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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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이역만리' 세미나가 개강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셔서 왁자지껄 했습니다. 대부분 온라인으로 오신 게 아쉽긴 하지만... 시간이 되시면 언제든 오프라인으로 참여해 주시죠~^^
이번 시간에는 <봉건사회> 1부 1책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봉건'을 '적폐'와 동의어처럼 씁니다. '봉건 철폐!' 같은 구호처럼 말입니다. 세계사에서도 봉건제가 지배하는 유럽은 영주의 압제로 고통받는 농노...이런 식의 이미지가 있지요. '암흑시기' 중세라고요. 15세기 '르네상스' 는 암흑시기를 지나온 유럽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라는 '빛'을 되찾은 시기라 생각하고요.
그런데 정말 중세 유럽은 '적폐'가 지배하던 시기에 불과하고, 유럽은 천년의 암흑 속에서 잠수하다 갑자기 '부활'한 땅인 걸까요? 천년동안 사람들은 암흑시기를 그냥 꾹 참고 살았던 걸까요? 천년간 유럽이 잠들어 있는 시기에 이웃의 이슬람 제국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들은 유럽을 가만~히 냅두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새삼스래 이 암흑시기의 유럽을 들여다보고 있을까요? 끝으로, 대체 <봉건사회>라는 책은 역사책이라는데 왜 얌전히 년도별로 사건을 제시하지 않고 여기저기 튀고 있을까요?(왜?!) 별별 궁금증을 안고, 이역만리 팀, 12주의 여정을 출발합니다~~
=이슬람의 탄생: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7세기 아랍은 크게 두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서쪽은 395년 둘로 갈라진 로마 중 하나인 동로마(일명 비잔티움)가, 동쪽은 사산 페르시아가 차지하고 있었죠. 두 강대한 제국은 무려 3세기동안 대치해왔고, 평화는 1세기에 불과했고 계속 분쟁이 있어왔습니다. 곤란해진 건 상인들입니다. 중국에서 출발해 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지는 오래된 무역로 실크로드는 딱 페르시아와 비잔티움을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두 제국이 으르렁대고 있어서야, 상인들은 안정적으로 그 길을 이용할 수 없게 된 거죠. 이때 새롭게 떠오른 무역로는 바로 아라비아 반도로 돌아가는 바닷길과 유황로였습니다. 비잔티움과 페르시아가 으르렁거리던 그 사이, 아라비아 반도로 상인들이 몰리며 무역도시가 형성됩니다. 그때 무역의 허브로 떠오른 도시가 바로 메카와 메디나였습니다.
비잔티움과 페르시아가 양분한 아랍
각지에서 온 상인들은 메카에 자신이 믿는 신의 신전을 세웁니다. 온갖 신앙을 앞세운 신전이 경쟁하듯 세워졌고, 그로 인해 메카는 돈을 법니다. 메카는 무역도시이자 '종교관광'의 허브가 된 거죠. 그때 무함마드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마흔살에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무함마드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신, 유일신 알라를 믿는 종교를 내세웁니다. 이슬람의 탄생입니다. 이슬람의 특징은, 특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신은 아무런 특색이 없습니다. 어떤 자연물을 닮지도 않았고, 인간적인 모습도 없지요. 어떤 특색으로도 환원되지 않기에 절대적인 신이 이슬람의 유일신 알라입니다. 이슬람은 '복종', 무슬림은 '신에 복종하는 자'라는 뜻이죠.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심플한 이슬람은 점점 세력을 넓혀갑니다. 각종 신앙의 경쟁으로 먹고 사는 메카 입장에서 무함마드는 눈엣가시였습니다. 결국 무함마드는 암살 위협을 받고 622년 메디나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곳에서 혈연과 지연에 상관없이 서로를 포용하는 정의로운 사회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슬람 공동체 '움마'의 결성인 거죠. 이슬람은 이 622년을 '헤지라'라고 하며 이슬람력의 시작으로 삼습니다. '헤지라'는 '단절'을 의미합니다. 계속되는 갈등과 복수의 연쇄로 얽힌 혈연과 지연으로부터 '단절'을 선언한 사람들의 공동체, 그것이 이슬람의 시작인 것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신 앞에 절대복종,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이루어왔던 혈연과 지연으로부터의 단절. 이러한 이슬람 공동체의 정신은 평등과 포용이라는 가치로 나타납니다. 어디를 지배하더라도 그들이 세금을 내고 이슬람 정부에 협력하기만 한다면 신앙과 지배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한 것입니다. 유일신 알라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내세웠습니다. 때문에 딱히 다른 신앙에 배타적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슬람의 평등은 비잔티움과 페르시아의 오랜 갈등, 그리고 부족간의 끊을 수 없는 경쟁과 복수가 이어지던 당시 중동에 요청되던 가치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이슬람은 100년만에 세력을 확장합니다.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이슬람의 '진출'은 로마가 무너지고 온갖 민족이 처들어와 난리통이 된 유럽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이자 '환경'이 됩니다.
=유럽과 기독교의 모호한 기원
이슬람 교도들에 승리를 거둔 카를 마르텔 휘하의 프랑크인들을 기꺼이 ‘유럽인’이라고 불렀던 8세기의 어느 에스파냐인 연대기 작가, 또는 그때부터 약 200년 뒤 헝가리인들을 물리친 오토 대제를 ‘유럽’의 해방자라고 열렬히 찬미하였던 작센의 수도사 비두킨트 등은 이미 다소 어렴풋하게나마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역사적인 내용을 가장 충실하게 담고 있는 바로 이같은 의미에서의 유럽은 중세 전기(前期)의 소산이었다. 유럽에서 진정한 의미의 봉건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유럽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봉건사회1> 67p)
732년, 이슬람은 파리 근처의 도시 푸아티에까지 밀고 들어옵니다. 카를 마르텔을 위시한 '유럽 연합군'은 이를 간신히 막아냅니다. 이때부터 800년간 이슬람은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하고 유럽을 '유럽'이게 하는 '환경'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유럽의 '환경'은 이슬람만 있지 않았습니다. 온갖 민족이 유럽을 압박합니다. 블로크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침략은 동시에 세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즉 남쪽에서는 이슬람 교도들, 곧 아랍인들 또는 아랍화된 복속민들이, 동쪽에서는 헝가리인들이, 그리고 북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침입해왔다."(<봉건사회1> p.78) 블로크는 이 포위당한 상태 속에서 '유럽'이라는 이름을 건져냅니다. 유럽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제국도 아닌 그들이 야만족이라 부르는 인적 '환경' 속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봉건사회>에서 말하는 유럽의 탄생은 우리가 아는 5대륙 중 하나를 차지하는 '유럽'과 완전 딴판입니다. '유럽'이란 어떤 문화권도 아니고, 혈통이나 왕조의 계승도 아닌, 온갖 세력이 얽히고 설키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와중에 기독교조차 기원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서유럽의 역사를 보면, 헝가리와 스칸디나비아인이 처들어오고, 싸우고, 정착하고, 함께 얽혀들어간 것이었는데요. 헝가리와 스칸디나비아인들은 기독교를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며 '유럽화'됩니다. 그런데 그때 기독교는, 필요하다면 북유럽 신에 기독교신의 이미지를 덧씌우기도 했습니다. 다신교를 믿던 북유럽 사람들이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인 이유는 많고 많은 신 중 하나로 인식했기 때문이지요. 즉 기독교는 절대적 신앙이나 집약된 교리 이전에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만드는 매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중대한 사실은 사회의 우두머리라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체계적인 방어조직을 강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자신의 생명이나 재산을 잃을 위험이 닥치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싸우려 드는 경향이 훨씬 더 강했고, 또 그들은 거의 하나같이 개인의 특수한 이해와 전체의 이해 사이의 긴밀한 관련성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봉건사회1> p.183)
마르크 블로크는 당시를 인간의 심성(心性)에 따라 정리합니다. 포위당한 상황, 인적 유대관계 속에서 유럽이 형성되고 유럽 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가 얼레벌레(^^) 퍼져나갑니다. 그 누구도 전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고립되지 않기 위해 움직였을 뿐이죠. 블로크에 따르면 '봉건적'이라는 말은 뚜렷한 기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지역은 이 혼란한 시대에 누군가에게 종속되고 싶은 마음을 앞세워 '봉건사회'가 성립되는가 하면 다른 어떤 지역은 침략자들이 피정복민들을 포섭하면서 성립되기도 했죠. 마르크 블로크는 '봉건적'이라는 말을 진짜 봉토를 기반으로 한 법과 제도를 가리키는 표현과,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심성을 공통되게 표현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장원이 봉토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즉 봉토라는 물권(物權)으로 이 천년을 정의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본 것이죠. 당시 사람들의 심성은 바로 어디에서 어떻게 침략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포위당한 땅'에 살고 있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결과 당시 사람들의 최우선과제는 어디든 소속되는 것. 고립되지 않기 위해 "사람과 사간의 종속관에서 비롯되는 유대관계"를 중시합니다. 블로크는 이 유대관계에 대한 집착이 봉토보다 우선시되는 '봉건사회'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중세시대의 신종선서를 표현한 그림: 봉건사회의 핵심, 인적 종속관계
블로크의 역사 쓰기는 유럽'이라는 관념이 사실 허구이며, 그때 이후 더 나아지고 있다는 계몽주의적 역사의식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중세 유럽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정적 의미의 '봉건적'인 사회였던 것도 아니고, 근대가 그런 봉건적인 사회를 극복하고 발전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유럽이라는 심상지리의 기원조차 사실 모호하기 짝이 없고, 사실 있지도 않았다는 것조차 말입니다. 블로크가 이런 작업을 하던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입니다. 유럽이 제딴에는 봉건적인 과거를 극복하고 근대를 이룩하고 미개지들을 발전시킨다며 으스대던 때, 서로를 무참히 죽이기 시작한 거죠. 이때 블로크는 '암흑시대' 유럽을 발굴하며 역사를 통해 자신이 살던 지반을 새로 보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지대의 기원은 애매한 회색, 혹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죠. <봉건사회>를 읽다보면, 자신이 사는 시대를 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효용이라는 블로크님의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봉건사회1> 1부 2책(308쪽)까지 읽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