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마르크 블로크는 중세 봉건사회를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한된 사료들을 가지고 이렇게 생생하게 그 시대를 설명할 수는 없을 거니까요. 덕분에 저희도 봉건사회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이해해야 할 난해한 이론이나 개념 같은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조금씩 다르게 블로크를 읽고 있습니다. 마치(?) 블로크가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관점 속에서 봉건사회를 그렸던 것처럼, 저희도 애정을 가지고 블로크의 서술을 따라가려 한 결과일까요? 어쨌든 각자 속도는 다르지만, 조금씩 블로크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죠? ㅎ
공지부터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2부 1책(313쪽)부터 2책 5장(499쪽)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분량이 쪼~금 많긴 하지만, 그만큼 흥미진진한 블로크의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겠죠?
비(非)유럽이 아닌 또 하나의 세계
역사를 볼수록 현재 우리가 이해한 것과 다른 세계를 목격하게 되는데요. 이슬람과 기독교의 세계의 만남도 그랬습니다. 역사학자 이언 아몬드는 《십자가 초승달 동맹》에서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다름을 인식하는 한편 다양하게 섞이기도 했음을 지적합니다. 후대에 와서 역사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공존 불가능함 같은 관념이 발명된 것이지 처음부터 그런 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블로크의 《봉건사회》를 읽고 있는 저희는 아직 ‘유럽’이란 심상이 구체적으로 생기지도 않았다는 걸 알고 있죠. 따라서 후대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유럽의 세계에 경종을 울렸다고 하는데, 이건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역사가의 관점에서 정리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을 만들었던 외부들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세포막이 세포의 내외부의 경계이자 소통의 산물로 있는 것처럼, 유럽 또한 외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역사에서 이슬람은 항상 부정적으로만 그려집니다. 이는 유럽 자신의 관점 속에서 자신들은 옳고, 자신들과 다른 이슬람은 틀리다고 평가한 결과인데요. 마치 신이 자신들에게 내린 시련처럼, 유럽의 정신을 부숴버리려는 외적이자 야만인, 광신도 집단으로 이슬람을 그립니다. 이건 이슬람을 잘못 이해할 뿐만 아니라 유럽 자신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는 것이죠. 따라서 봉건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저희는 계속해서 이슬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역사 브리핑으로 이슬람이 들어온 이유입니다. ㅎ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당시 이슬람이 유럽을 차지해야 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미 이슬람은 유럽보다 압도적으로 강대한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유럽에 굳이 눈독 들일 필요가 없었죠. 그리고 이슬람은 그 광대한 영토만큼이나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곳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은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등 성지(聖地)를 되찾아야 한다고 성전, 십자군 전쟁을 벌였지만, 이슬람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전쟁 중 하나로 유럽과 싸웠습니다. 당장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셀주크 제국의 역사만 살펴봐도 그걸 알 수 있습니다. 셀주크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세력을 다지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유럽’을 정복하기 위함이란 목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셀주크 제국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던가!? 이에 대해서는 다시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ㅎ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를 자료에 적어놨으니, 읽어 보시다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유럽’의 탄생, 우연의 세계사
“서유럽 최후의 침입들에 관한 연구가 아무리 교훈에 차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훈 때문에 침입의 종언이라는 더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침입 종료에 이를 때까지, 외부에서 도래한 유랑민 무리에 의한 유린과 민족의 대이동은 참으로 여타 지역 역사의 기본 줄거리를 형성해놓았던 것이다. 이때 이후로 서유럽은 이민족의 침입을 면하게 된다. (…) 플로베츠인과 몽골족이 없었더라면 러시아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잠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서유럽과 일본만이 특권처럼 함께 누리고 있었을 뿐 그밖의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이례적인 면제혜택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나 더욱 심층적인 의미에서나, 유럽 문명의 기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해서 안 될 것이 없다.”(184~185)
지난 공지에도 나왔지만, 유럽은 우연의 산물입니다. ‘유럽’이란 공통된 정체성이 따로 형성돼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현재 유럽으로 묶이는 북유럽(스칸디나비아 반도)과 동유럽(발칸 반도의 동쪽)은 유럽을 위협하는 야만인들의 땅이었습니다. 이들과 계약을 맺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비유럽이 지금과 같은 유럽으로 묶인 것이었죠. 블로크는 이렇게 외부의 침입과 무관하게 유럽의 형성을 설명할 순 없지만, 또한 14세기부터 외부의 침입이 일어나지 않은 것 또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지적합니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 당시에 유럽을 침공하던 강력한 세력으로 몽골 제국이 있었는데요. 몽골 제국의 침략은 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몽골 제국의 네 번째 대칸인 뭉케 칸이 죽음으로써 흐지부지 마무리됐습니다. 다음 대칸의 자리를 놓고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몽골 제국이 거의 분열하다시피 되거든요. 이때부터 몽골은 정복 전쟁보다 서로에 대한 견제, 자신이 정복한 곳에 대한 통치 등 시선을 내부로 돌립니다. 유럽으로의 진격이 일단락된 건 이런 배경 때문이었죠. 블로크는 유럽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도, 몽골 제국이 ‘스치듯’ 지나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유럽은 위대한 정신, 빛나는 문명 같은 게 아니라 온갖 우연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탄생한 무엇인 것 같습니다.
블로크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과 같은 역사 서술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교과서에서는 주로 원인이 있고, 그래서 결과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흐름으로 서술하죠. 듣기에 그럴듯할 수 있지만, 사실 이건 결과에서부터 원인을 소급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이어지는 데 무엇이 가장 결정적이었는지 현재의 관점 속에서, 현재의 가치나 인식을 의심하지 않고 원인을 지목한 것이죠. 이런 식의 역사 서술에는 하나의 사건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얽혀 있는지, 세계는 경계가 없음에도 마치 다른 곳들의 영향이 없었던 것처럼 모두 생략합니다. 역사를 통해 지성을 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블로크의 입장에서는, 이런 식의 역사 공부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것이죠. 그리고 블로크를 읽는 저희의 입장에서도 그런 것 같고요. ㅎ
봉건시대 1기와 2기를 구분하는 기준
세미나 도중에 가장 풀리지 않았던 것은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요? 저희에게 익숙한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은 연대기적입니다. 연대기적 구분이란 1세기(0~99)와 2세기(100~199)처럼 세기가 변함에 따라 시대도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때 어떤 극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연대기적 구분에서 비롯된 사고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게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계를 자기 뜻대로 좌우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모를까, 1999년의 마지막 날에서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그 순간에 어떤 극적인 일이 갑자기 전조도 없이 나타날 리 없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다면, 바뀔 만한 동인(動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블로크는 시대를 바꾸는 동인을 여러 가지 사회적 변화가 우연히 일어나고 상호작용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대표적으로 봉건시대는 여러 가지 우연 속에서 탄생했죠. 그런데 블로크는 이 우연들이 또 다시 겹쳐서 봉건시대를 두 가지 시기로 구분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한편 ‘봉건적인 문명’이 그 시대 속에서 연속성을 지니는 단일체로서만 존재한 것으로 취급한다면 크나큰 잘못이 될 것이다. 지극히 심층적이고도 일반적인 일련의 변화가 11세기 중엽에 일어났다. 이 변화는 분명히 최후의 이민족 침입이 종료되면서 유발되었다고, 또는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위대한 사실의 결과이면서도 이보다 몇 세대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과거와의 단절은 아니고 방향의 전환이었는데, 고찰의 대상이 되는 지방과 현상에 따라 불가피하게 시간적 편차가 있는 했지만 차례로 사회적 활동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로 아주 다른 기본적 특성을 가진 두 개의 연속적인 ‘봉건’ 시대가 있었다.”(191)
블로크는 봉건시대가 단일한 시대가 아니라 크게 두 가지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하죠. 교과서적으로 정리하면, 대략 800년부터 1050년까지가 봉건시대 1기, 1050~1250년을 봉건시대 2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시기로 구분하는 이유는 사회 전반적으로 눈에 띄는 변화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제를 지배하는 상인계층의 등장, 외부 세계와의 교역에서 흑자를 보기 시작한 것(혹은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 운송 능률이 크게 일어나서 유럽 전역의 네트워크가 긴밀해진 것 등 분명 이전과는 다른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블로크는 이 모든 것과 연관되는 공통된 원인으로 ‘인구 증가’를 꼽고, 이는 곧 새로운 형태의 권력과 밀접하다고 설명하죠. 이번 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권력이 등장했는지 자세하게 얘기되진 않았지만, 하나의 시대 또한 여러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면, 블로크는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1050년부터 이전과 다른 사회적 변화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얘기하진 않습니다. 또, 봉건시대 2기가 1보다 더 살기 좋은 시대라고 무작정 옹호하지도 않습니다. 2기는 어떤 점에서 1기와 연결되기도 하고, 1기의 어떤 특징이 약화되거나 강회되었습니다. 연대기적으로 딱 떨어질 수 없는 단절이 지역마다 불균등하게 나타나면서 또한 공통된 흐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블로크의 시기를 구분하는 건 종합적으로만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블로크가 시기를 구분하는 방식은 좀 더 읽고 얘기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