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모저모
① 십자군, '세계'를 만나다
십자군은 소위 이슬람 제국으로 알려진 중동을 향해 서유럽이 '진격!'한 전쟁으로 많이들 알려져 있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문명의 충돌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이슬람의 눈으로 본다면 십자군은 작고 초라한 군중이 몇 세기 동안 성가시게 한 소란에 불과합니다. 우선 이슬람 제국은 너무나 컸고, 자기들끼리도 분열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십자군의 규모 따위는 바로 압도해 버리는 거대 세력이 이슬람 제국을 집어 삼켰기에 십자군은 큰 소란꺼리도 못되었죠. 거대세력이란 바로 바로 13세기 급속도로 확장한 몽골입니다. 동아시아에서 거침없이 달려온 몽골은 이슬람 제국을 삼키고 서유럽과 북아프리카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227년 칭기스칸이 죽고 주춤한 몽골의 서진은 1259년 4대 대칸 뭉케 칸의 죽음과 몽골의 분열로 더는 진전되지 못합니다. 그동안 십자군은 수시로 결성되어 성전 탈환을 위해 동쪽으로 갑니다. 공식 집계된 것만으로 9차까지 이루어진 십자군은, 유럽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몽골이 이룬 '세계'와 마주하게 됩니다.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까지 정복한 몽골이 잘 닦은 길과 역참은 서유럽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인도와 중국까지 인식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1294년)도 이 시기 몽골의 길과 역참을 이용한 여행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충돌이라기보다는 서유럽이 지중해라는 우물에서 나와 드디어 세상을 보게 된 사건이었다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십자군의 잦은 원정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은 막대한 부를 쌓게 됩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지중해를 배로 지나는 것이고, 그 항해술을 이탈리아의 두 항구도시가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죠. 제노바와 베네치아에 있어 십자군은 종교전쟁도 문명충돌도 뭣도 아닌 그저 경제적 이권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재밌게도 베네치아가 지원한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은 다름아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의 무슬림 지역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4차 십자군은 원래 비잔티움의 서열싸움에서 밀린 알렉시우스 4세(재위 1203년~1204년)이 끌어들인 '외세'였는데요, 문제는 약속한 돈을 알렉시우스 4세가 주지 못해서 그대로 도시에 눌러 앉아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온 돈 받으러 온 군인들이니, 시민들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죠. 그러다 이들이 늘 하던대로 무슬림 세력을 공격하니 시민들도 폭발한 것입니다. 이때 비잔티움은 '유럽'이라기보다는 '동양'에 가까웠고, 수도에 무슬림 세력이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동서 문화가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소란을 틈타 베네치아 상인들은 비잔티움의 보물을 빼돌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 안치합니다. 이들의 수완(?)은 장차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중세 유럽의 막을 내리는 문화적 전초가 됩니다. 고대의 '빛'을 되찾은 르네상스는 다름아닌 비잔티움이라는 '동양'을 전수받은 것이라 할 수 있지요.
② '짬뽕' 유럽
그런데 유럽, 유럽 하지만 사실 당시 유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요새'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특히 8세기부터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이 뒤섞여 있는 '짬뽕' 그 자체였죠. 특히 마지막까지 이슬람 세력이 남아 있었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지금도 그 독특한 건축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로를 중심에 둔 중정, 지붕의 이완, 아라베스크 무늬와 코란 캘리그라피로 장식된 불그스름한 외벽은 여기가 유럽인지 아니면 사막지방의 대저택인지 헷갈리게 하지요. (저의 로망 알함브라 궁전...!)
물론 이슬람이 지배하던 이베리아 반도에도 기독교 국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8세기부터 들어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를 11세기부터 전개합니다. 교황은 이 운동을 이베리아판 십자군 운동으로 정의하고, 그들에게 성지 탈환에 참전할 의무를 면제해 줍니다. 그런데 정말 이곳의 기독교국가들이 교황의 말처럼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하고 이슬람에 적대적이었을까요? 유감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반도까지 와서도 베르베르인과 아랍인 사이에 갈등이 있어 계속 싸웠고(본토에서 들인 버릇을 그만두지 못하고~~), 기독교 국가는 마치 관례처럼 그들 싸움을 지켜보다가 서로 다른 편에 붙어서 같이 싸웠거든요.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 국가 연합이 또 다른 기독교와 이슬람 국가 연합과 붙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492년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세력이 철수했고, 스페인이 가톨릭 국가가 되었으며,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가 있었다고 하니, 기독교 대 이슬람 서로 편갈라 싸웠겠거니 하는 건 지금 우리의 편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 초승달 동맹>의 저자 이언 아몬드는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를 '문명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여러 충돌들 속에서 몸살을 앓는 하나의 문명'이었다고 정의합니다. 우리는 여러 문명'들'을 관념으로 갖고 있지만, 역사를 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사후적으로 생겨난 것인지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베리아 반도의 (교황피셜) 십자군은 그래도 이슬람을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문제는 같은 유럽인,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십자군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1095년 1차 십자군에 앞서 제풀에 먼저 출발한 '군중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걸 보면 사실 유럽 대 이슬람 제국이라고 하기에, 11세기 유럽은 그런 학살을 막고 치안을 책임질 만한 국가 개념 자체가 희미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기독교도 사실 하나로 딱 정의내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분파가 있었습니다. 교황은 어떻게보면 가장 먼저 권력을 잡은 기독교세력의 수장일 뿐이었죠. 아무튼 이 교황이 1209년에도 십자군을 조직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군은 동쪽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다름아닌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지방으로 향하죠. 그 지방에 있는 알비와 카르카손이라는 도시에는 로마 가톨릭이 아닌 다른 기독교 분파인 카타리파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곳으로 십자군을 보내 도시를 파괴하고 카타리파 사람들을 벌거벗겨 도시 밖으로 내쫓습니다. 이 알비 십자군을 계기로 가톨릭의 이단 탄압은 더 극심해 집니다. 1230년대 교황은 이단심문관 제도를 도입해 '이단'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상시적인 십자군처럼 사용하며 중세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여기에는 사실 하나의 유럽도, 하나의 기독교도 없는, 온갖 힘들의 충돌만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십자군 자체도 사실은 '짬뽕'이었습니다. 사실상 마지막 십자군(그 이후로는 유의미한 결과가 없었기에)이라 할 수 있는 6차 십자군은 다름아닌 이슬람 세력이 '의뢰'해서 이루어진 원정이었습니다. 1227년 6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 프리드리히 2세는 사실 1225년 잘 알고 지내던(!) 이집트의 칼리프 알 카밀의 사신을 받았습니다. 알 카밀은 프리드리히에게 십자군 원정을 와 다마스쿠스의 자기랑 사이가 나쁜 다마스쿠스의 형제를 제거해주면 예루살렘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하지요. 이 말을 믿오 어쨌든 십자군을 한번 가야 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마성을 떠나 원정을 떠납니다. 그런데 웬걸! 프리드리히 2세가 성지에 닿기도 전에 알 카밀의 형제가 죽은 것입니다. 더는 십자군이 필요 없어진 알 카밀. 마음이 급한 건 프리드리히 2세였습니다. 그는 알 카밀을 구슬러 10년동안 예루살렘의 순례권을 임대할 것을 요청했고, 알 카밀은 그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최초의 무혈 십자군이자 최후의 십자군 성지...탈환? 임대? 아무튼 최후의 성과였습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의 십자군은 기독교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은 물론 무슬림 병사도 섞여 한편이 된 '짬뽕'이었죠. 게다가 의뢰인은 무슬림 칼리프이고, 원정대를 이끈 왕은 이슬람에 개방적이었습니다. 십자군은 결코 유럽으로도 기독교로도 환원될 수 없는 군사활동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십자군을 오히려 종교적 믿음을 가진 군대로 보고, 십자군이라는 말을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수사로 씁니다. 하지만 세계를 그렇게 동과 서, 기독교와 이슬람, 선과 악, 선의의 군대와 테러리스트로 나누어 보는 건 지금 우리의 관점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는 중세를 종교에 지배된 세계로 봅니다만, 어쩌면 이슬람/기독교를 나누고 그 당시의 '짬뽕'을 신기하게 보는 지금 우리의 시선이 더 경직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득'이 되는 관계
<봉건사회>는 드디어 1권을 다 읽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가신과 영주의 관계란 대체 무엇이길래, 대체 뭔 이득이 있길래 저렇게 못 붙어 있어서 안달인지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블로크의 '그러나'로점철된 서술은 오늘도 은*샘이 머리를 감싸쥐게 했지요. 도대체 이 사건의 당시의 주요 문제인줄 알았는데 블로크는 꼭 다음 문단에 '그러나 다른 지방은 아니었다'라고 단서를 달거든요. 그렇다고 꼭 다른 지방이 저 지방에 비해 뒤쳐졌다거나 앞서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유럽'은 각자 다른 페이스로, 하지만 부정부상태와 포위되었다는 공통적인 환경 속에서 인적 유대를 맺기 위한 심성으로 넘실거렸습니다. 가신과 영주의 관계는 그 심성이 가장 가시적으로 보이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사실 이들의 관계를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관계에서 이득을 갖는다는 건 결국 내 소유의 뭔가가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봉건사회의 가신들은 보물을 주고서라도 누군가에게 예속되고 싶어했고, 그 보물을 받는 영주 또한 다른 영주의 가신으로서 예속되길 원했습니다.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그 시기에 인적 교류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득이었기 때문입니다. "극도로 무정부적이었던 그 당시 사회에서 유력자의 후견을 받음으로써 정당하게든 부당하게든 확보될 수 있었떤 측량할 수 없으면서도 귀중한 여러 가지 이득"(<봉건사회1> , P.511)이 있었던 거죠. 이들의 관계는 서류로 공증되지도 않았고 어떤 증표가 오가지도 않았습니다. 있다면 서로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충성을 맹세하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현상들에 민감한 시대였던 그 당시 드높은 상징적 가치를 지니고 있던 존경의 동작"(P.506)은 그 자체로 영향력을 지닌 가치 있는 동작이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나 근거 없는 과정을 거쳐 도대체 알 수 없는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동작이지만, 사실 그들의 시선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득' 또한 뭔가를 무릅쓰고 얻어내는 알 수 없는 가치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서류로도 증거되지 않는 이 관계는 장중한 의식으로 성립됩니다. "이러한 계약을 성립하게 하였던 장중한 의식은 너무나도 막강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가장 악질적인 계약위반행위가 저질러진 경우에조차 이 계약의 효력을 소멸시킬 수 있으려면 반드시 계약 취소라는 역(逆)의 의식에 의거"(p.520)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 의식이라는 것은 지금 보면 참 재밌는데요, 자신을 이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상태로 만들어, 상대방으로부터 멀리 '던진다'라는 의미의 의식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멀리 '던지기', 혹은 망토에 붙어 있는 실오라기를 땅바닥에 격렬하게 집어'던지기' 같은 행위입니다. 봉건사회 사람들은 어떤 말과 글보다도, 눈에 직접 보이는 동작과 그것이 상징하고 함의하는 것에 가장 크게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죠.
원칙적으로 봉토는 '봉'이라는 이름의 영주가 가신에게 부여하는 의무와 자격에 가까웠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예속되고 책임을 진다는 계약을 통해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그 시대를 헤쳐나가는 한 단위로 뭉치게 된 것이죠. '봉토'란 이 계약관계를 매개하는 토지에 불과했습니다. '불과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당시 토지 자체보다는 의무를 지고 그곳을 운영할 인력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영주 입장에서는 토지보다는 토지를 경작해 그곳에서 뭔가를 생산하는 인력이 있는 편이 나았고, 개간할 황무지는 많았습니다. 영주 입장에서는 가신을 확보하는 편이 좋았죠. 또 가신은 원칙적으로 영주에게 봉사를 바치는 급여 개념으로 토지를 받았기 때문에, 만약 이 계약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면 토지는 반환해야 했습니다. 이 일련의 관계의 특징은 "진정으로 시종일관하고 효율적인 사법제도를 구축할 능력이 없었"(P.523)으며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관계"(p.515)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관된 법 체계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도 아니고, 어떤 영주도 다른 누군가에게 가신이 되라고 억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예속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것은 군무(軍務)였습니다. 가신이 영주에게 의무를 바치면서 성립되는 아래로부터의 관계였던 것이죠. 이때 토지는 구실 혹은 관계의 매개일 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블로크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사료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료도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기록된 것일 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사나 신사 하면 영주에게 충성하고 약자에게 친절하고 정의로운 존재를 떠올리지만, 사실 그런 건 문학속의 이야기였다고 블로크는 말합니다. 신종선서에서 읊조리는 "당신의 친구는 나의 친구가, 당신의 적은 나의 적이 될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노래하는 문학의 한 구절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사들의 무훈담의 주인공은 사실 다수의 영주를 섬기는 가신이었습니다. "그 서사시들 자체야말로 가신들을 영주들에게 대항해서 싸우도록 밀어넣은 전투들의 기나긴 이야기에 지나지 않은 것"(p.533)이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이해관계를 두고 상충하게 되는 관계에 놓이게 되는 사람은 다름아닌 같은 물레방아를 쓰는 기사와 영주들이었습니다. 이때 가신은 "전쟁을 하게 되는 온갖 경우들 중에서도 자기 영주에 대항하여 무기를 드는 경우가 가장 먼저" (p.534)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기사문학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기사는 한줌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럼 이때 사람들은 왜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다르게 살았을까요? 하지만 블로크는 그 모순을 크게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봉건시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전통에 집착하면서도 난폭한 풍습과 불안정한 성격 때문에 매사에서 꾸준한 마음으로 규칙에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규칙을 형식적으로 존경하는 방향으로 훨씬 심하게 기울어져 있"(p.535)었을 뿐이죠. 즉 봉건시대의 모순은 형식에 대한 존경과 그렇지 못한 사법제도의 콜라보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비호감' 기사의 '꼴값'이 나오는 영화 <라스트듀얼>
=가신제의 역설
인적 결속이 핵심인 봉건제도에 화폐의 유통량이 늘어나고 봉토가 세습되기 시작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양적으로 측정 가능하고 사유 가능한 재산이 늘어나자, 더는 의무가 그들 사이의 결속은 의무가 아니라 돈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신은 군무를 지는 대신 돈을 지불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습되는 토지가 생겨나기 시작하자 영주의 입장은 자기 입장처럼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 "소송 당사자인 영주의 가신이 법정에 배석하여 자기 주인을 위해 공정하지 못한 판결을 내릴 우려가 있는 것은 이 가신이 당대한(當代限)의 봉토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뿐이라고 간주되"며 "세습되는 결속관계라는 것은 이 당시 이렇게도 무력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p.537)었습니다. 봉토가 세습된다는 것은 봉토의 상속인이 같은 영주에게 신종선서를 바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때 상속인의 목적은 더이상 영주에 대한 예속이 아니라 봉토의 유지로 바뀝니다. 게다가 이런 신종선서를 바친 영주가 여러 명 있다보니, 봉건제의 유대는 자연스럽게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습 봉토를 받은 가신은 점점 토지 임차인이 되어갔지요.
여기까지 본다면, 도대체 그럼 군무를 지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고결한 기사는 누구였나? 있기는 했나?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블로크는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을 말해줍니다. 그런 기사가 있긴 했습니다. 바로 젊고, 돈 없고, 약한 사람들이었죠. 충성스러운 종복은 문자 그대로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둘 이상의 신종선서 또는 적어도 둘 이상의 최우선 신종선서에 따라 몇 군데씩이나 토지를 받아 보유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였고,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보호받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그 시대의 대사건에는 거의 끼여들지 못하는 존재"(p.540)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귀한 기사정신을 내세우는 기사들은 사실상 돈을 의무를 때우며 다른 쪽으로 배를 불리는 토지 임차인이고, 정작 그 가치와 의무는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이 떠받들고 이행하는 역설이 있었던 거죠. 이 역설을 읽으며 우리는 '원탁의 기사들은 다 뻥이었어!' 하고 즐거워(?) 했습니다...ㅋㅋㅋㅋ 역사를 읽으면 우리가 멋대로 상상하던 그 시대의 이면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수다를 떨지! 기대해 보겠습니다~~
다음 시간은 <봉건사회2> 1책을 읽어옵니다.
다음 시간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