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전>에 빠져든 이역만리팀입니다. 블로크의 <봉건사회>는 ‘유럽’과 ‘봉건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비틀어버린 매우 인상적인 텍스트였습니다. 하지만 <수호전>은 저희의 마음을 마구 흔들고 있죠. 토론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봉건사회> 때는 물음표 속에서 텍스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이런저런 질문들이 나왔다면, <수호전>은 인물들과 <수호전>이란 텍스트를 어떤 관점 속에서 봐야 하는가 등에 관한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수호전>을 ‘충의’를 다루는 이야기로 볼 것인가 아니면 ‘도적’을 다루는 이야기로 볼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었죠. 인물들의 행적, 역사적 배경 등등으로부터 각자의 의견이 나왔는데요. 현재 자신이 어떻게 <수호전>을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답으로 결론이 나질 않았지만, <봉건사회>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도 토론에서 자연스레 <봉건사회>와 <수호전>이 역사적으로 교차하는 것 같아서 함께 읽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ㅎㅎ
공지부터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수호전> 3권을 읽어 오시면 되고요. 각자의 베스트 장면 혹은 에피소드 하나를 뽑아서 나누도록 하죠. 그리고 이번 저희 토론의 핵심 질문이었던 ‘<수호전>을 어떤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까?’도 계속 고민해보도록 하고요!
1.송(宋), 사대부와 성리학의 시대
지난 시간에 문빈이 송(宋)나라에 접어들면서 ‘한족’과 ‘비한족’ 간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심화됐다고 브리핑했죠. 그리고 이번에 저는 그 대립 속에서 중심으로 자리 잡은 사유가 성리학과 사대부라는 것을 브리핑했고요. 역사적으로 성리학과 사대부는 중국적 정신 혹은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으로 여겨졌습니다. 송나라 이후 명나라에서는 유목민에게 빼앗겼으나 다시 ‘회복하고 이어받아야 할 전통’으로,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는 ‘청산해야 할 봉건적 잔재’로 지목될 만큼, 중국 역사에서 성리학과 사대부가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성리학과 사대부가 ‘중국적인 위상’을 갖게 된 건 송나라, 그것도 남송 중기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성리학의 사유가 다른 것들보다 더 뛰어나서, 더 중국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수많은 우발들이 겹치고 겹친 결과였죠. 어떻게 성리학과 사대부가 그러한 위상을 갖게 됐는지 간단하게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크게 두 가지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유학이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갈래를 낳게 된 흐름과 (2) ‘성리학’이 시대적으로 요청받게 된 흐름입니다. 먼저 ‘성리학’의 탄생 배경부터 살펴보자면, 성리학은 유학이 도교와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유들과 접속하면서 변형된 결과입니다. 이전까지 유학에서는 우주와 개체의 관계, 구원과 자유, 성인이 되기 위한 수양, 본성이나 진리 등 형이상학적 담론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질 않았습니다. 이는 다른 철학들에 비해 크게 뒤쳐지는 점이었습니다. 논리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유학자들은 다른 철학들의 논리를 참고해서 유학만의 형이상학적 담론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북송시대의 다섯 스승들’, ‘북송오자(北宋五子)’입니다. 성리학이란 이름은 ‘본성은 곧 리다(性卽理)’라는 형이상학적 통찰이 담긴 주장에서 비롯됐는데요. 북송오자들의 작업에 바탕해서 탄생한 것이죠.
그런데 성리학이 처음부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송나라의 수많은 통치자들은 성리학의 도교와 불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당장의 실용적인 것보다 개인의 수양을 추구하는 가치관 등 때문에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대표적 성리학자 주희만 하더라도 당대 지식인들로부터 ‘공허하고 헛된 가치를 좇는다’고 비판을 받을 정도였죠. 그랬던 성리학이 주변 유목 국가들의 자발적 ‘중국화’ 덕분에 송나라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유목 국가들은 ‘한족’의 국가 통치 기술이 매우 탁월하다는 것을 알았고, 한족 인재를 등용하면서 그들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미 땅까지 빼앗기고 남쪽으로 쫓겨난 남송의 입장에서 이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보할 최후의 근거인 ‘문화적 정체성’까지 빼앗기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좀 더 외부와 대립적인 사유가 필요했고, 당시 성리학은 이러한 요구에 딱 들어맞았죠. 도교와 불교를 비롯한 이단들에 대한 성리학의 거침없는 비판은, 이민족에 대해 갖는 송나라의 원한과 짝이 맞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비록 성리학은 여전히 전쟁 기술 같은 것보다 백성의 마음, 개인의 수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답답했지만, 이미 남송의 상황은 더없이 답답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암울한 시대를 다르게 해석할 관점이 필요했습니다. 언젠가 중국의 땅을 되찾겠다는 송나라의 염원은 언젠가 중국인들의 정신에 뿌리내리길 바라는 성리학의 바람과 통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유학이 성리학으로 바뀌고, 성리학이 중국적인 것의 위상을 차지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유목민, 중국 바깥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국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정신, 정체성조차 중국적이지 않은 것과의 섞임에 바탕해 있었던 것이죠.
2.<수호전>을 읽는 다양한 관점들
이탁오는 <수호전>에서 ‘충의’를 읽었고, 김성탄은 ‘도적에 대한 징치’를 읽었죠. 비록 저희는 김성탄의 편집본을 읽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물들의 행적에서 충의가 느껴진다는 선생님들도 계셨습니다. 덕분에 토론할 때도 각자의 관점 속에서 <수호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먼저, ‘충의’를 주제로 한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로 <수호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수호전>의 영웅들이 모이는 장소인 양산박은 사실 도적들의 소굴입니다. 원래 양산박의 도적들도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이 사람들을 해치고 재물을 빼앗았는데요. 여기에 호걸들이 하나둘 모이고, 두령이 바뀌면서 점점 보통의 도적들과 다른 체계, 신념, 규율이 확립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새로운 두령 조개의 규율이었죠.
“사람을 죽였느냐?”
“상인들이 우리의 사나운 기세를 보고 수레, 버새, 짐을 모두 버리고 도망가서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조개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는 오늘부터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255)
똑같은 도적이지만, 이 도적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관리들이 자기 부하를 함부로 대하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죠. 폭력을 쓰더라도 자기만의 이익을 위하는 소인배는 아니었습니다. 이전의 도적들이 두령 혹은 자기 혼자만 전리품을 차차지하는 소인배들이었다면, 양산박에 모이는 호걸들은 가진 것을 말단 부하들과도 나누는 대인배들입니다. 비록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고 오랜 시간 연을 맺은 것도 아니지만, 이들은 이전 자신들이 맺었던 그 어떤 인연보다 더 끈끈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죠. 여기에서 단순히 도적들이 보여줄 수 없는 어떤 탁월함이 있는 거죠.
반면에 ‘도적들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양산박이 아무리 ‘충의’를 표방해도 결국 백성들의 것을 수탈한다는 점에서 결국 ‘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즉, ‘관’과 ‘양산박’ 둘 다 똑같은 도적들이고, 백성들은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이번에 이런 관점에서 <수호전>을 읽게 됐는데요. 양산박으로 몰려드는 호걸들은 모두 과거에 장수였거나 장수가 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호걸들이 그렇게 양산박으로 가게 되는 시대적 상황보다 양산박의 호걸들과 관의 장수들이 싸우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말단 부하들과 주위의 백성들입니다. 호걸들은 결국 관에 있든 양산박에 있든 나름대로 잘 살아갑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어서 도적도 되지 못하고, 도적과 관 양쪽에 끊임없이 착취당하며 살아갑니다. 이번에 유독 그런 인물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임충에게 은혜를 입었지만, 그의 불같은 성정을 두려워하는 평민 이소이, 조개와 같이 떠나지 않아서 매를 맞고 만 장객들, 자유를 찾기 위해 송강을 도발했다가 죽어버린 염파석. 다른 사람을 착취하면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본인의 삶이 억울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억울함을 토로할 데도 없고 토로해도 바뀌지 않는 처지의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수호전>에는 이 세 종류의 삶이 같이 섞여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 권에서 또 어떤 사람들이 억압받는지에 주목해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이밖에도 우리가 <수호전>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는 뛰어난 글쓰기에 대해 나누기도 했는데요. 각 인물에게 부여된 호(號)가 실제 인물의 행적과 반대된다는 것, 인물들을 길 위에서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한다는 것, 한 인물을 한 번은 멋있게 그렸다가 그 다음에 바로 치졸하게 그리는 서술을 반복한다는 것, 책 마지막에 궁금한 대사를 던지고 그 목소리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 등등이 있었습니다. 각자 글 쓸 때도 써먹어 보죠!
<수호전>의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할지는 계속 떠들어보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김성탄은 <수호전>의 인물들을 ‘충의’의 관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소설 속 인물들에게 ’멋찜‘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저는 ’노지심‘이라는 인물이 아주 매력적이었는데요. 관군에게도, 도적에게도, 어떤 이와 만나도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일을 보면 ’어린 아이‘처럼 앞뒤 계산없이, 두려움없이 행하는 게 대단해보였습니다. 김성탄이 그를 상상 등급의 인물로 평가한 것에는 마음에 잉여를 남기지 않는 태도를 높이 평가한 게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계속 읽어가면서 관군과 도적을 어떤 식으로 볼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도적은 작은 국가인가?! 아니면 도적은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로 볼 수 있는가?
이탁오의 서문은 <수호전> 인물들을 충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지만, 막상 <수호전>을 보면 어리둥절 하게 됩니다. <수호전>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관의 횡포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도적의 길로 들어서긴 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쉽게 '살인하고 방화하는' 사람들로 그려지고 그게 전혀 '충의'에 반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애매하게 법에 봉사하며 죽느니, 도적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이 통쾌하긴 하지만...한편으로는 수용하기 너무 어려운 직설적인 사람들^^;; 이들이 '사람 죽이지 않는 공동체'를 이룬다고 했을 때 '사람'에 해당되는 범위는 어느 정도인지, 그들의 충의는 무엇인지?! 이런저런 질문이 생겨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