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를 향한 개혁운동(1792-1796)과 각 계급의 분리, 정체성 형성과정
현정샘께서 꼼꼼하고 자세하게 지난 내용을 후기로 올려주셨습니다. 먼저 참고하시고 저는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이번 주 함께 읽었던 내용은 18세기말 잉글랜드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운동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이 느닷없이 일어난 게 아님은 알고 있었지만 1811년 러다이트운동과 이후 차티스트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에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는 전국 각계각층의 개혁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국왕반대’, ‘자유 평등’의 구호와 함께 입헌주의라는 개혁운동에서 유한계급이 실질적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전국각지의 농민과 노동자들이었지요. 프랑스혁명 이후 급속하게 과격해진 무산계급의 혁명성, 해외식민지의 신생공화국 팽창열기에 따른 영국의 이익과 유럽의 외교적 균형의 변동, 프랑스혁명세력과 국내 자꼬뱅운동의 연대가능성 등은 페인주의의 확산을 지연시키야 한다는 정당성을 갖게 했습니다. 이후 정부와 귀족들은 반동세력의 기만적인 폭동과 위협을 점점 강화하게 됩니다.
이러한 개혁운동과 반동폭동의 혼란은 경제적 합리화와 점진적인 정치적 개혁을 꿈꾸는 상공업 부르조아지, 젠트리집단, 귀족층을 돌려세우고 나아가 개혁운동가들까지도 분분한 입장차를 드러내게 되었지요. 그들은 ‘인민 하층계급에 재산을 약탈당할 수 있다’는 위기 앞에 ‘재산을 지키는 협회’로 단결하며 자기정체성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또한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한 절대왕정의 몰락과 루이16세의 처형은 유토피아적으로 자기신념을 프랑스의 대의명분과 동일시했던 지식인세대에 깊은 환멸을 초래하게 되었고 그 이후 지식인개혁가들과 평민개혁가들의 통합은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개혁세력에 대한 구속, 감금, 고문, 등의 박해는 조직이 분화, 와해되는 지경으로 몰려 대부분 지하조직화하는 과정으로 이어졌지요. 한편으로 감리교를 비롯한 뜻밖의 천년왕국에 대한 희망은 빈곤계층의 정서에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권리’를 주장한 페인에 대한 열광이상으로 천년왕국이라는 환상적 허구에 빠져든 사람들은 내세의 구원을 믿고 빈곤과 착취의 비관적 현실을 낙관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장인, 임금노동자, 소마스터, 소직종인 등으로 다양한 개혁세력은 프랑스를 모방하여 경제적 불만 및 사회적 치유책을 주장했으나 이후 현실 타협적인 개혁운동과 군주정 전복과 공화정수립을 지향하는 급진적 성격으로 분리되어갔습니다. 1795년 전쟁과 흉년으로 인한 혼란과 궁핍은 식량폭동을 초래했고, 잉글랜드민중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끊임없이 땀흘려 일하는데도 저들의 풍요 속에 우리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가?” 군대와 민병대조차 폭동세력에 가담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스피넘랜드법이 결정된 것은 정부전복의 두려움 때문이었지 진정으로 빈민을 구호하고자 한 시혜차원은 아니었던 것이죠. 값싸고 항구적인 노동예비군의 존속을 원했던 대지주의 이익때문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지속되는 빈곤과 기아로 노동계급은 프랑스군이 침공해 오더라도 사실 잃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등장은 여전히 박해받고 고통받으면서 지도부도 없이 비합법조직을 유지하며 자기자리에서 고투하고 있었던 노동계급들의 존재입니다. 이들이 경제적 착취라는 비인격적 관계에서 자유를 인식하고 저항할수록 고용주와 국가는 더욱 정치적 탄압을 가하고, 사회적 계약으로는 자유인인데 더 부자유해지는 아이러니는 이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어 나갑니다.
혁명적 충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1790년 노동계급의 의식 형성에서 심층적 중요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배계급의 반혁명적 공포는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서 동직조합, 민중의 교육, 민중스포츠와 풍속, 출판물과 단체들, 정치적 권리 등에 대한 반동적인 태도에서 표현되었고, 천년왕국 감리교의 부흥은 민중의 절망, 고통의 크기를 역으로 증명합니다. 하지만 감리교의 강령, 영적 평등주의, 효율적인 조직체계의 경험, 기부금같은 회비의 운영, 다양한 토론문화 등은 이후 노동계급의 정치적 전통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정치적 반혁명시기의 폭력과 탄압이 도리어 노동계급의 의식과 제도를 만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노동계급은 만들어진 만큼 그 스스로를 만들어 낸 것이다”(273)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어떻게 단기간에 계급의 분리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의문이 있었는데요,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지배계급은 민중의 시민권사상을 종교와 문명의 도전으로 보고 게으른 노동자들은 영원히 종속된 계급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서가 강렬해졌다고 합니다. 농민을 자기 땅과 고향에서 뿌리뽑은 ‘인클로저’가 유례없는 빈곤과 착취의 형태임에도 우리 역시 산업화, 진보의 시대를 열었다고 교육받아왔던 것처럼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인식의 과정들이 20세기에 들어서면 중요한 문제들을 어떠한 실증적 방식이라도 경제와 진보의 인과로 꿰맞춰 바라볼 만큼 전체적인 역사과정을 편향되게 보고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겠네요.
*다음시간은 8-10장 ‘장인과 직조공들, 생활수준과 실제의 경험들’까지 읽습니다. 발제와 간식은 정랑샘과 혜원샘이 맡아주시고, 후기도 정랑샘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 혁명이 있으면 반혁명이 늘 있었습니다. 그 반혁명을 보면서 혁명이 실패했다고만 생각했구요. 반혁명으로 인해 노동계급에서 생겨나는 정치적, 문화적 변화들을 보면서 복잡하고도 오묘하고도 끊임없는 힘의 관계를 느끼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고맙게 잘읽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노동계급’이 다른 계급들과 분리되면서 형성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네요.
정치적 개혁을 꿈꿨던 부르주아, 젠트리집단, 귀족층, 그리고 지식인 개혁층까지 혁명 세력으로부터 돌아서면서 고립된 세력, 즉 ‘노동계급’이 형성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네요.
하지만 ‘노동계급’이 단지 ‘분리’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게 톰슨의 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들 내부 자체도 스스로 조직을 구성하고, 담론을 형성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노동계급’은 노동계급 스스로 만들어냈음을 보여주는 것도 민중의 힘을 믿었던 게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