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를 더 재밌게 읽기 위해, 동시대의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함께 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전까지는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슬람 세계를 주도했던 ‘셀주크 제국’의 역사를 공부했다면, 이번에는 ‘십자군 전쟁’에 주목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배경과 진행 과정을 공부하면서, <봉건사회>에서 읽은 내용과 ‘마이너 세계사’ 세미나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용이 겹쳐져서 참 즐거웠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면 파편들로 흩어져 있는 과거의 사건들이 하나씩 연결되면서 보이는 게 아주 쏠쏠한 재미인 것 같습니다. 작년부터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역사의 주요한 사건들을 하나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좋은 기회로 ‘십자군 전쟁’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십자군 전쟁은 이름만 들어봤지 어떤 식으로 흘러왔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저에게는 십자군 전쟁에 대한 강한 이미지 하나만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일어난 ‘종교 전쟁’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저는 전장의 한쪽 귀퉁이엔 기독교 병사들이 있고, 반대 편에는 이슬람 병사들이 대치하고, 서로 치열하게 공방하는 모습만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역사학자 ‘이언 아몬드’의 책을 읽고, 제 생각은 강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역사학자 ‘이언 아몬드’는 십자군 전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와 ‘이슬람’이 뚜렷하게 분할되어서 싸운 게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 기독교인과 이슬람인은 같은 부대에 소속되어 공동의 적과 싸우기도 하고, 기독교 국가와 무슬림 국가가 서로 동맹을 맺고 다른 기독교 혹은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는 상황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오직 신앙으로 묶인 게 아니었습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같은 언어를 공유하 친구와 함께 싸우기도 하고, 아니면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싸우기도 했습니다. 현재 주류적인 세계사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으로 이야기하고, ‘우리 유럽인’이 ‘이슬람’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미개, 폭력, 파괴) 이미지를 재생산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다시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은 두 항으로 분명히 나뉘어 싸운 게 아니라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단결하고, 협렵하고, 섞여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것을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아니라 상호교차의 역사로 보아야 지금 우리의 시선을 확대하고 변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서유럽의 위상은?
저희에게 유럽은 다른 문명보다 항상 앞서나갔을 거라는, 적어도 뒤처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 그 환상이 아주 간단히 깨집니다. 중세 서유럽은 사실 세계사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마르크 블로크에 따르면, 중세 서유럽은 ‘봉건시대 제1기’와 ‘봉건시대 제2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봉건시대 제1기’는 헝가리, 마자르인, 무슬림, 스칸디나비아인 등 사방에서 등장한 침략자들로 인해서 폐허가 된 상태로부터 출발합니다. ‘봉건시대 제1기’ 때, 서유럽은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상태였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빈번한 죽음과 비참함 속에서 ‘현실’보다는 ‘내세’를 믿기 시작합니다. 불타고 무너진 도시, 도시 밖은 산적과 강도들이 우글거리고, 도로는 오가는 사람, 정비하는 사람이 없어 ‘흔적’으로만 남아 있고, 다른 문명과의 교역도 거의 없었던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흥미롭게도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슬람 세계에서는 서유럽의 존재를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원시적인 사람들이 사는 원시림이 거의 전부라고 생각했죠. 당시 서유럽은 제국이랄 것이 없었고, 봉건 영주가 자기 지역에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11세기부터 서유럽 세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댔기 때문입니다. 블로크는 <봉건사회>에서 이 시기를 ‘봉건시대 제2기’라고 부릅니다. 이때 주요 기술혁신으로 1) 묵직한 쟁기의 발명 2) 말 가슴걸이 멍에의 개발 3) 삼포작 방식의 도입이 있습니다. 기술 혁신으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고, 인구가 급속도로 상승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다른 지역과 교류가 늘고, 서유럽에 동방의 풍요로운 세계에 대한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내부적으로는 인구증가로 인해 힘이 팽창하려고 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셀주크 튀르크 세력이 비잔티움 땅을 짓밟고 기독교 세계에 위협을 가합니다.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이 뒤엉켜 있는 중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종교 전쟁’을 선포하고 예루살렘의 탈환을 목표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됩니다. 서유럽의 입장에서는 십자군 전쟁은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의 역사에서 십자군은 그닥 인상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그 지역 내에서 서로 간에 전쟁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작은 자연재해 정도로 평가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슬람 세계의 깊숙한 곳(메카, 메디나, 바그다드 등등)까지 침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의 영향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역사적 흐름으로 봤을 때 서유럽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상인의 길이 열리고, 인도제도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십자군 전쟁은 이후 대항해 시대를 여는 하나의 계기가 됩니다.
사람과 사람의 유대 관계 : 1) 혈족의 연대
이번주에 읽은 부분은 <봉건사회>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마르크 블로크가 ‘왜 봉건사회를 주목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지만, 마르크 블로크가 그리는 봉건사회의 모습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앞으로 읽어가면서 풀어갈 예정입니다) 마르크 블로크 이전에도 ‘봉건체제’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많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봉건체제’를 군사제도적 측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파악합니다. 또 다른 이론가들은 가신과 영주 간의 관계, 즉 주종제(가신제)를 쌍무계약관계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마르크 블로크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서도, 봉건제를 최대한 ‘인간관계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법과 제도로 포획할 수 없고, 법과 제도를 가볍게 뛰어넘는 ‘인간관계’의 모습들.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딜레마 상황을 보면서 봉건 사회가 어떤 식으로 형성됐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키득키득 웃기도 했답니다. 중세에는 봉건제보다 훨씬 오래도록 지속된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마르크 블로크는 그것을 ‘혈연공동체’라고 부르는데요. ‘혈연공동체’의 주요한 특징으로 봉건제의 주종 관계처럼 확실한 위계 관계를 갖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혈연공동체는 ‘육친의 벗’ = 진정한 우정 관계로 정의합니다. 과거 혈연공동체가 중요했던 이유는 ‘생존’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혈연공동체에 속해있어야 ‘사적 복수’의 세계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고, 먹고 사는 길이 끊기거나 다치는 일이 생겼을 때 돌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혈연공동체’라는 유대관계에서 ‘봉건제’로 이행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마르크 블로크는 ‘폭력’으로 가득찼던 사회 분위기(동쪽-헝가리인, 북쪽-스칸디나비아인, 남쪽-무슬림의 침략)를 원인으로 봅니다. 사방에서 침략해오고, 혼란한 상황에서 혈연공동체는 충분한 보호를 제공해주지 못했습니다. 친족의 범위가 너무나 막연하고, 유동적이었고, 상업의 발달과 교회의 영향으로 유대 관계가 조금씩 약해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강력한 공권력이 있어서 자신들을 보호해주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유대 관계를 찾거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유대 관계 : 2) 가신제와 봉토
“여기에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고 하자. 섬기기를 원하는 한 사람과 우두머리가 되기를 수락했거나 또는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는 또 한 사람 말이다. 전자는 두 손을 한데 모으고 이 맞붙여진 두 손을 후자의 두 손 안에 놓는다. 이는 종속의 명백한 상징이었으며 때로는 무릎을 꿇어서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와 동시에 두 손을 내민 사람은 자기가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의 ‘복속인’임을 자인할 만한 아주 짧은 몇 마디 말을 선언한다. 그런 다음 우두머리와 종속자는 서로의 입에 키스한다. 이는 곧 동의와 우정의 상징이다.” (마르크 블로크, <봉건사회1>, 한길사, 357쪽)
이것이 바로 봉건시대에 알려진 가장 강력한 사회적 유대 가운데 하나를 맺는 데에 역할하였던 몸짓들로, 이 의식은 ‘신종선서’라 불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이게 어떻게 관계를 이어주는지 의문이 들지만, 그 당시에는 이러한 의식은 두 사람을 밀접하게 결합시켜주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신종선서는 종속과 보호라는 그 이중의 측면에서 진정으로 창출된 것입니다. ‘봉건제’는 누군가 한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 관계가 아닙니다. “자기의 보호자를 구한다는 것과 기꺼이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것, 이는 어느 시대에나 찾아볼 수 있는 갈망”(361)이라고 블로크는 말합니다. 약한 자는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몸을 맡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강한 자도 자기를 도와줄 하급자가 있어서 위신과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는 일방적인 관계라기보다 상호 의존하는 관계를 형성해왔습니다. ‘봉건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은대지와 봉토’입니다. ‘은대지와 봉토’는 일반적인 토지와 개념적으로 다릅니다. ‘은대지와 봉토’는 “급여로서의 보유지”를 뜻합니다. 급여로 화폐가 아닌 토지를 준다는 것이 재미납니다. 이는 아마 ‘봉건사회 제1기’를 설명할 때, 그 시기에는 인구가 적고, 상업 활동이 거의 없어서 화폐의 쓰임이 적었고, 화폐를 보유하고 있는 일도 드물었다고 합니다. 봉건제도를 통해서 봉토를 가진 가신들이 늘어나면서 서유럽에는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우선, ‘상속’의 문제입니다. 신종선서는 두 개인만을 결합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두 가계를 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 이어서 충성관계를 이어받고, 봉토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영주도 세습되는 것에 적대적이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토지는 영주의 것인데, 봉토로 가신에게 넘겨준 이상 그 토지를 다시 회수하는 일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영주의 입장에서 가신들의 ‘세습’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에서 딜레마가 생기는 재미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백작이 아들 하나를 남기고 죽었는데 그 아들이 알프스 산 너머 원정군에 참여해 있는 경우, 두 번째로는 프랑스에 남아 있는 아들이 ‘너무 어린’ 경우는 대체로 세습을 인정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을 안정시키기 위함이 있었고, 두 번째는 땅을 다시 가져가는 건 어린 아이를 알거지로 만들어버리는 잔인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신종선서가 변질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가신이 여러 사람의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중세 구속력이 강했던 유대관계(가신제)가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이때에도 가신은 아주 재미난(머리 아픈?) 딜레마에 빠집니다. 자기가 섬기는 두 영주가 서로 전쟁을 하게 됐을 때, 가신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요? 얼마나 이런 상황이 많았던지 가신들은 나름의 기준을 설정합니다. 1) 연대순. 가장 먼저 바친 신종선서는 가장 최근에 바친 신종선서보다 우선적. 2) 가장 존경할 만한 영주란 가장 풍부한 봉토를 준 사람이라는 식의 사고방식. 3) 분쟁의 존재이유 그 자체를 선택의 시금석으로 삼는 경우. 하지만 이러한 관계를 계속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만든 관계가 ‘최우선 신종선서’입니다. 어떤 영주보다 최우선의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징표였는데요. 하지만 이것마저도 사실 흐지부지 됩니다. 가신들은 ‘최우선 신종선서’ 또한 여러 영주와 맺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주에는 봉건 사회의 인간 관계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있었는지 보는 재미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주에는 혜원샘이 십자군 전쟁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구요. <봉건사회>는 2부 2책 6장, 7장 + 3책 1장, 2장, 3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다음주에도 재미나게 떠들어봐요~~!!
누군가에게 속해 있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중세에 넘쳐났다는 게 너무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기사의 마음은 한 군주를 섬기기엔 너무 넓다(?)는 것까지...ㅋㅋㅋㅋㅋㅋ이중삼중 계약된 군주와 어떻게 관계를 풀어나갈지 정하는 기준을 읽으며 키득거렸던 게 기억나네요
민호
2023-10-27 10:35
위협은 넘치고 강력한 공권력이 존재하지 않아서 혈연을 넘어 여기저기 찔러대며 어떻게든 유대관계를 형성해야 했다는 게 신기하네요!
지금과 같은 국가가 없는 시대를 생각해보는데 영감이 될 것 같습니다~
박규창
2023-10-27 16:13
블로크의 서술을 따라가면서 '권력'에 대한 독특한 문제의식이 느껴집니다. 확실히 근대 이전에는 '개인'이란 존재는 동서를 막론하고 위태로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끄덕끄덕하면서 읽었는데요. 인상적이었던 건 영주 혹은 보호자는 그것을 요청하는 자들에 의해 탄생했고, 이들이 피보호자-가신이었다는 거였습니다. 영주의 권력은 가신들의 요청에 의해 성립-유지될 수 있었죠. 즉, 영주는 재물을 가지고 보호를 의탁하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보호를 요청하고 그에 대한 댓가로 재물(대표적으로 토지)을 받는 자, 계약에 의해 보호하는 자였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이 받은 것을 다시 나눠줌으로써 가신들(기사 포함)을 모으기도 했는데요. 중요한 건, 블로크의 시선은 영주의 권력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었는가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아요. 뭐랄까, 언뜻언뜻 푸코가 떠오르기도 하고, 다른 텍스트에서는 블로크의 문제의식이 어떤 것일지도 궁금해집니다.
누군가에게 속해 있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중세에 넘쳐났다는 게 너무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기사의 마음은 한 군주를 섬기기엔 너무 넓다(?)는 것까지...ㅋㅋㅋㅋㅋㅋ이중삼중 계약된 군주와 어떻게 관계를 풀어나갈지 정하는 기준을 읽으며 키득거렸던 게 기억나네요
위협은 넘치고 강력한 공권력이 존재하지 않아서 혈연을 넘어 여기저기 찔러대며 어떻게든 유대관계를 형성해야 했다는 게 신기하네요!
지금과 같은 국가가 없는 시대를 생각해보는데 영감이 될 것 같습니다~
블로크의 서술을 따라가면서 '권력'에 대한 독특한 문제의식이 느껴집니다. 확실히 근대 이전에는 '개인'이란 존재는 동서를 막론하고 위태로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끄덕끄덕하면서 읽었는데요. 인상적이었던 건 영주 혹은 보호자는 그것을 요청하는 자들에 의해 탄생했고, 이들이 피보호자-가신이었다는 거였습니다. 영주의 권력은 가신들의 요청에 의해 성립-유지될 수 있었죠. 즉, 영주는 재물을 가지고 보호를 의탁하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보호를 요청하고 그에 대한 댓가로 재물(대표적으로 토지)을 받는 자, 계약에 의해 보호하는 자였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이 받은 것을 다시 나눠줌으로써 가신들(기사 포함)을 모으기도 했는데요. 중요한 건, 블로크의 시선은 영주의 권력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었는가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아요. 뭐랄까, 언뜻언뜻 푸코가 떠오르기도 하고, 다른 텍스트에서는 블로크의 문제의식이 어떤 것일지도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