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벌써 절반이로군요! 이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졸리게 하고, 그러면서도 재밌게 했던 《봉건사회》와의 만남도 마지막입니다. 하지만 찐한 만남이 그러한 것처럼, 아마 다른 책을 보다가 혹은 갑자기 ‘어?’ 하면서 《봉건사회》가 생각나실 겁니다. ㅋㅋ
다음 시간에는 《봉건사회》를 끝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블로크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다른 시대도 아니고 봉건사회에 주목해야만 했을까를 생각하시면서 읽어보시죠!
상호 교류하는 사유들
저희가 첫 번째 브리핑에서부터 밀고 있는 주장이 있죠. 바로 ‘모든 건 다 섞였다’입니다. ㅋㅋㅋ 역사를 공부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식이긴 한데요. 그래도 무엇이 어떻게 섞였는지를 아는 건 또 새로운 충격을 줍니다. ‘이렇게까지 섞일 수 있다고!?’라는 충격은 섞임이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적으로 다른 것들이 만나는 문제라는 걸 실감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봉건사회》를 읽으며 실감하고 있지만, 섞인다는 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무언가를 발생시키는 일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만나는 일이죠.
‘유럽’이란 관념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프랑크인, 시라센인, 헝가리인, 스칸디나비아인 등이 마구잡이로 섞이지 않았다면, 다양한 형태로 관계가 섞이지 않았더라면 ‘유럽’이란 관념은 생길 수 없었습니다. 이번 브리핑의 핵심인 ‘수피’는 종교적,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으면서 여기저기를 섞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이슬람과 유럽 두 세계 모두 지금과 같은 문화를 갖출 수 없었죠. 특히 유럽 같은 경우에는 수피들이 없었더라면,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텍스트를 접할 수도 없었고,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수피가 누구이길래 이런 일을 가능케 했는지 간단하게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수피는 이슬람에서도 매우 독특한 존재입니다. 역사적으로 수니파와 시아파는 정치적으로 나뉘었지만, 수피는 꾸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무슬림으로서의 신앙을 어떻게 견지할 것이냐와 연관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시아파는 신앙을 내면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수피와 통하는 지점이 있긴 한데요. 이 부분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얘기해보죠 ㅎㅎ;;). 이들이 얼마나 독특하냐면, 무작정 무함마드를 본받기보다 그의 말과 행동에서 무슬림의 정신을 유추하고 자기 방식대로 계율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무슬림은 모스크에 가서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드려야 하는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수피들은 마음을 다해 정성스럽게 하지 않으면 모스크에 가서 기도를 드린다 한들 기도를 드리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마음을 다하면 모스크에 가지 않고 기도를 드려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모든 수피가 이렇게 급진적인 건 아니지만, 수피라는 존재가 애초에 급진적인 지점이 있습니다.
수피는 알라와의 합일을 목표로 합니다. 무함마드가 제시한 계율조차 이들은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어떤 수피들은 합일을 황홀경과 같은 체험을 중요시하지만, 어떤 수피들은 철저하게 이성과 합리에 기반해서 알라와 무슬림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노력합니다. 이때 수피들이 참고한 텍스트와 수행법이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것이었습니다. 마침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수행자ㆍ철학자들도 수피들이 원했던 것과 같은 식으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거나,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피들은 이들의 사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슬람 세계 내부에 퍼뜨렸죠.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에까지 흘러 들어가서 그곳에서 이슬람과 교류하던 유럽 기독교도들이 이를 유럽으로 가져갈 수 있었고요.
그런데 이번에 브리핑을 준비하면서,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그리고 일상적으로 유럽과 아랍,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가 섞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 움마를 결성할 때 그를 추종하던 무리 중에는 이미 기독교, 유대교의 다양한 지파가 있었고, 수피처럼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수행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슬람의 건축 양식에도 그리스ㆍ로마의 흔적이 묻어있었고요. 아마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두 개의 세계가 명확하게 존재하기 전부터 섞이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수피’라 불린 철학자 혹은 수행자들도 그런 섞임 속에서 종교권, 문화권마다 다르게 나타났던 게 아니었을까요?
예전에 이슬람을 공부할 때 이슬람 철학자들 덕분에 유럽이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사유를 접할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브리핑을 준비하면서, 이슬람 철학자들 역시 지중해 부근의 사유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수피가 등장하기 전부터 수피와 같은 내면을 탐구하고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현자들이 여기저기 떠돌고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이는 문화가 여기저기 섞이고 있었다는 증거죠. 덕분에 아무리 물리적으로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어떻게 비슷한 사유가 나타날 수 있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ㅋ
만들어진 ‘기사도’ 혹은 ‘귀족 정신’
‘중세’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기사도’입니다. 제가 만화에서 봤던 기사도란 가난한 자, 약자, 과부, 고아 등을 지키는 고귀한 자의 표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봉건사회》에서 본 기사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고귀한 자로서의 기사도가 있긴 했지만, 그건 기독교와 섞이면서 종교적으로 채색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조차 실제로는 많이 지켜지진 않았습니다. 성직자나 세속 사람들이나 모두 기사에게 기사답게 굴기를 요구했지만, 기사들이 능동적으로 그러한 고귀함을 실천하기로 했던 건 중세 말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부터였습니다. 부르주아가 자신들보다 더 경건하고 고귀한 기사적 면모를 갖추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며, 그제야 기사도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었죠.
사실 중요한 건 ‘귀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기사’는 귀족을 지칭하는 여러 단어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귀족에게도 기사도와 비슷하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데요. 이것 또한 ‘기사도’와 마찬가지로 환상입니다.ㅋ 도대체 ‘귀족’이란 어떤 존재였을까요? 봉건시대 귀족의 자존심은 어디까지나 전사로서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사는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와 구분됐습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듯이 능동적으로 싸웠다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농민들처럼 ‘약자’를 약탈하는 게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전사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이지 도덕성을 상실한 약탈자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랬던 귀족 계급이 부르주아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블로크는 부르주아가 중세 봉건사회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고 분석합니다. 보통 봉건사회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계급에게 속하고, 다른 계급을 책임지는 관계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르주아는 이런 관계망으로부터 고립된 존재였습니다. 이들은 때로는 농민처럼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예속기사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건 부르주아가 봉건사회 질서 전반에 부합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봉건사회의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도시에 고립된 개인들이 집단적 존재로 뭉쳤고, 부르주아의 목소리에 힘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수직적 관계의 수혜자인 귀족 계급과 성직자 집단에 대항해 그동안 소외받았던 이들이 평등한 관계를 중심으로 맺어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는데요. 이게 나중에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코뮌’의 탄생입니다. 코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평등한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블로크는 코뮌, 부르주아 중심의 집단이 결코 민주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있어서도 “가혹한 지배자였으며 무자비한 채권자”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부르주아의 독특함을 주목한 이유는, 부르주아는 기존의 봉건사회에서 “보호를 대가로 하는 복종의 서약을 상부상조의 약속으로 바꿈으로써, 봉건적이라 부를 수 있는 정신과는 철저히 다른 새로운 사회생활의 한 요소를 유럽에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봉건사회》를 읽으면서 계속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블로크는 철저하게 ‘더 나은 역사’를 서술하는 게 아니라 예상치 못한 것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는 것들을 계속해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럽인들이라면 자부심으로 삼았을 귀족, 기사도 정신 심지어 부르주아, 코뮌까지 이렇게 적나라하게 폭로할 줄은 몰랐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블로크에게 역사는 자부심을 가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게 명확해지는데요. 그렇다면 블로크는 무엇을 위해 역사를 썼을까요?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는 일종의 지적 본능으로부터 촉발된 유희,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배움’처럼 얘기됐는데요. 《봉건사회》를 읽으면서 또 다른 느낌입니다. 다음 시간에 얘기해보죠!
귀족 계급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새로운 계끕의 출현으로 인해 뭉쳤다는 사실이 재밌었습니다. 정체성이라는 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늘 다른 것과의 충돌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ㅎㅎ 부르주아가 그 당시에는 무척 이상한 계급이었다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부르주아는 단지 도시 사람들이 많아져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나저나 벌써 <봉건사회> 막바지네요. 이 책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끝까지 따라가 봅시다~!
봉건사회를 보면서 ‘기사도’의 화려한 이미지가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네요 ㅋㅋ! ‘기사도’라고 하면 아주 고귀하고, 도덕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기독교와 연결되면서 만들어진 것이고, 사실 기사들은 잔혹했고, 별볼일이 없었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봉건제가 ’아래로부터 위로‘ 인격적 종속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을 보여주고, 그와 완전히 다른 집단(부르주아 중심의 집단, 코뮌)의 출현이 저도 인상적이었네요! 상호종속 관계의 기반을 둔 공동체에서 추상적 개인들의 평등이 기반이 되는 집단으로의 이행! 봉건제가 해체되는 것은 아마도 이 부르주아 집단의 출현과 관련이 되는 듯합니다! 앞으로 또 봉건사회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가 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