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15 금요일 / 《듣기의 윤리》 2부 3장 발제 / 박규창
이방인이 말할 수 있는 사회의 조건
1부 말미에서 “‘좋은 삶’이라는 목표와 ‘더불어 살기’라는 조건”, ‘정의로운 제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었다.(84) “‘좋은 삶’이라는 이상에 근거한 행동의 해석과 반성은, 넓은 지평으로 개방되지 않으면 자폐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언제나 매 순간 내 것이 아닌 관점의 매개를 필요로 한다.”(85) 따라서 ‘좋은 삶’이란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좋은 친구’,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들은 우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2부에서 다뤄진 서발턴처럼 말하기가 허용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정의로운 제도’다. 그런데, 제도는 정의로울 수 있을까? ‘제도가 정의롭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1. 제도가 폭력이 될 때
모든 공동체는 이방인과 면해 있다. 이방인은 “‘타자’와 ‘외국인’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자”로서 “이름을 가지고 신분을 밝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158~159) 2부에서도 얘기됐듯이, ‘우리’ 자신조차도 언제든 이방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공동체는 이러한 이방인을 향해 열려있을 수밖에 없고, 이방인들은 언제든 공동체의 질서를 교란할 위험을 잠재하고 있다. 이방인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낯섦을 무기로 공동체에 질문을 던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도는 남성적이고 중심적이다. 따라서 본성상 제도는 여성적이고 주변적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안티고네의 경우가 그렇다. 안티고네는 이방인으로서 고향에 돌아왔다. 그녀는 더 이상 이전처럼 테바이의 질서에 순응할 수 없는 이방인이 되었다. 그녀는 통치자 크레온으로 대표되는 테바이의 남성적 질서로 규정되는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는 그 자체로 테바이를 교란시키는 이방인이다. 이 일화는 이방인이 되기 전 안티고네는 남성이 해석하고 규정한 테바이의 질서에 순응하는 여성이었음을 지시한다.
모든 공동체는 항상 이방인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공동체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이방인과 적절하게 합의해야 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명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관용이다. 그런데 안티고네의 예에서도 암시되듯이, 제도로서의 관용은 ‘조건적’이다. 안티고네가 테바이의 도움을 받으려면, 통치자 크레온의 명령에 따르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 즉, 조건적인 한에서 관용은 이방인-소수자들이 공동체-다수자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한에서만 보장된다. 웬디 브라운은 이런 식의 관용은 “이방인을 일차적으로 위협이자 악으로 인식하는 사유 틀”이라고 지적한다.(173) 그리고 이런 사유에서 허락된 관용은 주권자의 변덕에 따라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174)
브라운의 분석을 좀 더 따라가면, “신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사회에서 관용은 차이에 대한 적대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리함으로써 심리적 원한감정(resentiment)을 심화한다.”(176) 더 이상 이방인은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하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낯섦이 좀 더 분명하게 표시되도록 관리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향해 관용을 베푼다. 이러한 방식의 관용은 대상에 대한 인식에 작동하는 권력 관계를 은폐한다. “관용 대상의 구성에 작동하는 역사와 권력의 문제는 도외시하면서, 관용의 대상을 관용을 베푸는 주체와 ‘태생적,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이해하도록 만든다.”(177)
그렇다고 관용을 철회할 수도 없다. 분명 제도로서의 관용은 다른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폭력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관용을 철회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레비의 한탄이 섞인 표현을 빌리면, 관용 불가능성에 대한 한탄은 정신적 나태함의 결과일 뿐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관용의 제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관용을 받쳐 줄 더 근본적인 윤리적 이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 유린적 이념이 바로 ‘환대’이다.”(180)
2. 경험 불가능한 절대적 환대의 효용
“관용은 주체에 의해, 주체의 영역 안에 한계 지어진 주체중심적인 것인 반면, 환대는 타자중심적인 것이다. 관용이 여전히 주체의 힘, 주체의 가능성, 주체의 ‘할 수 있음’에 기대는 것이라면, 환대는 타자에게 선택권을 넘겨주는 데서 출발한다.”(181) 겉보기에 대립하는 것 같은 관용과 환대는 서로가 서로를 표현하고 잠재한다는 점에서 애초에 분리될 수 없다. 관용은 조건부 환대로서 표현되고, 환대는 관용의 실천 속에 잠재한다. 문제는 조건부라고 할지라도 환대는 본성상 타자에게 선택권을 넘겨주고,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무조건적 환대’라는 실행 불가능한 층위와도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환대는 절대적 환대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이방인이 누구인지 소개받지 않아도, 그가 주인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임을 주인이 납득하지 않더라도 주인이 그를 환대하는 것이다. 나아가 주인은 모든 이방인을 향해 먼저 초대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환대는 위험하다. 하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환대는 개념상 우리에게 끊임없이 그럼에도 환대를 시도하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으로 작동한다.
“절대적 환대의 이념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현실의 경험을 성찰하게 하는 ‘준거’로 요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적 환대에의 윤리적 요청은 결코 조건부 환대의 제도화나 관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타자에 대한 윤리적 ‘판별’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절대적 환대와 윤리적 분별을 대립시킴으로써 무조건적인 환대의 위험을 지적하는 커니의 비판에서 재고되어야 할 부분은, 그토록 두려워하는 ‘악한 이방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 이 물음은 윤리적 상대주의나 악의 불가지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며, 이방인을 선악 판단의 피안에 두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선악은 주체 또는 이방인의 존재론적 속성이 아니라는 것, 타자와 마주한 주체의 판단의 결과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판단이 타자가 던지는 도전에 적합하게 주체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윤리적 판단인지에 대해서, 매 순간 ‘절대적 환대’의 이념에 의거하여 성찰되어야 한다.”(189) “절대적 환대의 이념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기될 수 없는 지향으로 남는다.”(198) 절대적 환대를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만이 환대, 조건부 환대로서의 관용조차 배반하지 않을 수 있다.
3. 조건으로서의 절대적 환대
절대적 환대는 제도화될 수 없다. 또한 제도화된 환대의 조건으로서 절대적 환대는 소거될 수 없다. 절대적 환대는 제도화된 환대의 조건으로 항존하고 있지만, 제도화된 환대를 해체하거나 교정함으로써 작동하기도 한다. ‘절대적 환대’는 일종의 아포리아다. 아포리아란 ‘길이 없다’, ‘통로가 없다’라는 뜻으로 우리의 온갖 한계들을 직면하게 해주는 것이다. 개념상 ‘절대적 환대’, ‘조건적 환대’로 구분되긴 하지만, 실제로 남는 질문은 이런 것 같다. ‘어디까지 환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관습과 법에 따라 관용을 베풀기도 하고, 요청하기도 한다. 코로나 시국을 관통하면서 확실히 알게 된 점은, 관용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하게 베푸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관용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디까지 환대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럴 경우, 특정 누군가가 관용을 받는 것을 부당하다고 분노할 수도 있고 혹은 상대방이 어떻게 억압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관용을 베풀게 될지도 모른다. 관용에만 집중할 때 거기에 작동하고 있는 폭력, 권력 관계 등은 은폐된다. 은폐된 것은 우리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앞서 ‘정의로운 제도’에 대한 질문을 남겼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아무래도 다음 발제자에게 넘겨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남은 단서는, ‘정의’는 제도의 소관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될 수밖에 없는 정의는 아포리아로서 그것을 실행하고자 하는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