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상인의 윤리를 말하다
역사상 상인은 어떤 문화권에서든 천대받은 계급입니다. 기독교 중심의 유럽에서 상인의 이윤은 성경의 논리에 반하는 것으로 취급되었고 중국에서도 상인은 가장 낮은 계급이었습니다. 어디에서든 상인은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이윤을 취하는, 이상한 계급이었지요.
이슬람은 상인의 종교입니다. 이슬람 공동체를 만든 무함마드는 상인 출신이었고, 그가 활동한 메카, 메디나도 역사 깊은 상업도시였지요. 이슬람의 독특함은 무함마드는 어디서든 천대받던 도시 상인이 스스로 윤리를 구축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상인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한 것이죠. 상인이 중심이 된 종교인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신과 거래하는 인간을 그리는 표현이 가득합니다. 이 세상은 신의 것이고, 인간은 신에게서 세상을 빌려 씁니다. 그러니 신과 거래한 인간은 생활 전반을 신과에 대한 신의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이슬람법은 마치 계약서처럼 세세하게 모든 생활 방식을 규정합니다. 씻는 법, 먹는 법, 입는 법, 돈 빌리고 계약하는 법 등등. 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이행하는 것과 신과의 거래라는 종교생활은 구분하지 않는 것이죠. 즉 이슬람에서는 돈을 벌고 이윤을 추구하는 것과 종교적 경건함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인문화+종교는 이슬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천일야화>이지요. <천일야화>에는 상인이 많이 나오는데요, 그중 가장 전형적인 상인은 바로 신드바드입니다. 신드바드는 모험을 떠나 정말 죽을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그는 고생을 거듭하면서도 일곱 번이나 바그다드를 떠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연회를 베푸는 삶을 반복하지요. 그는 왜 떠날까요? 그가 추구하는 상인으로서의 이익은 무엇일까요? 신드바드는 늘 상거래를 위해 항해를 떠나지만 정작 거래하면서 얻은 금품은 열에 아홉 돌아오는 도중 풍랑을 만나 휩쓸려갑니다. 그가 얻은 건 풍랑에서 살아남아 천신만고 끝에 얻은 희귀한 보물과 남들은 듣도보도 못한 장소와 존재를 경험하는 모험담이죠. 그런 신드바드의 희귀한 보물과 이야기는 공동체 사람들에게 활력을 줍니다. 신드바드는 자기 자신의 희귀한 경험과 보물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상인인 것이죠.
신드바드의 행동은 선행을 베푸는 것이 곧 신에 대한 채무를 갚아 나가는 것이라는 이슬람의 교리와 통합니다. 신드바드는 모험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매일같이 잔치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어떻게보면 사치하고 낭비를 일삼는 사람 같죠. 그런데 <천일야화>에서 사치와 낭비는 큰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베풀지 않고 쌓아놓는 게 더 큰 문제가 되죠. 모든 것은 신의 것이니, 사유화하고 꿍쳐놓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잘못된 짓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로, 이슬람은 이자를 금합니다. 이자란 신의 것이기에 모두와 나누어야 마땅한 것으로 이윤을 얻으려는 심보의 산물입니다. <꾸란>에서도 이자를 금하는 구절이 여럿 나오죠. 그리고 이자 금지는 이슬람의 상인문화가 자본주의와 다른 길을 걷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자 금지를 통해 이슬람은 자본주의 '정신'이 나오지 못하는 문화권을 형성하지요. 반면 같은 일신교인 기독교는 이자에 대한 어떤 합리화를 통해 자본주의를 배태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자본주의는 단지 이익에 대한 욕심이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것이 정말 신께서 보기에 합당한지, 그 합리화 과정에 따른 것이죠. 이슬람은 이자를 금지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신에게서 빌린 것이고 인간은 그걸 나누어 쓸 뿐이라는 교리를 고수합니다. 그래서 사치나 낭비도 큰 죄가 아니고,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은 종교적 의무이지요. 그런데 자본주의 정신은 그 반대입니다. 신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발휘해 열심히 일하고 재물을 축적하는 것은 신의 뜻에 따른 선이고, 가난은 반대로 게으르게 굴어 신의 뜻에 반한 잘못입니다. 가난하면 비참한 게 당연하다는 관념도 그런 합리화에서 비롯되고요. 어쩌면 우리는 이슬람을 거울 삼아 우리의 '이익됨'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왜 우리는 쌓아두어야 이익이고 선이라고 생각하는지. 왜 가난은 자업자득이고 비참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런 '정신'은 어떤 합리화 과정을 거쳐 나에게 심겨져 있는지.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며, 우리는 동시대의 거울을 통해 '다른 이익'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봉건사회의 권력관계
봉건사회 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떤 그림입니다. 농노가 기사와 사제를 업은 채 등골이 휘어 있는 그림이지요. 프랑스 혁명을 야기한 구 체제(앙시앵 레짐)을 풍자한 그 그림은 '봉건사회=피라미드 신분제'라는 관념을 심어줍니다. 하지만 <봉건사회>를 읽다보면, 이 시대는 어떤 체계적인 제도나 견고한 질서가 성립되기 어려운 사회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권력이 굉장히 느슨하고, 제도랄 것은 하나같이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약한 사람들에게 봉건시대는 가혹했습니다. 하지만 블로크는 피라미드 구조는 봉건사회의 핵심이라고 보진 않았습니다. 어떤 사회에서든 피라미드 구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카스트제도는 위에서 억압하는 구조였지요. 봉건사회의 독특함은 인적종속관계를 그 구조를 아래에서부터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적종속관계는 봉건사회의 특징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 블로크는 봉건사회를 그물망으로 표현합니다. 중심이라고 할 것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굉장히 느슨하게 작용한 이 사회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깔끔하게 똑 떨어지는 관계랄 게 없습니다. 이번에 읽은 2책 '통치'에서는 봉건사회의 사람들이 얼마나 느슨한 권력 속에서 살았는지,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활용해야 했는지를 서술합니다. 단적인 예가 바로 재판권입니다. 봉건사회에도 사람들간의 갈등이 있었고 잘잘못을 가리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을 누가 주관할까요? 가장 높은 사람인 영주나 왕일까요?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재판권에서 제일 중요한 사형판결권, 일명 '유혈재판권'은 원래 백작의 소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하급재판을 주관하는 소(小)수장들에게도 부과되기 시작했고, 그의 대리인인 하급자들도 그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필요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또는 그런 사람의 대리인으로 위임받았다면, 이런 사람이 직접 재판관 노릇을 하는 것을 가로막을 지적인 방해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중앙정부가 무능하다보니, 조금이라도 권력이 있으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고, 그가 내릴 수 있는 판결의 범위도 커지는 것이죠. 모두가 이렇게 재판권을 쪼개어 나눠갖다보니, 재판하는 것보다 판결을 내린 후 그것에 승복시키는 것이 더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쪼개진 권한을 가지고 시행한 재판은 큰 위력이 없었고 입증 방법도 무척 초보적이고 간단했으며, 재판소보다는 근친복수, 사적복수가 더 큰 위력을 발휘했으니까요.
그럼 대체 이런 시대에 국가란 무엇이었을까요? 블로크는 이렇게 권력이 쪼개지고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시대였지만 신기하게도 왕권의 신성함은 유지되었다고 말합니다. 로마 이후 조금만 권력이 있으면 다른 누군가를 거느릴 수 있는데, 그 정점인 왕이 되고자 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그 수요가 일정했다고요. 그 이유는 바로 왕 자체가 신의 광휘를 두른 신성한 사람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왕은 교회로부터 성별(聖別)받은 특별한 존재이고, 그런 권위는 설령 왕이 몇번이고 포로로 사로잡는다 해도 시해(弑害)까지 가지 않게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되었습니다. 기사도 영주는 여럿 모셔도 국왕을 여럿 모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블로크는 왕권을 둘러싼 갖가지 미신이 만들어지는 봉건사회를 묘사하면서 이 시대를 비하하지 않습니다. 봉건사회는 무질서뫄 미신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나름대로의 심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하죠. 그리고 그 심성은 결코 지배집단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봉건시대의 왕은 아래로부터 권력을 행사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이념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자기네들의 심성을 형성시키고 있던 여러 제도의 영향을 받은 가신들 집단에 의해서"였으며, "그런 뜻에서 우선 얼핏 보기에는 그저 무질서밖에 아닌 것처럼 여겨졌던 수많은 반란 뒤에는 그 나름대로 풍부한 원리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봉건사회의 관계는 아래에서부터 권력에 대한 구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관념을 형성하지요. 블로크는 이런 아래로부터의 힘을 서유럽 봉건제의 독자성이라고 봅니다.
블로크가 봉건사회를 들여다본 이유는 서문에 나옵니다. 근대 유럽인의 정체성이 형성된 것은 '암흑시기' 중세를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럽인의 정체성 자체가 봉건사회에서부터 형성되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였죠. 유럽이란 기본적으로 포위된 상태, 외부로부터 침략당하기 시작하자 그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 생겨난 관념입니다. 블로크는 폭력이 일상이던 봉건사회를 그리면서도, 그 당시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때 평화란 무척 단순합니다. 살인과 강도행위가 없는 상태가 바로 평화입니다. 매일의 위험에 대한 매일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 이들에겐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것이 '유럽'이라는 정신을 낳은 것입니다.
블로크는 봉건시대의 평화와 폭력을 묘사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있던 시대적 현실을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세계대전을 겪은 그는 자신의 시대의 폭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블로크는 현대의 폭력, "무장한 여러 국민의 세계가 내포하고 있는 끔찍하고도 집단적인, 그러나 간헐적인 위험으로 인한 극도의 괴로움"을 봉건시대의 "매일매일 닥치는 위험"과 구분합니다. 무정부상태와 반복되는 근친복수에서 비롯되는 폭력은, 누군가의 탁신자가 되어 보호받으며 강도와 살인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갈구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유럽은 다름아닌 세계대전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그때 블로크는 '암흑 시대'로 치부되었던 유럽을 살피며 근본부터 다시 물었던 것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폭력은, 원하는 평화는, 그리고 각자 머릿속에 그리는 유럽과 세계는 무엇일까? 과연 그때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하고요. 그리고 블로크의 탐사는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해 보입니다.지금 우리에게 평화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지금의 시림들은 봉건시대의 폭력과 평화보다 더 나은 방식의 폭력과 평화를 경험하고 있는 걸까요? 국가라는 관념이 견고하고 제도가 촘촘하게 마련된 지금 닥치는 폭력은, 과연 무정부상태의 구멍이 숭숭 난 제도가 유발한 폭력보다 더 강도가 약한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합리성 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봉건사회>는 천년도 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결국 지금에 대한 질문을 남기고 있습니다.
드디어! <봉건사회>의 다종다양한, 그리고 다채로운 면면들에 대한 탐사를 마쳤습니다.
앞으로 6주 동안에는 좀 더 뜨겁고, 땀내나는 영웅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볼까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수호전> 1권을 읽고 질문거리를 가져오시면 됩니다.
금요일에 만나요~!!
확실히 기독교에서는 '상인'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죄악시되고, 또 '게으름', '가난'이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상한 역설이 있죠. 도대체 이 종교는 누구를 위한 것일지 참 궁금한데요. 그에 반해, 이슬람은 철저하게 '상인'이 세운 종교이고, 상인의 윤리에 기반한 종교라는 게 인상적이에요. 그리고 이때 상인은 이익을 추구하되 동시에 그것을 나눔으로써 순환하는 자이기도 했죠. 무함마드가 속했던 쿠라이쉬 부족이 약탈자이면서 상인이었다는 것도 뭔가 연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슬람은 공부할수록 참 독특한 종교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블로크의 이야기에서는 언제나 중세에 대한 그의 애정이 느껴집니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봉건사회에 대한 논의들 못지않게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다른 시대와 이렇게 강렬하게 접속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합니다. 봉건사회에 대한 생생한 서술이 그냥 나온 게 아님을 알 수 있어요. 봉건사회를 단순히 피라미드적 계급사회로 이해할 수 없음을 얘기하기 위해 블로크는 여러 계급들이 어떤 변형을 겪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보여주죠.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납득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봉건사회를 읽으면서 그 시대에 애정이 생기기보다, 저는 블로크에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