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역만리 세미나는 ‘이슬람 세계의 역사’ 브리핑을 지나 ‘송나라 시대의 역사’ 브리핑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마르크 블로크를 통하여 9세기 - 13세기 서유럽을 여행했다면, 이번 시간부터는 중국의 사대기서 중 하나로 꼽히는 <수호전>을 읽습니다. <수호전>의 배경은 북송(北宋) 말기, 휘종(徽宗, 1100년 ~ 1126년)이 제위하던 시기입니다. 저희는 <수호전>을 더욱 풍성하게 읽기 위해 <수호전>의 배경인 송나라 역사 공부(역사 브리핑)을 함께 해나갈 예정입니다-! <수호전>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움을 줄지 기대가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송대 시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유학’과 ‘사대부’에 관한 주제로 규창샘이 브리핑을 하고, <수호전>은 2권을 함께 읽습니다!
송나라 황제 휘종의 작품 ‘청금도’. 휘종 자신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장면을 그렸다.
1. ‘한족’ 정체성의 형성과 문치주의
제가 이번에 송(宋)나라(960년 ~ 1279년) 역사를 공부하면서 인상적인 부분은 송대에 ‘한족’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됐다는 점입니다. 그전에도 ‘한족’ 정체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전 시대에만 해도 ‘한족’과 ‘비한족’의 구분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불과, 50년 전 당(唐)나라(618년 ~ 907년)에만 하더라도, 당 건국자 고조 이연(李淵, 566년 ~ 635년)에게는 이민족의 피가 섞여있고,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 598년 ~ 649년)은 북방 변방에서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던 돌궐(突厥)과 강한 친연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형제 관계를 맺고, 그들의 문화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전투 방식을 모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당 태종은 그들을 지배하게 되고, 또한 그들로부터 지배자임을 인정받아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갖게 됩니다. (중국의 지배자를 뜻하는 천자와 유목 제국의 지배자를 의미하는 가한을 결합한 것) 그리고 당대의 군사 체계를 봐도, 소위 ‘당나라 군대’는 이민족 유목민 부대와 중국인 직업 군인들이 뒤섞여 있는 혼합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송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가 생깁니다. 송나라 지식인들은 ‘변경의 오랑캐들’과 ‘한족 중국인’을 확연히 다른 존재로 인식합니다. ‘한족’과 ‘비한족’을 특별히 구분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그전 시대(위진남북조, 수, 당), 대략 500년 이상 한족, 비한족 구분없이 뒤섞였고 사실상 순수한 한족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송대 지식인들은 ‘한족’이라는 정체성을 다시 만들어냅니다. 송대에 왜 하필 ‘한족’ 정체성을 필요로 한 걸까요?
송대 때 ‘한족’ 정체성이 형성된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당대에는 한족과 비한족의 구분없이 융합되던 시대였습니다. 민족적으로도 섞였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외국에서 들어온 최대의 종교, 불교(佛敎)를 받아들였던 아주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시기였습니다. 군사적으로도 강력하고, 영토적으로도 확장되어갔던 당 제국이었지만, 그들은 ‘756년 안녹산(安祿山, 703년 ~ 757년)의 반란 이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당 제국이 멸망하게 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절도사, 두 번째는 환관입니다. 절도사는 군사지휘권을 가진 지방권력자를 의미합니다. 안녹산의 난 이후 황제의 권위는 바닥을 찍고, 지방권력자들과 중앙권력(황제) 사이에 비대칭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절도사들은 중앙권력(황제)의 말을 안 듣고, 자체적으로 지역을 관할하고, 마음에 안 들면 반란을 일으킵니다. 중앙 조정과 절도사들 사이의 힘에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황제는 환관(宦官) 세력을 이용합니다. 환관은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했기에, 황제는 그들을 믿었고, 중요한 직책을 맡깁니다. 조정의 주요 행정을 처리하는 일을 맡겼고, 이후에는 군사 지휘권까지 넘겨줍니다. 황제가 믿었던 환관은 권력을 얻자, 다시 황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당 말기에 가면 환관은 자기 입맛에 따라 황제를 소리소문없이 암살하고, 교체하는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합니다. 지방에서는 절도사가, 조정에서는 환관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고, 행정은 마비됐습니다. 그에 따라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결국 이렇게 당나라는 붕괴됩니다.
당나라의 낡고, 썩은 정치 체제를 버리고 이제 새로운 이념에 대한 갈망이 폭발합니다. 그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960년 2월 금군 총사령관인 조광윤(趙匡胤, 927년 ~ 976년)은 어린 황제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송을 건국합니다. 송을 건국한 조광윤은 앞서 당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해결해야 할 정치적 과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방 권력자들(절도사) + 환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과제를 만족하기 위해 그는 ‘문치주의(文治主義)’, 즉 ‘문치에 입각한 정치 모델’을 구상합니다. 전통의 무인(武人) 권력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문인(文人)들로 채우려는 것입니다. 송나라는 ‘유학(儒學)의 비전’을 실현하고자 했고, 관료는 가문의 배경에 의해 뽑히는 게 아니라 과거 제도를 통해 유학적 가치로 채워진 인재를 뽑았습니다. 이때부터 ‘사대부(士大夫)’라는 새로운 계층이 나타납니다.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통치하는 체제는 기존의 무인 중심 체제, 가문, 환관, 외척 중심의 체제와는 달랐습니다. ‘사대부’ 계층은 학문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자들이자, ‘독서인’ = ‘서적을 학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식인 계층은 이전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 체제로 출발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어떤 가치를 계승하고 있으며, 어떤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이전 왕조는 그것과 얼마나 반하는 것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학적인 것의 뿌리를 찾습니다. 위진남북조, 수, 당으로 이어지는 융합의 시대 이전에 유학적 통치 이념을 내세웠던 한(漢, 기원전 202년 ~ 220년) 제국에서 그 정당성을 찾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전 왕조와 완전히 다른 ‘우리’는 ‘한족’의 이념을 계승한 존재임을 각인해야 했던 겁니다.
2. <수호전>은 ‘충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
<수호전>은 120회본, 100회본, 70회본 등등 판본의 종류가 많고 복잡합니다. 엮은이에 따라 <수호전>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이번에 읽은 책은 김성탄(金聖歎, 1610년 ~ 1661년)이 엮은 70회본을 읽습니다. 김성탄은 <수호전>을 ‘충의(忠義)’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120회본, 100회본은 <수호전>의 108호한(好漢)이 양산박에 모이고, 이후 송강이 조정에 투항하여 오히려 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김성탄의 70회본은 양산박에 모이는 것으로 끝이납니다. 김성탄은 108호한들이 다시 사회에 편입되고 관군의 편에 서서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 근거로 <수호전>의 제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수호(水滸)’는 바로 ‘영토 밖의 물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왕의 통제를 벗어난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호전>은 왕의 통제 바깥에 있는 수호에 사는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김성탄이 보기에 저자 시내암이 책 제목을 <수호전>이라 명명한 것은 시내암이 송강을 지극히 미워해서 멀리 황향한 곳으로 보내 한 나라 안에 같이할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김성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흉악한 무리에게 기린이나 봉황 같은 인재라는 구실을 더해주고,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는 강도에게 백이나 안연 같은 명성을 붙여주며, 형벌을 당한 죄인에게 고결한 절개 같은 영예를 더해주고, 무장하여 난을 일으킨 역적에게 충실하게 잘 따른다고 칭찬한 것과 같으니, 이것은 이미 명실(名實)이 부합하지 않고 시비가 전도되는 그런 극단에 이르게 될 것이다.” 도적은 도적일 뿐! 사회에 편입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108명의 호한들을 ‘충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수호전>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과격하다고 느껴지는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요? <수호전> 책 표지에 “인간 본성의 모든 것이 펼쳐진다”고 나오듯이 108호한들에 의해서 펼쳐지는 108개의 인간 본성을 발견하고, 탐구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전!
노지심(魯智深)
3. 상상 등급 인물, 노지심
<수호전> 1권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캐릭터는 ‘노지심’입니다. 거칠고 우악스러운 모습 때문에 뜨-악 하는 장면이 많았죠. “노지심이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절 대문을 밀다가 ‘풀썩’ 하고 안으로 고꾸라졌다. 일어나 머리를 만지더니 바로 승당으로 가서 선방에 도착했다. 스님들은 좌선을 하다가 노지심이 발을 걷고 불쑥 들어오자 모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노지심은 선상에 다가가서 목구멍으로 꺼억 소리를 내며 바닥을 향해 토했다. 대중이 그 냄새를 참지 못하여 다들 “선재!”하더니 코를 막았다.” 승려가 됐음에도 행동하는 데에 어떤 거리낌도 없습니다. 술 마시고, 고기 먹기를 좋아하여 승가 공동체 주변 마을에서 어떻게든 술과 고기를 얻어 먹고, 결국에는 술에 완전히 취하여 좌선하는 스님들을 괴롭히는 장면입니다. 이후 장면은 더 가관입니다. 그 자리에서 옷깃에 넣어 들고온 삶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심지어 스님들 입에 쑤셔넣기까지 합니다. 최악 중의 최악이라고 생각되는 노지심은 놀랍게도 <수호전>을 종합한 김성탄에게 상상(上上) 등급의 인물로 평가됩니다. <수호전> 서문에서 김성탄은 이 책의 등장인물마다 상상(上上)부터 하하(下下)까지 등급을 매기는데, 이게 어떤 기준인지 읽으면서 확인해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습니다.
노지심이 거칠고 우악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중간중간에 멋진 모습(?)이 있긴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불의한 일을 당하면, 마치 자신의 일인냥 나서서 도와줍니다. 첫 번째로는 억울한 혼인을 하고, 빚까지 떠안은 여인의 하소연을 듣고 앞뒤 가리지 않고 상대에게 가서 혼쭐을 내줍니다. 그런데 또 웃긴 점은 이 인물은 힘 조절이 안 됩니다. “‘이놈을 아주 신나게 두들겨 패려고 했는데 겨우 세 대만에 죽어버렸네. 송사가 벌어지면 밥 가져다줄 사람이 없어서 큰일이니 일찌감치 달아나야겠다.’” 주먹 세 방에 상대를 죽여버리고 맙니다. 두 번째는 도적에게 시집을 보내야 하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구해줍니다. 딸을 다른 곳에 숨기고,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여 “옷을 홀딱 벗은 다음에 침상”에 올라 앉아 기다립니다. 도적 대왕이 다가오자 정신없이 때리기 시작합니다. “몰려간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비추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살찐 중이 침대 앞에서 엎어진 대왕 위에 올라타 흠씬 두들겨 패고 있었다.” 노지심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보면 주저없이 돕는 인물입니다. 권력자를 두려워하거나, 도적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불의를 겪은 사람들을 돕습니다. <수호전>의 캐릭터들은 멋지기도 하고, 쪼잔하기도 하고, 난폭하기도 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내야 할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는 않는 것 같네요! 김성탄은 그들을 ‘충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들의 행동에는 분명히 ‘정의’롭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토 밖으로 내몰린 존재들’(수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요? 마르크 블로크가 역사의 목적을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정의했듯이, 이번 <수호전>에서도 저희는 108명의 인간 군상을 이해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호전의 날 것(?)의 인간들을 또 만나봅시다!
세미나에서 '노지심이 대체 왜 상상(上上)인가!' 하고 토론을 벌인 게 생각나네요.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약자를 보호하...는가 싶은데 온갖 행패를 부리는 걸 보면 또 우리가 생각하는 의협심 넘치는 무사(武士)는 아니라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다만 상상의 인물일수록 속으로 계산하지 않는다는 특징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108영웅이라도 속이 좁은 사람은 계속 재고 계산하는 마음이 묘사되니까요. 그 순수함(?)이 극대화된 인물이 바로 상상(上上)의 인물 노지심이 아닐까 합니다. 다음에는 이 영웅들이 어떤 행패...아니 모험을 할지 궁금해지네요 ㅎㅎ
청년 샘들의 역사 브리핑에서 많은 걸 건져가야 하는데... 잊히지 않고 귓가에 울리는 건 빈샘의 "이언↘↗아몬드" 라니... 좀 많이 궁색합니다ㅠ 여하튼 규문 청년 샘들, 역사 브리핑 준비하느라 고생 많고여~~파이팅~~ 저희는 각자의 소화력으로 잘 섭취하는 것으로 보답할 게요 ㅎㅎ 각자 소화 역량으로 생각의 피가 되고 살이 되길! ( ̄y▽, ̄)╭
빈샘의 브리핑에서 한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이 어떤 시공간적 조건에서 발생했는지 따라가보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정체성과 배타성은 동시에 작동될 수밖에 없고, 정치 이념이 자기 정당성?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를 [수호전]을 통해 읽고 있어, 역사를 특정한 사관이 아닌 입체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어 이역만리 세미나 재미가 2배입니다. 샘들 모두 재미지게 읽고 있는 [수호전], 블로크로부터 배운 대로 [수호전]만의 독특한 방식의 이야기 구조와 다양한 인물들을 만들어낸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우선은 그냥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는 [일리아스]가 떠올라 비교해보게 되더라고요. 전리품을 뺏겨 삐진 영웅 아킬레우스의 쪼잔함도 뒤지지 않죠. 신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던 신화의 세계와 남송 말, 원나라 초기의 중국 대륙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담긴 [수호전]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은데... 우선은 열심히 읽는 것으로 따라가 보겠습니다~~(〃^▽^〃)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