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은 자본의 시대 전개과정의 마지막 부분과 이로 인해 일어난 결과를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선 경제 확장으로 하나되는 새로운 세계에서 승리한 자들을 살펴봤는데요, 당연 미국부터 얘기해야겠죠. 아메리칸 드림을 말하면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떠오르는데요, 이들을 키워낸 때는 힘있고 겁 없는 부호들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사적인 정의와 사설 무장병력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무법천지의 시대였습니다. 무법천지에서 부를 쌓으며 활동했던 이들을 도적(盜賊)귀족이라 불렀는데요, 이들의 존재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적 다원주의라는 이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다원주의 덕에 자본주의의 지상 명제는 생존의 논리와 이윤의 논리를 따르는 것으로 정상에 오르는 자가 최고이고 정의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다원주의를 얘기하면서는 적자생존을 가장 편협하게 해석한 이론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미국에서는 진화론 가운데서도 사회진화론자들이 과학계에서 큰 힘을 가지면서 장애나 정신질환자들을 가두고 억압하는 형태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아직도 남아있는 곳이 있다고 하네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얘길듣고 놀랐는데요,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절멸정책이 최근에 덴마크령인 그린란드에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건강검진이라는 명분하에 동의없이 피임장치를 심는 일이 있어 덴마크 정부가 고소당한 이야기를 들으며 황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중국이나 우리나라 반도체를 억압하는 걸 보면 그들은 여전히 도적귀족이구나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런 점에서는 그 시대와 지금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남북전쟁의 성격과 원인에 대해서도 홉스봄은 새로운 지점을 얘기해주는데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노예제도는 남북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남북이 상호공존의 방식을 찾아내지 못하고 분리와 내전으로 치닫게 된 원인은 시대도 인구도 자원도 그리고 생산마저도 북부에 너무도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에 대량 면화를 수출하는 남부는 자유무역이 유리한 반면 공업화된 북부는 보호관세가 유리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대의 방향성과 맞지 않은 남부가 북부를 견제하려고 하니 남북갈등이 지속된 것이죠. 이 사실에 노예해방을 성공시킨 링컨 위인전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시며 억울(?)해하신 샘도 계셨네요.ㅎㅎ
그리고 또 하나의 승리자가 있었죠. 승리자가 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본입니다. 일본은 유럽과 “문화적 전통에서는 전적으로 이질적이었지만 그 사회구조는 서양과 놀라우리만큼 유사했다”(306쪽)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그렇다고 유럽처럼 도시가 자립적이라던가 상인들이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서양과 닮은 사회구조는 분명 대국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토양이 아닐까 하는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자본주의로 갈 수 있는 맹아가 갖춰져 있었던 중국이 왜 서양에게 그리 처참히 무너졌는지에 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도 해보았구요.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유럽인으로 여긴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일본인의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여겼는데 홉스봄의 얘기를 듣고보니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구요. ㅎㅎ
이제 전개과정을 넘어 결과들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홉스봄은 토지를 제일 처음으로 다루었습니다. 홉스봄은 하나의 세계를 만든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대변혁을 토지에서 살펴보는데요, 자본주의로 인해 토지와 인간의 상호작용이 단절되면서 나타나는 인간 생활양식의 변화를 그는 중요하게 생각하 것 같습니다. “농업의 자본주의적 형태로의 이행 혹은 적어도 대규모로 상품경제화된 형태로의 이행에 따른 사회적 변동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에 묶여 살아온 사람과 토지 사이의 전통적인 결박(結縛)관계를 풀어놓았”(347쪽)다는 홉스봄의 글은 일리치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우리는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들이라 아직도 토지와 인간의 상호작용이란 개념에 막연함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그 막연함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자본주의가 토지에게 뽑아내고 싶은 것이 식량과 원자재뿐만이 아닌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업은 자유노동자가 많은 것이 유리했고 그 조건을 위해서는 토지에서 인간을 떼어내야 했죠. 그러니 농노나 노예는 이윤 추구에 부적합한 제도일 수밖에 없구요. 이로써 노예제 폐지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행해진 게 아님이 또 다시 증명됩니다.
‘철도, 기선, 전신’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지리적 범위가 확대되면서 오락적 여행 개념도 생겨납니다. 긴시간 이동이란 수행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면, 이젠 이동이 오락적 요소의 관광여행이나 휴가여행으로 출현했다는 사실도 재밌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를 오르는 등산, 위험해 보이는 스키도 이때 휴가여행으로 시작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웠네요. 노동이 아닌 사치스러운 스포츠를 즐기고 오락적인 여행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베블런의 유한계급도 함께 떠올려봤습니다.
노동자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단일 요소 ‘불안전성’에 대해 얘기도 나눴는데요. 사실 농민도 불안정한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태어나서 땅에 묻힐 때까지 대부분의 생애를 어떻게 보내면 될지에 대한 예측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외부요인에 의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지금 노동자의 불안정과 그때 노동자의 불안정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으로 이런저런 얘길 나누었는데요, 지금의 노동자는 불안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데 이는 쿠팡 같은 일자리가 그 믿음을 뒷받침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노동과 급여의 방식도 선택의 자유가 있어 그 믿음이 더 강력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하지만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시장’기능의 힘만으로는 노동자의 안전성과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노동자는 이러한 인식을 전혀 못하고 있죠.
‘프롤레타리아’라는 하나의 ‘노동자 계급’에 균열이 생겨 ‘노동자’와 ‘빈민’으로 갈라졌다는 사실과 노동계급에서 ‘체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분석도 재미있었는데요, 숙련노동자와 빈민의 차이는 분명했지만, 숙련노동자들은 자유주의적 시장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권리와 욕구가 충족될 수 없다는 명확한 인식이 있었고, 이는 그들과 빈민의 공통성을 자각할 수 있도록 했고, ‘프롤레타리아’라는 노동 계급으로 ‘인터내셔널’을 지지하고 후에는 사회주의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체면’이란 용어에서 숙련노동자들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것 같다, 노동자의 자존심과 부르주아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 함께 느껴진다는 얘기도 나눴습니다.
공지에서는 반장님이 항상 전체적인 내용 정리를 해주시니 후기에서는 나눴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나열해봤습니다. 이번 시간도 두 편의 영화 얘길 했었는데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플라워 킬링 문>, 캘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였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보시길 추천해요~
다음 세미나때 봬요.^^
힘으로 억누르고 그걸 법과 제도로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의 '승리자들'을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기분이 묘해집니다. '도적 귀족'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느낌...그리고 이런 강압과 위선이 모두가 지향하고 동경하는 문화의 토대가 되는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지금 문명이라고 하는 건 무엇인가 되묻게 되네요.
이번 시간은 ‘지금’ 우리 시대와 연결되는 지점이 참 많이 보였던 것 같아요!
도적질을 하여 백만 장자가 되는 이야기, 토지와의 결박이 풀리고 공동체가 파괴되면서
원자화된 개인들이 느끼는 고립감과 불안정성, 목숨을 건 여행이 아닌 오락성 여행으로 바뀐 것까지!
지금이 어떤 과거의 이탈들 속에서 왔는지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함께 나눴던 이야기를 생생하고 신속하게 정리해주셨네요^^ 소현샘 감사합니다!
지금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치나, 문화, 제도들이 정착되는 과정에 엄청난 폭력과 강압이 있었고, 그 반대로 목숨을 잃어가면서 지켜내려했던 투쟁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호락호락하게 넘겨준 것들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유, 평등 혹은 진화론이라는 동일한 방법으로 미화(?)되어있는 역사는 어떤 시선에서 말하는가를 잘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