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과의 공진화
얀치에 따르면, 진화는 그저 적응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여 자신을 바꾸는 것을 진화라고 주로 떠올립니다. 원숭이가 바닥에서 손을 떼고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믿을만한 정보에 의하면(ㅎㅎ)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그림을, 진화학자는 이 세상에서 죄다 불살라 버리고 싶어합니다. 그런 건 진화도 뭣도 아닐뿐더러, 진화가 마치 한 생물과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나아가 생물간의 위계를 만들기 때문이죠. 얀치는 진화가 적응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한 것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불안정화, 밖으로 나가 멓음, 모든 개혁에 뒤따르는 위험 부담이라고 할 새로운 공생적 관계들을 제시하는 자기 연출을 요구한다." "진화란 (...) 목표가 주어지고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과정이 아니라 열려진 학습 과정이며, 기본적으로 거대하고 다층적인 학습 과정이다." 학습은 기본적으로 열린 과정입니다.
물론 그 안에도 일정한 코드는 있습니다. 얀치는 이를 '운하화 되었다'라고 표현하지요. 마치 운하를 만들어 최단통로 잇는 것처럼, 몇몇 단계는 마치 그것이 정해진 법칙인 것처럼 일정하게 진행됩니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 대개 그렇죠. 문화적 코드는 한번 생성되면 거의 비슷한 회로를 따라 흐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조차 과정적인 진화가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화는 기본적으로 환경과의 소통을 통한 자기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으로 있을 때조차도 다른 것들과 함께 있기에, 진화는 생물의 닫힌 변화도, 그렇다고 외삽된 법칙도 아닌 것이죠.
우리는 이런 자기조직적 진화, 혹은 '자기 자신과의 공진화'를 도곤족 신화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읽은 <물의 신>에는 도곤족의 집이 소개됩니다. 도곤족의 집은 외벽에 일정한 수의 벽감이 있어서, 그곳에는 집에 사는 사람의 손톱이나 머리카락, 피를 묻고 제단으로 사용합니다. 백인이 보기에는 이상한 일입니다. 제단은 보통 외부의 힘을 끌어오기 위한 도구니까요. 주로 초월적인 힘, 신이나 정령의 힘을 모시는 곳이 바로 제단입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신체를 제단에?
백인이 보기에 도곤족의 제단은 공회전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오고트멜리는 이렇게 바쳐진 자신의 신체 일부가 "최초의 인간과 레베의 정신력"과 체력이 인간의 간으로 들어가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제단에 바친 신체 일부가 레베와 최초의 인간과의 동질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정령 노모가 만든 최초의 인간과 레베는 다른 것도 아니고 인간과 닮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돌보는 조상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고방식은 다른 것들과 자신 사이의 동질성을 찾고, 그들을 친척, 조상, 친구로 받아들이는 신화적 사고방식(혹은 유동적 지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를, 어쩌면 '자기조직의 신화'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요^^
<물의 신> 읽기는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오고트멜리의 이야기는 슬슬 인간의 문화에 더 많이 치중하고 있고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 계속 읽어나가 보자고요~
다음 시간은
<자기조직하는 우주> 12, 13장
<물의 신> 끝까지
읽고 공통과제를 써 옵니다.
토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