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와 리좀
얀치는 드디어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 개념에 닿았습니다. 이 챕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얀치는 정말 모든 것을 종합하려는 의지로 충만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얀치는 리좀 개념을 통해 진화를 설명합니다. 진화는 시간 묶음인 동시에 공간 묶음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계통수와 뿌리, 그리고 리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요.
계통수는 공통 조상에서 기원한 진화 역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렇기에 해당 본질을 표현하죠. 말하자면 나무의 몸통입니다. 이러한 계통수의 시작점을 뿌리라고 합니다. 이 뿌리에서 출발하여 뻗어나간 것이 가지이고, 또 가지에서 뻗어나간 것이 잔가지(node)이지요. 그리고 이런 수목의 가장 끝부분이 나뭇잎(leaf)입니다. 이렇게 잔가지 이후 갈라져 나온 모든 계통을 하나로 묶어 계통분기(clade)라고 합니다. 계통수는 뿌리 방향으로 갈수록 기원한 조상을 향하게 되고, 나뭇잎으로 향할수록 후손을 향하게 되지요. 조상과 후손이 한눈에 들어오는, 본질로부터 파생한 계열들이 가지를 뻗는 가계도가 계통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얀치는 본질과 현실화에 현재의 살아 있는 관계를 도입하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안한 리좀을 제3의 이미지로 제안합니다. 계통수만을 보면, 출발로부터 놓여 있는 마한한 다양성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뿌리라는 이미지는 그 실체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 관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제3의 이미지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리좀인 것입니다. 리좀은 뿌리가 아니라 줄기이고, 구근의 경우 땅속의 싹입니다. 제일 끝머리에서 다시 젊어지는 속도에 비례해 가장 오래된 부분들은 죽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식물의 줄기와 달리 무한히 자라지 않고 자기 갱신적인 방식으로 다시 새로워지고, 계통수로서의 복제가 아닌 지도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리좀의 이미지는 모든 것이 얽혀 있는 지구상의 만물을 보는 도곤족의 이미지와 겹칩니다. 우리의 뿌리깊은 얽힘에 대한 사유를, 리좀과 신화를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도둑 의례
<물의 신>의 마지막 이야기는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교역을 하고 소통하는 세계입니다. 쌍둥이로부터 시작한 인간은 태생적으로 서로 의지하고 소통하는 상대가 있음으로 해서 존재할 수 있었죠. 교역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고트멜리가 말해준 교역 중 재밌는 것은 도둑 의례라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좀 신기한 인간의 습성(?)입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신들의 불을 훔쳐준 이야기가 있듯 도곤족 신화에도 최초의 불은 훔친 것이었습니다. 그 대가로 프로메테우스는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지만, 불을 훔친 대장장이는 팔이 부러져 관절을 쓸 수 있게 되어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이렇게 보면 인간의 문명은 어딘가에서 훔친 행위로부터 비롯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오고트멜리는 이 신화를 기념하기 위한 '도둑 의례'가 있다고 합니다. 대장장이가 불을 훔치기 위해 쓴 '도둑 막대'를 본뜬 지방이를 쥐고 젊은이와 동료들이 함께 작은 가축을 약탈할 의무를 맡는 것입니다. 이들은 훔친 가축을 일정한 비율에 따라 공동으로 배분해 나누어 먹는데, 이런 도둑 의례는 공동체원 중 한명이 죽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누군가가 죽고 남긴 유산을 어떻게 배분하고 소유권을 이양할 것인가를 두고, 도둑질이라는 의례행위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 의례는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물건을 빌려 쓸 수밖에 없고, 죽은 이의 소유물을 강제로 전유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이 남긴 유산은 사실 그 사람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아있으므로 소유권은 죽은 사람에게 아직 있지요. 그러니 후계자는 아무리 정당해도 그 물건을 강탈하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 신화에 왜 도둑질을 수호하는 신이 배정되는지 의아해 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범죄라면 다른 것도 많잖아요? 살인 방화 강간...그런데 도둑질만은 금기이면서도, 때에 따라 신성한 행위가 되기도 합니다. 그건 아마도 인간 행위의 근저에는 어쩔 수 없는 강탈 행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삶은, 문명은 다른 것을 빼앗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런 행위가 밤의 시간에 있은 다음에야 법을 준수하고 의무를 지키며 조화롭게 자원이 배분되는 '낮의 시간'이 있다는 것. 그렇기에 도둑질이 인간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 시간은
<자기 조직하는 우주> 14, 15장
<아프리카의 신화와 전설> 1장
읽고 공통과제 써 옵니다.
토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