야 하고 복종심과 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806년 보궐선거에서 코벳은 버뎃에게 엄격한 선거방식을 요구했습니다. 요구사항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뇌물수수와 향응의 완전금지, 당선되어도 결코 공직과 공적인 돈을 받지 않겠다는 엄격한 서약이었습니다. 버뎃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함은 득표를 반감시키는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1807년 총선은 개혁파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습니다. 의회 의사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유일하게 민중적인 선거구인 웨스트민스터에서 개혁파인 버뎃과 코크린이 승리한 것입니다. 이 승리에서 얻은 것은 중요합니다. “‘독립’이란 개념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독립은 부 내지는 토지에 대한 이해관계와 동의어”였습니다. 토지나 부가 있어야만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거죠. 그러나 이제 독립 개념은 달라집니다. 자유토지보유자든 직종인이든 혹은 장인이든 유권자라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복종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이 민중의 의무가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선거구는 유권자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새로운 종류의 선거조직이 발휘하는 효과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후보자와 함께 독립적으로 승리를 조직해냈던 만큼 웨스트민스터의 서민대중은 그들을 스스로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톰슨은 또 하나를 짚고 넘어갑니다. 웨스트민스터 위원회가 독립적 민중운동을, 나아가 노동계급의 운동을 주도한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런던의 급진주의자들은 평민적 운동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불의를 바로잡는 군단
자꼬뱅파 지식인들을 장인과 노동자로부터 분리시키고 운동의 다른 경향성을 생겨났던 이유에는 피트내각의 강압적인 박해가 있었습니다. 검은 램프단은 중앙 집중적인 조직 구조를 갖춘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지역(북부 공업단지, 미들랜즈)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한 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자신들의 활동을 숨기기 위해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지하세계의 네트워크를 형성한 비밀활동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존 역사가들은 노동자들의 지하조직을 환상이나 상상으로 취급했지만, 톰슨은 너무 많은 사료들이 남아 있어 실제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데스파드 사건이 노동자들의 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얘기를 나누었는데요, 上권에서 엄청난 분량으로 우리를 혼돈에 빠뜨렸던 5장 자유의 나무를 살짝 되짚어보면 영국의 최대 혁명적 전조는 1797년 해군폭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해군폭동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을 받은 배경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에 영국 해군은 프랑스와의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있었고, 장기전이 되면서 해군의 보급선이 어려움에 놓였습니다. 그 결과 해군 선원들의 근무 조건과 삶의 질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구요. 장시간의 근무, 열악한 생활 조건, 비인간적인 징계 방법 등에 대해 심각한 불만이 자신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집단적 폭동으로 표현됩니다. 물론 이 폭동은 해군의 근무 조건 개선으로 이어졌지만, 피트 내각은 혹시 이로 인해 다른 폭동들로 이어질까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그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전쟁기간중에 어려움은 해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식량기근과 곡가폭등으로 인해 1800년과 1801년에는 영국 전역에 걸쳐 식량폭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피트내각은 더욱더 강력하게 억압을 지속하였고 이러한 선상에서 데스파드 사건이 일어납니다.
데스파드는 아일랜드인이며,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군으로 참전했으며, 이후 온두라스에서 영국 식민지 관리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온두라스에서 현지 주민의 권리와 복지를 개선하려고 시도했으며, 그들과의 공정한 거래와 상호 존중을 중시했습니다. 이런 방향성은 정부와 갈등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결국 직을 잃습니다. 이후 런던으로 돌아온 데스파드는 급진적인 정치 신념을 품고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깊이 우려하며, 영국 내에서 정치 개혁을 추구하며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예의주시하던 정부는 데스파드에게 영국 정부를 전복하고 조지3세를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1803년 사형을 내립니다. 그러나 톰슨은 데스파드 사건에는 어떤 특별한 증거가 없다고 말합니다. 피트내각의 불안함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데스파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사형은 당시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정부의 의도와 달리 데스파드의 사건은 오히려 정부에 대한 비판과 반정부 감정을 더욱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급진주의 비밀스런 움직임을 와해시키고자 했던 결사금지법도 노동자들의 비밀조직 형성을 더 결속시키는 작용을 했습니다.
다음주에도 <불의를 바로잡는 군단>에 대해 계속 얘기해보아요.
이번 시간에도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끊이지 않고 씨줄날줄처럼 역사를 엮어가는 것 같았죠. 나뽈레옹 제정의 여파가 영국 개혁세력 자꼬뱅주의를 약화시켰나하면, 그러한 힘이 뱡향을 바꿔서 국내 당면한 정치부패와 생존권을 위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자는 급진주의적 요구가 되었다는 것, 보수출신언론인이 개혁적 스피커로 변신하는 모습도요.런던을 중심으로 합법적 저항의 선거개혁이 일어난 것과 대조적으로 노동자들이 밀집한 북부공업지역은 저항의 움직임들마다 불법화했다는 것도요. 강력한 탄압과 정부스파이 침투로 와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비밀지하조직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일방적으로 편향된 사료들 속에서 금맥을 찾아 민중의 삶을 엮어가는 톰슨의 저력도 놀라웠고요^^ 소현샘 꼼꼼한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