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공부는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5~7장이다. 저자 E.P 톰슨은 이 부분에서 잉글랜드 혁명기(1792~1830)의 노동 대중의 삶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당시의 주요 개혁 인물과 사료, 편지, 시, 인쇄물, 법정 진술, 노동자의 일기와 통계 등등의 엄청난 자료를 인용하여 세세하고 충실하게 기술한다. 그러나 나는 그 긴 내용을 읽으며 자꾸 대한민국도 아닌 영국 노동 대중의 혁명과 투쟁에 대해 내가 이토록 속속들이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청샘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저자는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의 치열함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자세하게 쓰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더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마도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무엇인가가 나타나고 형성되는 것이 그저 단순하고 명확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 세세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5장 자유의 나무 심기
5장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존 셀월이다. 그는 이론선동가인데 그의 급진주의는 영국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인 토머스 페인에게 한정되어 있었지만 해박한 눈으로 프랑스 혁명과 영국의 사회 문제들을 바라봤고 일관성 있는 이데올로기를 지녔다.
프랑스 혁명에서 내가 찬양하는 것은 이런 점입니다. 즉 오랜 악폐들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 되었더라도 그 때문에 미덕이 될 수 없다는 것...인간은 어떠한 법령이나 관례로도 빼앗아버릴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지성을 가진 존재는 그들의 지성을 활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 사회의 한 계층이 지금까지 아무리 오랜 세월에 걸쳐 공동사회 내 다른 집단들을 약탈, 유린하고 억압하는 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 ...등이 혁명의 원칙으로 높이 올려세워지고 또한 전파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내가 찬탄하는 원칙들이며 나로 하여금 그 모든 과도한 면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환호하며 맞아들이게끔 하는 원칙들인 것입니다. (224쪽)
그는 당시 자꼬뱅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토지국유화, 만민동권정(萬民同權政, 일종의 농업공동체적 유토피아)적 계획들이 현실과 거리가 먼 공론적임을 비판하면서 고용주의 이윤에 비례하여 노동자들이 나눠가질 수 있는 권리, 노동자의 자녀들도 사회 최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교육의 권리, 8시간 노동의 표준 등 당시의 노동계급을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발상과 제안을 했다.
나는 노동의 산물을 일반적으로 분배할 때 모든 남자, 모든 여자, 그리고 모든 어린이가 음식과 누더기 그리고 초라한 이불이 딸린 형편없는 그물 침대에 그치지 않는 그 이상의 것을 받아야 한다고, 그것도 여섯 살 때부터 예순 살이 될 때까지 하루 열두 시간에서 열네 시간씩 일하지 않고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안락과 오락에 대한 청구권을,...자신들의 권리들을 이해하게끔 도와주는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여가시간에 대한 청구권을, 그리고 자신들의 권리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자체나 혹은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에 대한 청구권을, 신성하고도 불가침한 청구권을 가지고 있다...(226쪽)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지금 우리나라 곳곳에서 숨어서 일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 노동자도 속으로는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를 비난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21C의 대한민국의 대접이 200년 전의 영국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한편 부끄럽고 한편 안타까웠다.
저자는 영국 대중의 지난 했던 민주주의 투쟁을 담은 이 5장의 제목을 ’자유의 나무 심기‘로 명명했다. 소현샘은 혜원샘의 추천으로 본 영화 ‘나의 올드 오크’의 홍보 포스터에서 나무가 그려진 그림을 보았는데 그게 자유의 나무인 듯하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영국인에게는 자유의 나무라는 어떤 구체적인 모습의 상상의 나무가 있는걸까? 하긴 프랑스 자코뱅도 자신이 자코뱅임을 표현하는 도안을 뱃지를 달거나 단추에 새겨 이걸 단 옷을 입었다는 데 ‘생득권을 가지고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에게 자유의 나무라는 상상의 이미지가 없을 리야. 그렇다면 5장의 제목은 그것과의 연관으로 붙여졌는지도 모르겠다.
6장 착취
6장은 산업혁명의 결과물인 공장과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제목은 착취다. E.P 톰슨은 “착취관계는 불만과 상호대립을 합친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하는 하나의 관계이며 그 형태는 거기에 상응하는 소유 및 권가 권력의 형태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283)
그렇다면 산업혁명의 경영 방식은 착취다. 이유는 노동으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려면 인간적 속성은 억압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내가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의 마스터와 방적공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거리가 런던의 일급 상인과 그의 가장 낮은 하인 또는 최하위 장인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거리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정말 비교가 안된다. 나는 대부분의 방적업 마스터들이 방적공들을 가난과 무기력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잉여분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기 위해 낮은 임금을 유지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임을 안다. (279)
이런 생산 관계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속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위치나 불합리에 대한 불만을 인식하고 표출하자 여기에 억압, 제재, 통제, 착취, 탄압 등이 출현하면서 갈등과 대립, 대결과 충돌이 생산되고 그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으로의 인식 전환으로 노동자라는 하나의 계급이 형성된 것이다.
1790년과 1830년 사이의 두드러진 사실은 노동계급의 형성이다. 이것은 첫째 계급의식의 성장에서, 즉 이 다양한 모든 노동 대중 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동일하고 타 계급등의 이해관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의식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둘째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산업적 조직 형태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1832년에 이르면 토대가 굳건하고 자기 의식적인 노동계급의 제도들 –노동조합, 공제조합, 교육 및 종교운동, 정치조직, 정기간행물들---, 노동계급의 지적 전통・노동계급의 지역공동체 패턴・노동계급의 감정구조가 있었다. (272)
따라서 노동계급의 형성은 정치사적・문화사적 사실이다.
산업혁명의 변화하는 생산 관계와 노동 조건은 페인이 버리고 떠난, 또한 감리교도들이 틀을 만들어 낸 바로 그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에게 작용했다. 공장일꾼이나 양말 제조공은 번연의 후계자였고 대대로 내려오는 촌락 공동체의 여러 권리,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개념과 정치적 전통의 창출자였다. 노동계급은 만들어진 만큼 그 스스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저자는 이 시기 잉글랜드에는 인구 증가, 산업혁명, 정치적 반혁명(1792~1832)이라는 세 개의 힘이 동시에 작용했다고 쓰고 있는데 정랑 샘은 인구증가의 원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셨다. 후기를 쓰다 보니 ‘1840년에 이르러 그들은 50년 전의 선조들보다 물질적으로 나아졌으나’(293)라는 문장이 보인다. 인구가 증가한 원인은 물질적으로 다소 풍요해진 때문이었나 보다. 암튼 노동계급의 의식과 제도의 형성에는 정치적 맥락의 영향이 컸다.
농업 인클로져의 시기(1760~1820년)에는 촌락의 공동권이 상실되고 가내공업에서는 소마스터들이 대고용주에게 굴복했으며 직조공들은 선대제 노동자로 전락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기업・새로운 규율을 갖춘 공장제도・공장 공동체들의 착취로 노동자들은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탄압을 동시에 겪었다. 이런 이유로 노동자들은 서로 뭉쳐 저항했다.
자꼬뱅주의는 장인들이, 러다이트 운동은 소 작업장의 숙련 기술자들이 행한 일이었고 1817년부터 차티스트 운동에 이르기까지는 선대제 노동자들과 공장일꾼들이 급진적 운동에 앞장섰으며 도시의 노동운동에서 사상, 조직, 지도력 제공의 핵심 세력은 제화공, 직조공, 인쇄공, 건축 노동자들 등이었다. 이처럼 1815~1850년 사이의 급진파는 자기 세력을 갖가지 소규모 직종과 업종에서 끌어냈다.
레스터는 마스터들이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계급이라고 말한다. 계급으로서의 ‘그들’은 그의 정치적 권리를 거부했고 경기가 후퇴하면 그의 임금을 깎았다. 경기가 좋아지면 그는 좋아진 것의 몫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그들’ 및 국가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식량이 풍부해도 부족해도 이득을 취했다. 시장 변동, 흉작 등 궁핍의 원인은 가변적이었지만 착취는 불변적이었는데 이유는 이익과 손실을 편파적으로 분배하는 권력과 소유권의 특수한 체제를 통해 굴절된 때문이다.
혜원샘은 이제껏 우리는 산업혁명의 산업적, 경제적 측면만 알고 있었는데 저자는 자유 쟁취를 위한 하층민의 사회적 압력으로 인한 산업혁명의 정치적 측면을 보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1840년의 사람들은 1790년의 사람들보다 물질적으로 나아졌음에도 이들은 이 향상을 착취, 불안정, 비참한 상태의 증가라는 파국적 재난으로 체험했다. 이유는 뭘까? 저자는 이것의 탐구를 위해 농업 노동자의 생활 체험의 변화를 검토한다
7장 농업노동자들
7장의 제목은 농업노동자들이다. 나는 7장의 지리적 공간은 촌락인데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글의 제목이 농민이 아니라 농업노동자들인 이유는 왜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7장의 이슈는 인클로져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인클로져로 공유지에 대한 사용권이 법적 소유권자에 의해 전유되자 하층민들은 열심히 일만 하면 얻을 수 있던 혜택들을 빼앗겼다. 그래서 그들의 경제는 파괴되었다. 따라서 인클로져는 계급적 강탈이었다. 또한 인클로져는 촌락에 자본주의적 재산 개념을 완벽히 부과하여 그곳의 관습과 권리를 파괴한 엄청난 대사건이다. 그렇다면 7장의 제목은 공유지에서 나름 자신의 생계를 꾸릴 수 있었던 농민들의 신분 변화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이커당 더 많은 수확량으로 곡가가 떨어져도(1815,16년) 지대는 그대로 유지되거나 늦게서야 낮아졌는데 그로 인해 지주와 농장주들의 부는 증가했지만 노동자는 지독한 생계 수준에서 허덕였다. 지주와 농장주들의 부가 증가했음에도 노동자가 생계 수준에서 허덕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이들은 이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 것일까? 저자는 이 시대에는 전반적인 반혁명적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산발적이나마 노동자들의 폭동, 울타리 피괴, 협박 편지, 방화 등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귀족의 공포와 계급 간의 반목으로 주인과 하인 사이의 금지사항이 제거되어 착취관계가 격화되었고 전쟁으로 도시의 개혁가들이 탄압당하고 인도주의적 젠트리의 쇠퇴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러자 사회적 규율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출현하여 공유지는 무질서의 위험한 온상으로 간주되었다.
아서 영은 그것을 “해로운 부류의 인간을 양성”하는 ‘야만인의 사육장’으로 보았으며, 링컨셔 소택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거친 지방은 늪처럼 거친 인종을 키워낸다.” 고 썼다. (307쪽)
그리고 촌락의 빈민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은 “여러 가지 구실로 교구를 속이고자 하는 뱃속이 시커먼 악당들이며 그들의 모든 능력은 교구 관리들에게서 쓸모없고 방탕한 목적에 사용할 돈을 얻어내기 위한 사기 행각에 동원된다”는 것이다.(308쪽)
당시의 젠들먼은 이처럼 자신의 이해관계에 이데올로기를 입혀 영세농들을 공유지에서 제거하고, 자신의 노동자들을 예속상태로 내몰아 그들의 소득을 깎아내렸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이것이 1790년에서 1810년 사이의 대세였으며 값싼 노동력의 예속력 증대, 즉 농장주의 펀의를 위해 건초만들기와 추수 그리고 인클로져에 따른 도로건설, 울타리치기, 물빼기에 노동력을 써 먹는 것이 정책이 되었다. (308쪽)
그렇다면 정부는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했다고 주장할 건가?... 밀도 안된다! 이런 것들은, 프랑스를 본보기로 삼아 잉글랜드에서 개혁이 일어나지 않게끔, 프랑스에서 자유를 분쇄한 노력의 대가이다. 이러한 일들은 그 같은 일을 수행한 데 대한 대가인 것이다. (311)
촌락에서의 노동의 댓가는 구빈세로 충당되었다. 당시의 영국의 시스템을 잘 모르는 나는 국가의 법인 구빈세에 관한 행정을 맡은 곳이 해당 촌락의 교구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한다. 당시의 ‘평균적인 교구목사’들은 자기 가족을 휴양지 바스에 모셔다 놓고 예배는 박봉의 부목사에게 맡기는 겸직의 부재 성직자였다. 이런 ‘평균적인 교구목사’들에게서 노동자들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철근이 빠진 ‘순살 아파트’가 우리의 안전한 거주지가 될 수 없듯 ‘평균적인 교구목사’들은 노동자들의 수호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고용주는 자신이 낸 구빈세가 이웃 고용주들의 노동자에게 보조금으로 지급되는 것이 못마땅해 자신의 노동자를 해고한 뒤 교구 민생위원에게 다른 노동자를 보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렇듯 구빈세는 혼란과 낭비와 강탈의 시스템이었으며 고용주는 구빈세가 노동계급의 게으름과 악행을 배가시킨다고 생각했다.
피구호권은 공동권이 사라진 이후 노동자의 마지막 권리였다. 가족을 거느린 노동자는 거주지가 주는 피구호권의 상실이 두려워 이주도 할 수 없었다. 피구호권은 이런 그를 잃어버릴 거주지조차 없는 아일랜드 빈민과 공업 노동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게 했고 노동력이 부족한 시기에도 그의 이주는 장려되지 않았다. 빈민법 위원회가 공장 지대로 이주를 권장할 때도(1834) 우선권은 자녀가 많은 과부나 대가족을 거느린 수작업수공업자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스피넘랜드 법은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을 부조하는 의미에서 지급된 보조금으로 (보조금은 빵 가격과 자녀 수에 따라 달라졌다.)스피넘랜드라는 지방에서 만들어졌다.(1795년) 빈민 노동자가 받는 본인 몫의 정해진 보조금은 그 자신이나 가족의 노동으로 조달되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빈민 구호 지방세에서 지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용주들이 보조금을 의식해 임금을 낮춘 결과 높아진 세부담(1780년대 200만, 1803년 400만, 1812년 600만 파운드. 310쪽)을 떠안아야 했던 사람들은 스스로 구호대상으로 전락했고 노동자의 노동 의욕과 생산성도 저하되었다. 스피넘랜드의 결정은 인간애와 필요성이라는 두 가지 동기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실상 이 시스템과 순환제도(구제를 요하는 노동자를 이 농장 저 농장으로 순화시킴)를 영속시킨 것은 값싸고 항구적인 노동예비군에 대한 대농장주들의 요구(임시노동이나 자유노동의 필요)였다.
전쟁이 끝나자 군인들의 귀향으로 인구가 증가했고 파산한 소토지 보유자들은 노동자 무리에 가담했으며 인클로져에 관한 일거리도 줄었다. 또 북부지방에 대한 직물공업의 집중으로 남부 노동자들의 처지도 악화했다. 농촌공업은 대체로 쇠퇴(가장 두두러진 것은 방적업)하여 가내 일자리가 줄고 값싼 부녀자 노동이 증가했다. 거기에 높은 지대, 하락하는 곡가, 전채(戰債)와 통화위기, 맥아와 창문과 말에 대한 과세, 온갖 자질구레한 규정을 담고 있는 수렵법등은 노동자들을 쥐어짰지만 구빈세를 둘러싼 싸움은 1815~1834년 동안 계속되었다. 젠트리와 민생위원회는 경비 절약, 법적 거주지소송, 규율을 어긴 자들에 대한 형벌부과, 노동자를 조 단위로 편성하여 싼값으로 일 시키기, 노동자 경매 등을 일삼았고 빈민들은 이를 교구 민생위원에 대한 위협, 간헐적 태업, 노골적인 문란행위 등으로 맞섰다. 우리는 구빈법, 스피넘랜드 법, 정주법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 법들의 부작용도 이야기했다.
당시 스피넘랜드가 적용되던 남부의 노동자들은 마스터 계급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예노동은 권리의 상실에 불만을 품고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 인’으로서 이제 막 저항을 시작하려는 노동자들에게 비경제적이었고 두 세명 씩 조를 이루어 스스로 가축 돌보기, 울타리 치기 등을 알아서 하는 노동자에 대한 감독 역시 비경제적이었다. 이 기간의 착취관계는 임금지불이 중단될 정도까지 강화되어 이런 종류의 피구호민 노동은 노동자를 무 좀도둑, 선술집들치기, 밀렵꾼과 부랑자로 만들었다. 착취관계의 강화는 정치적 탄압의 강화였다. 그러나 야심 있고 똑똑한 젊은이를 감시하는 대지주와 교구 목사, 인클로져 폭동자와 빵 폭동자, 그리고 밀렵꾼에 대한 가혹한 처벌 등으로 노동자는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고 체념했다.
하지만 물가가 치솟고 전쟁이 끝나 병사들이 돌아오자 약간의 저항이 일게 되어 1816년과 1830년에는 폭동이 있었다. 폭동은 정치적 의도가 없는 기계 파괴 운동으로 주요 공격대상은 굶주린 노동자의 일거리를 빼앗는 탈곡기였다. 사건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지만 농업노동자의 반항은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1830년의 폭동은 일시적 임금상승도 가져왔다. 농촌 노동자들의 뚜렷한 정치적 발전과 챠티스트 지부의 확산이 나타나는 것도 이때부터다.
도시노동자는 지주들이 자기 재산에 대해 귄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서 토지 귀족에 대한 증오를 드러냈고 토지에 대한 열망은 선대제 노동자의 독립에 대한 욕구과 뒤섞여 계속되었다. 토지가 주는 신분, 안정성, 권리에 대한 연상은 토지에서 난 수확물보다 훨씬 심원한 것이다. 이런 연상은 지금의 우리도 지니고 산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는 아파트의 카피도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우수개도 결국은 신분, 안정성, 권리에 대한 연상이 아니겠는가.
암튼 당시 토지회복을 위해 일관성 있는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한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농촌 노동자가 아니라 도시노동자였다. 그들의 일부는 농업 노동자의 아들 혹은 손자였으며 토지 계획의 지지자들은 농촌 출신 직조공과 장인들이었다.
7부의 마지막에서 톰슨은 인클로져 세계의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갔을까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고용주들에 관해 이야기 해 보자 ...그들은 맨체스타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의 작은 세계와 접촉하여 배운 것을 빼고는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능숙한 솜씨도 없는, 면직물 가게에서부터 시작한 일군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을 메우기 위해 그들은 근사한 저택, 시종이 딸린 마차, 제복을 입은 하인, 사냥꾼, 사냥개, 등등을 보란 듯이 과시함으로써 외양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거드름을 피우며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정말 그들의 집은 그 크기나 규모가 런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매럭적인 깔끔한 별장을 훨씬 능가하는 호화스러운 궁전이다....그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돈이 가장 많이 드는 학교에 보내고 자식들에게 자신들이 못 가진 것을 두배로 퍼부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 자신의 지역에서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고 전제적인 소군주들로 군림한다. (279쪽)
수혜자는 결국 고용주였던 것이다. 이인 샘은 이런 모습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재현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저자는 또 “써퍼크의 노동자를 면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그의 손녀와 비교할 때 우리가 비교하는 것은 두 개의 생활 수준이 아니라 두 개의 생활방식이다.”라고 말한다.(324) 미영샘은 이를 인클로져로 공유지에 대한 사용권이 법적 소유권자에 의해 전유되자 토지를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달라져(위의 인용문처럼) 이를 두 개의 생활방식으로 표현한 것임을 설명하셨다.
낼 모레 수요일은 총선일이다. 자유의 획득을 위한 저항의 역사, 착취, 경제에 희생된 노동자의 삶, 구빈세, 정주법, 스피넘랜드법 등 다양한 빈민 구호제도의 득과 실을 공부하며 투표권자는 각 당의 정책을 공부를 한 뒤 투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야 우리가 처한 문제를 다소라도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챠티스트들이 선거권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갖은 고초를 겪었던 이유 중에는 삶에 대한 개선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확실히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중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톰슨의 책을 따라가다보면 기존에 갖고 있던 빈민, 노동자, 민중의 이미지가 새로이 변화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종교, 헌법, 사상 등등의 영향으로 ‘자유’에 눈을 뜨고, 최소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 멋지게 보이네요!
책을 읽어가며 ‘자유’ 개념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성스런 후기 감사합니다.
산업혁명을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고려해 '높은 생산성'으로 일축했던 것을 돌아본 시간이었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뿌리 뽑힌다'는 느낌을 누구보다 강하게 느꼈을 것 같습니다.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정치적인 사건으로서의 산업혁명 혹은 '사회혁명으로서의 산어혁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와~~ 후기 쓰기 너무 어렵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꼼꼼하게 정리해주시다니요!!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지식인, 장인, 마스터 등이 개혁세력과 분리되어 나가면서 하층 노동자들이 형성되는 내용이었지요. 부르조아와 노동계급이 어떻게 자기의식을 형성해 나가는지,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관점으로도 연결되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현정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