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트멜리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이번 시간부터는 <아프리카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고트멜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솔직히 긴가민가 했었지요. 이게 정말 아프리카 대륙의 보편(?)적인 이야기인 걸까? 아니면 오고트멜리와 도곤족 특유의 신화인 걸까? 그런데 왠걸. 더 구체적으로 읽어본 아프리카 신화는 오고트멜리의 이야기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습니다. 두 쌍의 인간, 인간 뒤에 금기와 함께 얽힌 동물, 말과 음식의 양면성이 등장합니다.
아프리카 신화에서 특히 강조되는 건 인간의 이중성입니다. <물의 신>에서도 나왔듯, 인간은 단독으로 태어나지 않고 늘 이중의 영혼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통해 한쪽을 제거한다 해도 계속 이중상태를 보유중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신화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얼굴이 두 개인 인간입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사람처럼, 앞과 뒤에 얼굴이 달려서 겉으로는 친절하고 예의바른 ‘말’을 하는 그런 ‘입’을 가진 인간이 뒤에는 탐욕스럽게 인간을 먹고 싶어하는 ‘입’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특기할 만한 것은 이 그로테스크한 인간이 단순히 퇴치해야 할 괴물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아름다운 신부를 데려온 신랑은 신부가 사실 얼굴이 두 개 달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경악하며 그녀를 다시 원래 있었던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신부가 아니었다며 ‘환불’ 요청을 하지요. 또, 어느날 인간을 잡아먹고 싶어진(!) 사람이 흙을 이겨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마치 자신의 아바타 같은 존재로 마을로 보내고 본인은 표범이 되어 사람을 해치고 다닙니다. 마을 사람들은 교활한 맹수에게 잡아먹히며 쩔쩔매다가 겨우 표범을 죽이는데, 그때 아바타격인 남자도 같이 죽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이야기는 끝난다는 것입니다. 딱히 금기로서 벌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교훈도 없습니다. 식인하는 맹수와 사람은 가장 무서운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배척하거나 물리칠 수 없는, 늘 함께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대표되는 점잖은 문명 이면에는 ‘식인’이라는 잔혹함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아프리카 신화는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신화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마을이 자주 없어집니다. 가령 주인공이 떠났다가 돌아오자 자신이 살던 마을이 기근을 못 이겨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계속 변주되지요. 그만큼 인류의 고향인 아프리카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해서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옮겨 다니고, 또 다른 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을 테고 말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옮겨다니며 터전을 일구는 신화. 이렇게 보면 어떤 종의 역경이 반드시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그래서 반드시 없애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얀치는 한 생물계 안에는 자기 갱신 수준이 제각기 부분적으로 자율적인 방식으로 전체 환경과 상호 작용하고 의사 소통할 수 있다고 했지요. 이런 자율적인 부분을 가장 간과한 제도가 바로 다수결, 가장 상식적인 선에서 의사가 결정되는 제도라고요. 그는 다수결 원칙이 자연 진화의 법칙과 일치하지 않고, 요동의 역할을 부정한다고 말합니다. 창조적 요동이 공명을 자극할 기회를 주기도 전에 결정을 내려버리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모으는 선거제도는, 사실 진화를 촉매적으로 촉진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조들의 안정화와 경직화만을 빚어낼 뿐이라는 사실! 이렇게 보면 어쩌면 다수결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가장 상식적인 방식으로 봉합하고 치우는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문제에 금기나 괴물 같은 이미지를 덧씌우면서.
다음 시간은
<아프리카의 신화와 전설> 2장
<자기 조직하는 우주> 16, 17장
읽고 공통과제 써 옵니다.
토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