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시대』 에릭 홉스봄 (4~7장)
혁명 이후 유럽이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이 통치를 하고 있었던 이 시기에 일어난 여러 전쟁 과 전개 과정이기에 읽기에 적잖이 버거웠던 부분이었습니다. 무슨 주제로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지 어려웠다는 이인샘 말이 곧 우리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국민국가, 내셔널리즘, 대의민주주의, 자본주의공업과 도시 노동자들, 프롤레타리아 연대와 같은 것들이 뿌리내렸고 확대되는 과정에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1860년대 이후 30년 동안은 분쟁과 전쟁이 많았습니다.
19세기 내셔널리즘은 지금까지 별로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어떤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국민국가’의 주창자들로서는 국민국가란 단순히 국민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즉 궁극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와 기술, 국가조직과 군사력을 발전시켜나갈 만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는 큰 국민이라는 것을 전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러한 민족은 근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사실상 부르주아적인 사회발전의 ‘자연적’ 단위라야 했던 것이다. (203쪽)
1948년 혁명이 실패하고 1850년대 호황을 누렸던 유럽은 190년대 이후 30년간 국민국가들이 형성되고 자본주의가 팽창하면서 수많은 분쟁과 전쟁을 겪었습니다.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가 서로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얽히기 시작했고 자본주의적 공업 강대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전쟁을 그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었죠. 유럽은 아직 전쟁에 대한 상시적 공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하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끝내기도 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혁명 이후 경제 이득이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다른 방법이 있음을 발견한 부르주아지들은 정부에 반대하는 민중들이 요구하는 것들 가운데 약간을 언제나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비스마르크 같은 유능한 정치가들을 혁명 세력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사회 제도를 개혁하면서 동시에 너무 크지도 않지만 경제적 이익을 얻으며 통치하기 적당한 규모로 통일 독일을 탄생시켰습니다. 이후 이탈리아가 통일되었고 이 두 변화에 따른 부수적 사건으로 프랑스 나폴레옹 2세 제국이 붕괴, 파리코뮌이 일어났고, 독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가 재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팽창하고 자유주의적 부르주아가 통치하는데 국민국가가 필요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중세 유럽 봉건제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느슨한 제도였습니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봉건 영주에게 줄 것이 없을 정도로 척박했던 유럽에서 맹세를 받은 왕은 그저 그의 영지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는 게 다였습니다. 게다가 영주는 꼭 한 왕에게만 맹세해야 하는 것도 아니어서 다른 왕에게 중복 혹은 다중으로 충성 맹세를 하기도 했죠. 왕이 사는 곳과 영지 사이에 길이 잘 닦여진 것도 아니고 행정 체제가 발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형태는 자본주의 확대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공업을 발달시키고 시장에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원료 수송과 제품 유통을 위해 길을 닦고 철로를 깔아야 했고, 통일된 언어와 영토, 행정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적합한 정치적 형태가 국민국가였습니다. 국가가 실시하는 교육은 이 시기에 새로 만들어진 ‘네이션’을 튼튼하게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였습니다. 같은 언어를 배우고 사회가 만든 여러 가치를 심어주는 곳으로 말입니다. 국민은 교육을 통해 언어를 배우고 언어는 국민이 사용함으로써 국어가 되는 것입니다.
대의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정치, 자본주의는 어떤 관계일까요? 홉스봄은 오직 최적자만이 살아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지배자가 되는 것이 부르주아 세계의 경제, 정치, 사회, 생물학적 사상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의회를 통한 대의제 정치를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대중의 의사를 알지도, 알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중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대표할 줄 몰랐습니다. 루이 나폴레옹이 의회와 투표를 통해 독재와 황제 취임이 가능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를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은 맑스입니다. 자기들의 계급 이익을 대표할 줄 몰랐던 프랑스 농민들은 루이 나폴레옹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통치 권력이라 여겨 그에게 표를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점차 자신들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인식은 물론 연대 의식도 확고해져 갔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출은 정치적 행동과 산업적 행동의 복합적 작용, 민주주의로부터 무정부주의에 이르는 갖가지 급진주의의 혼합, 그리고 계급투쟁과 계급간의 연합과 양보 등의 혼합된 작용이라는 기이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과정이었다. 자유주의가 부활한 경우처럼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출이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인 단결, 즉 급진 좌파(1848년부터 내려오는 유산)의 국제적 단결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244쪽)
노동자들은 주변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활동과 더 강하게 연결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벌인 국제적 연대는 제1인터내셔널(1864~1972)을 만들었고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SPD)이라는 대중 정당을 틴생시켰습니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점차 인터내셔널에 더 합류하고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회주의적 대중노동운동이 형성되었습니다. 홉스봄에 따르면 노동운동을 독립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만든 것, 인터내셔널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입니다.
아메리카 대륙 구 식민지와 세계 도처에 있는 현 식민지들은 유럽에 종속된 지배 상태에서 서유럽화를 강제로 겪었거나 서유럽화 중이었습니다. 민족 운동을 일으켜 종속에 저항하고, 혹은 무기력하고 무지한 자국 구체제와 대중들을 개혁하기 위해 서구 지식과 제도를 변용하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민중과 달리 지배 세력들은 대항보다는 외국 세력에 힘입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노선을 선택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서유럽이 강대국이 된 이유를 앞선 산업과 과학, 지식이라 보고 이를 자기 나라 개혁에 응용하고자 했던 인텔리들 지식인들이나 봉기를 일으켜 외세를 내쫓고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민중 운동가들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죠. 심지어 맑스도 전 세계를 비참하게 만든 부르주아지의 정복을 적극적·진보적인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진보, 자유, 평등… 이런 것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구성되어 우리에게 내재 된 것일까를 곰곰이 되짚어 봅니다.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에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측면이 흥미로웠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국민국가가 왜 필요했는지 질문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언어를 통일하고, 가치관을 통일하고, 영토와 도로를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즉, 자본주의의 확대와 확장을 위해서 이 모든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리고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소수 민족을 소멸시키는 것을 보며
당시 진보와 자유와 평등의 개념은 대체 누구의 진보와 자유와 평등인지 질문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