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에 한 권씩 인류학 책을 독파하는 여시아독, 벌써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시간에 읽은 책은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입니다. 이 책은 아이우통 크레나키의 연설과 그에 대한 여러 사람의 후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이우통 크레나키는 브라질 원주민 운동의 주역 중 한 명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한들, 제게 브라질, 원주민, 아마존과 같은 이름은 너무 먼 곳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는 유럽인, 혹은 저처럼 유럽인의 시선으로 유럽 아닌 곳을 바라보는 소위 ‘문명인’의 시선에 경종을 울립니다. 지금까지의 인류학은 유럽인의 시선으로 멀리 있는 아마존 혹은 그에 준하는 ‘비문명’을 조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선은 아무리 ‘문화’라는 이름 하에 평등을 지향한들 위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지요.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는 ‘역-인류학’이라는 독특한 관점을 도입에서 세상을 다시 볼 것을 종용합니다. 그리고 그 관점이 향하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염려하는 ‘세상의 종말’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의 인류인가?
‘인류학’은 인류에 대한 학문입니다. 그런데 1강의 <인류학을 넘어서>에서 지적되었다시피 ‘인류’는 다루어질 수 없는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인류’에 포함되어 있는데 ‘인류’를 관찰하고 대상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인류학’은 타자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생각하는 학문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문화’ 개념도 도입되었고, 또 비판되기도 했지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애초에 같은 ‘인류’인데 또 ‘타자’를 상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인류학’이라는 것이 성립 가능한 학문인가? 알쏭달쏭한 가운데, 아이우통 크레나키는 독특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의 인류인가?”라고요. 이 질문은 ‘우리’와 ‘하나’와’ 인류’라는 세 가지를 몽땅 묻고 있습니다. 인류학이 상정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인류’라는 이름으로 뭉쳐 하나의 보편적이고 평등한 ‘종’이 되었다고, 그렇게 ‘진보’했다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진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인류학’에서도 정말 보편적인 ‘인류’를 다룬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무의식중에 ‘우리’에 등치시킵니다. 하지만 그러나 인류학은 ‘인류’라는 하나의 덩어리를 포착하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런 단일한 시도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라틴 아메리카에 당도한 에스파냐인들은 인디오들에게 ‘영혼’이 있는 ‘인간’인가 궁금해 했습니다. 반면 인디오들은 에스파냐인들이 ‘죽지 않는’ ‘신’인가 궁금해하여 그들을 물에 빠뜨립니다. 인류에 대한 가치평가나 생각이 서로 다른데, ‘인류’라는 것을 정립할 수는 없는 것이죠. 인류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들이 서로 다른 가치를 상정하여 ‘인간’과 ‘신’을 바라보는 존재자들이라는 것을 포착하는 것 뿐일지도 모릅니다. 원주민의 시선을 잘 보여주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샤먼인 다비 코페나와Davi Kopenawa의 <하늘의 추락>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백인들을 체험한 원주민이 어떻게 백인들을 보았는가’를 백인이 일인칭으로 번역하여 출간한 것입니다. 이 책은 원주민들의 ‘백인에 대한 민족지’인 동시에 원주민들의 신화와 꿈 이야기를 동시에 담고 있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층위의 글들이 같은 선상에서 공존하는 사유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크레나키는 이 질문을 함으로써 하나의 인류를 상정한 ‘인류 클럽’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가입할 것을 거부합니다. 이 발언은 ‘세계의 종말’이라는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스토리 자체에 경종을 올립니다. 생각해보면 ‘세계의 종말’이란 인류를 단일한 종으로 볼 때만 적용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모두 같은 생활방식을 영위하는 종이, 더는 그 조건을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을 다 같이 두려워하고, 그리하여 거기에 맞서거나 체념하거나 하는 방식의 이야기죠. 헐리우드 영화에서 줄기차게 만들어내는 구원서사, 패배감과 무력감으로 얼룩진 냉소적 코미디, 혹은 다 끝장난 이후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그런 스토리죠. 딱 ‘우리’ 즉 백인 혹은 백인에 준하는 근대화적 관점을 갖는 사람들 생각하는 ‘세계의 종말’말입니다.
그런데 ‘원주민’ 그리고 ‘자연인’으로 취급되던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크레나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주민’ 자연인’으로 취급되면서 동시에 ‘인류’ 클럽에 동의 없이 가입된 ‘타자’들은 ‘인류’가 무엇인지 안다면 절대 가입을 거부할 거라고요. 일단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인류’ 클럽에 자동가입 시킨 이유는 식민지의 지배 형태를 정하고 정당성 확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문학의 보편적인 인류상은 손쉽게 식민화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작업이었던 것이죠. 식민지배는 ‘하위 인간’을 ‘인간’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프로젝트였고요. 즉 원주민 입장에서 ‘인류’에 포함되는 것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크레나키는 ‘문명인’으로서의 ‘인류’의 역량을 의심합니다. 그가 볼 때 ‘인류’는 종말을 피할 수 있는 역량이 없는 걱정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바로 ‘역-인류학’입니다. 역사상 유럽인들은 ‘원주민’과 ‘자연’을 동일시하며 자신들의 도움을 구하는 뒤쳐진 존재로 간주했습니다. 이런 유럽중심주의적 시선이 인류학에는 어쩔 수 없이 배여 있지요. 하지만 정말 ‘타자’는 ‘우리’의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로 남아 있을까요? ‘그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도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시선은 오히려 ‘우리’의 무능과 답 없는 역량을 걱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정말 ‘하나’의 ‘인류’일까요?
피난처를 만들자
우리는 ‘인류의 종말’을 생각하며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인류’가 하나로 모아질 수 없듯 ‘종말’ 또한 하나일 수 없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어떤 ‘종말’을 두려워할까요? 저는 ‘종말’ 하면 전기와 인터넷이 끊어진 세계를 먼저 떠올립니다. 단순히 의식주의 부재가 아니라 통신과 에너지가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즉 제가 생각하는 종말이란 사실 지금의 삶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연관됩니다. 좀 더 들어가면 자본주의 시장이 멈춰버린 세계를 ‘종말’로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저의 ‘종말’이미지와 아마존의 주민들이 생각하는 ‘종말’은 전혀 다른 인간상을 전제로 할 것입니다. 아마존 주민들에게는 백인들과 문명의 침입 자체가 ‘종말’일 수도 있죠. 누군가에게는 삶의 조건이 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종말의 시작이기도 한 것입니다.
크레나키는 ‘세계의 종말’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인 자체를 걱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명인의 특징은 스스로를 위한답시고 문명을 세우는데, 그 문명 발전을 멈출 줄 몰라 스스로를 파괴할 지경까지 이른다는 것이죠. 이 굴레를 빠져나오기 위해, 혹은 이 굴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장에 저항하는 상상으로서의 ‘참된 인류학’입니다. 지금까지 인류학이 ‘타자’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보고,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 거기서 발생하는 온갖 전환을 사유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크레나키식으로 말하면 “더 잘 추락하기 위한 방법”을 위한 인류학이죠. 지금은 ‘인류세’라는, 인류의 흔적이 가장 강하게 남는 지층이 형성되고 있는 시기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류에게 경각심을 주는 동시에 인류 자신을 여전히 중심에 두는 오만한 관점을 버리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인류세가 되었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인류세를 가장 짧고 얇게 만드는 것, ‘다음세’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강의에서는 이것을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 되었습니다. 가령 지구의 인류 모두가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을 고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멸망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조건이 되었을 때 인류는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인류의 피난처란 ‘피난처’란 서로 같지 않게 되는 것, 자본주의적 생활이라는 ‘하나’의 ‘인류’ 클럽에 모두를 몰아넣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때 ‘타자’의 존재는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이 불가능한 조건 앞에서 무력할 뿐만 아니라 사실 무력하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걸 의식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타자’의 존재입니다. 이런 점에서 ‘타자’는 ‘우리’에 포섭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존중하고 나의 가치척도를 재고하게 하고 심지어 버리게 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음시간의 텍스트는 에두아르 비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식인의 형이상학>입니다. 2강에서 언급된 ‘역-인류학’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책입니다. 책이...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선합니다! 남은 2주동안 열심히 읽고 남는 질문, 감명깊은 구절, 감상을 남겨 보아요. 텍스트에 대한 감상/질문은 강의 전까지 반장에게 보내 주세요~!
그럼 5월 9일 목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