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저희는 과거가 실재함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미지들의 존속에 대하여’라는 3장의 제목처럼, 이미지-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원뿔의 어느 층위에 쌓입니다. 과거, 즉 전체기억(혹은 무의식)은 그렇게 부풀어 오릅니다. 과거 자체는 지각되지 않은 채 존속되지만 언제나 현재의 지각과 긴밀한 유착관계에 있습니다. 과거는 물질-이미지 평면 접해있는 신체의 운동기제들이 보내는 호출에 응답하며 부분기억들을 끊임없이 내려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과 물질의 두 차원은 서로 이어져있고 닿아있지만, 그 접합의 양상은 어느 한 차원만의 운동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양쪽이 동시에 서로에게 개입해 상대를 제한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만 연결되지요. 3장의 후반부에서는, 이미지들의 존속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가 아는 정신의 현상들이 어떻게 해명되는지, 기존의 학설들을 반박하며 하나하나 풀어줍니다.
일반관념, 관념연합, 기억작용
첫 번째, 일반관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우리는 개별자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보편적 유類를 추상해냅니다. 사물들을 보면서 이건 ‘사과’다, ‘인간’이다, ‘아름답다’고 떠올리는 것이죠. 이 정신 현상을 두고 철학에선 두 입장이 대립해왔습니다. 실재론은 플라톤적 방법에 힘입어 개체들 각각에서 그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본질을 추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꽃과, 음악과, 인간은 그것들에 공통되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있기에 우리가 그걸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죠. 유명론은 경험론에 입각해 이에 반대합니다. 그들을 묶을 공통적 범주는 단지 이름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언뜻 유사해 보인다고 해도 세상에는 환원불가능한 개별자들만이 있을 뿐이죠. 전자는 선험적 유의 개념규정에서 시작하고, 후자는 무수한 차이를 지각하는 지각 능력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두 이론은 결국 각자가 부정했던 상대의 출발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양자 모두가 우리 지각에 주어지는 개별 대상들이 실재한다는 공통된 가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경험을 인식의 전제로 두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배웠듯 경험은 물질-이미지의 신체-이미지의 분절이며, 그 분절의 방식에는 기억이 개입합니다. 그러므로 실재론과 유명론이 출발점에 전제해 둔 ‘개별자’들은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는 개념이나 지각 어느 한쪽이 아니라 ‘중간적인 인식’ 혹은 ‘모호한 유사성’에서 출발합니다. 처음 가보는 여행지의 거리는 뿌연 인상으로 남습니다. 그 뭉뚱그려진 이미지에서 몇 가지 선명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죠. 여러 번 다닐수록 차츰 그 세세한 골목과 간판이 보이고, 공통된 요소들이 정리됩니다. 그 과정에서 반성적 분석은 일반성을 추출하고, 분별하는 기억은 개별성을 구분하게 됩니다. 이것은 원뿔 내의 왕복운동이며, 정신적 삶의 확장입니다. 일반관념은 거기서 형성됩니다.
두 번째, 관념들은 어떻게 연합하는가? 왜 A를 보면 다른 무엇이 아니라 B가 떠오를까요? 기존의 관념연합론은 이를 인접성과 유사성의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고 빨가면 사과라는 관념연합은 색의 유사성 때문이고, 초코파이를 보면 훈련소 시절이 생각나는 건 관념들의 인접성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 이론은 관념들 사이에 모종의 친화성이 있어서 서로를 끌어 당긴다고 전제합니다. 하지만 그 친화성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베르그손은 이 이론이 전제하는 개별 관념들, 즉 독립적인 이미지들이라는 출발점은 없다고 얘기합니다. 항들이 미리 있어서 서로 들러붙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유사한 개체들’ 이전에 ‘유사성’을 지각합니다. 전체를 부분에 앞서서 지각합니다. “따라서 연합은 원초적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출발하는 것은 바로 분해에 의해서다.”(279쪽) 관념들은 덩어리져서 지각에 들어오고 차츰차츰 분해됩니다. 지각과 동시에 다시 지각 위로 쏟아지는 전체 기억의 수축 운동이 거듭되죠. 마치 카메라의 초첨 맞추기와 같은 이 운동이 먼저 있고 그 이후에 인접성과 유사성을 따르는 연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셋째, 기억이라는 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베르그손은 우리의 ‘정신적 삶’, 즉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에는 기조ton이 있다고 합니다. 돈계산을 할 때와 멍 때릴 때, 축구를 할 때와 꿈을 꿀 때 우리 정신의 상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각 경우마다 기억 혹은 과거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현재와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즉각적 행동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상황과 느긋한 사색의 요구되는 상황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베르그손은 원뿔에 상이한 절단면들을 고려해보자고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순전히 감각-운동적인 상태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활동성의 기초가 없는 상상적인 삶만이 따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원뿔의 밑변인 AB와 행동의 평면인 P 사이를 왕복할 뿐이죠. 차이는 그 왕복 운동의 거리(혹은 범위)에서 생깁니다. 호출과 응답의 양상에 따라 기억의 무한히 많은 가능한 상태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기억이 작용하는 두 메커니즘을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병진 운동, 즉 앞으로 나아가며 수축되는 운동입니다. 다른 하나는 회전 운동으로 순간의 상황에 가장 유용한 방식으로 꺾이고 휘어져 들어가는 운동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저는 원뿔의 모양이 욕조나 수영장 물을 뺄 때 구멍 위로 생기는 소용돌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진과 회전이 함께 일어나고 있기에, 기억은 결코 동일한 기억으로 재생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P의 평면이 어떻게 돌고 있느냐에 따라 기억이 돌아 들어오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혼란스럽고 괴로웠던 사춘기나 학창시절이 지나고 보면 참 좋았다고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요.
놓지마 신체줄!
베르그손은 병리학적 증거들을 제시하며, 뇌나 신경의 운동 기제들이 손상될 뿐 기억 자체는 손상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즉 여러 정신병들을 비롯해 우울증이나 트라우마는 원뿔의 꼭짓점 S, 즉 신체의 감각 운동 체계가 교란되어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것이죠. 그럴 때 기억은 공회전합니다. 이 말은 얼핏, 신체는 나약하고 변화 없는 정신은 우월한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정반대입니다. “신체란 기억이 실재로 향하게 하고 현재에 이어주는 유일한 기능”(298쪽)이죠. 보존되는 정신은 신체의 운동 기제 없이는 절대 현실화될 수 없습니다. 혹은 정신을 아주 추하고 폭력적으로만 실현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니체의 말마따나 정신적 극복을 위해서든 정신적 도야를 위해서든 우리가 먼저 바꿔야 하는 것은 신체입니다. 섭생, 관계, 양생을 바꾸지 않고는 치유도 공부도 철학도 그 어떤 자기배려도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신체는 정신을 고정하는 것, 즉 우리 정신에 추와 균형을 제공하는 그런 것이다.”(291쪽) 그러니까 베르그손은 정신의 작동 기제를 철저히 분석하면서 신체의 위상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뿔은 AB가 아니라 ABS입니다. 우리에게 달린 것은 삶에서의 주의인 S이지요.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하며 어떤 다른 습관을 들일 것인가, 행동의 양상을 어떻게 전과는 다르게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우리에게 실천적입니다. 채운샘은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면 우선 신체줄(?)을 잡아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시간의 문제
베르그손의 지속을 설명하기에 앞서 채운샘은 시간의 문제를 짚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 삶을 방향 짓습니다. 즉 시간관은 실천과 직결됩니다. 과거나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표상하고 느끼느냐가 자기 실존을 어떻게 조직할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간관에 삽니다. 여기서 시간은 직선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고, 과거는 현재의 원인이죠. 마찬가지로 미래는 현재의 결과로서 예측됩니다. 그렇기에 재화를 축적하고 생산을 성장시켜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실존은 온갖 그러한 계획과 대비로 가득합니다. 조기교육, 입시, 스펙, 고시, 적금, 투자, 보험 등이 그렇죠.
하지만 베르그손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원뿔 도식 어디에도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대비하고 예측할 미래는 없습니다. 확장되고 수축하며 서로에게 삽입되는 과거와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둘은 선후관계도 인과관계도 아닌 채 상호침투되고 있습니다. 그 과정 하나를 꼬집어 미래라고 칭한다 해도 이미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합니다.
니체의 시간은 둥근 고리입니다. 순간이라는 성문을 가로질러 영원이라는 골목길이 나 있습니다. “만물 가운데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필히, 이미 언젠가 일어났고, 행해졌고, 지나가버렸을 것이 아닌가?”(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62쪽) 차라투스트라의 난해한 말에 따르면 시간은 원환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나간 것이 영원히 회귀해 오고 있죠. 이는 허무감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매번의 ‘순간’은 돌아오는 원환에서 접선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거기서 약간만 빗겨나도 회귀하는 원환은 똑같지 않게 됩니다. 즉 미세하게 다른 원들이 그려질 수 있는 것이죠. 즉 순간은 매번의 윤릭적 결단이 요구되고 있는 자리입니다. 유예할 수 있는 ‘나중에’느 없죠. 이것이 시간을 표상하는 일이 윤리적인 문제인 이유입니다. 카프카의 시간관도 독특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서 나중에 다시 공부를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베르그손의 시간관이 말해주는 것은 직선적 시간은 상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선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현재 뒤에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현재 앞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시간관이 주는 윤리는 무엇일까요? 그건 마지막까지 읽고 생각해볼 일입니다.
이분법을 넘어가는 방법, 직관
4장 ‘이미지들의 한정과 고정에 관하여’에서는 정신과 신체에 대한 뿌리 깊은 표상, 질/양 및 비연장/연장이라는 이원론을 넘어가기 위한 시도로 직관의 방법이 시도됩니다. 우리는 보통 지각 현상은 감각적 질로 생각하고 지각된 대상은 양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맛, 향, 성격 등은 비연장적이며 대상은 높이, 넓이, 깊이를 가진 연장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과 질이 대립하고 연장과 비연장이 대립된다고 여기죠. 하지만 뷔페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음식의 맛이 같지 않듯, 양이 달라지면 질의 체험 자체가 달라집니다. 사과를 반으로 나누면 그 조각들의 성질은 여전히 전과 같을까요? 흰색 점은 검은 벽에 찍힐 때와 빨간 벽에 찍힐 때 같은 흰색 점일까요? 사물은 이미 의식에 참여하며 의식이 사물을 변형함을 우리는 원뿔 도식에서 이미 배웠습니다. 물질적 연장은 우리의 표상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운동에 대한 우리의 공간적 표상들과 싸워야 합니다. 운동은 과정이고 이행인 한 선이 아니며 그렇기에 점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즉 정적인 ‘지점’은 없죠. 점은 부동성이고 이것은 추상적 극한일 뿐입니다. 우리는 실재적 운동들과 그 운동을 재구성하는 정신의 기교들을 혼동해서는 안 되죠. 비록 그 기교가 논리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더라도 말이죠. 운동은 수학적이지 않고 물리적입니다. 변화는 궤도의 이동이 아니라 색띠 혹은 스펙트럼처럼 생각되어야 하지요.
베르그손은 이미 주어진 것을 정당화하는 철학을 비판합니다. 우리는 경험이 아니라 ‘실재의 마디들’, ‘사실의 선들’을 따라야 합니다. 즉 우리는 나눌 수 없는 전체이자 연속성인 지속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소금 한 알갱이가 들어가도 바다는 달라집니다. 그 소금이 녹아 있는 범위를 따로 잘라낼 수 없죠. 나눌 수 없는 것이라면 부분이 약간만 변해도 전체는 변합니다. 비록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유용성에 기반한 욕구들을 반영하는 것인 한, 그 불가분한 변화상 즉 지속을 따라가지 못하지만요. 그렇기에 베르그손은 직관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자고 권합니다.
직관은 “경험을 그 근원으로 찾으러 가는 것”(308쪽)입니다. 이는 경험의 발생적 차원을 탐사하는 일로서, 경험이 만들어낸 상상적 분절과 표상의 막들을 해체하는 동시에 거기에서 힌트나 징후로만 주어지는 전체를 다시 만드는 일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실재의 곡선으로부터 그와 같이 포착하는 무한히 작은 요소들을 가지고 그것들 위의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곡선 자체를 재구성하는 일이다.”(309쪽) 직관은 지속을 이해하는 방법론입니다. 베르그손은 철학자의 임무는 미분으로부터 출발하면서 하나의 함수를 결정해내는 ‘적분의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직관을 통해 순수 지속 속에 다시 위치하는 일이야말로 자유라고 말합니다. 이건 자유를 능력의 무한성 혹은 선택의 자발성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과는 매우 다릅니다. 지속을 체감함으로써 이르게 되는 자유. 아직 감은 잘 안 오지만 우리가 아는 자유의 이미지보다 훨씬 멋진 것 같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시간입니다.
<물질과 기억> 4장 및 요약과 결론(~409쪽)을 읽고 각자의 질문을 만들어오시는 것이 과제입니다. 읽었는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잘 정리해보면 되겠죠.
간식은 지영샘과 미연샘 주영샘 정아샘 난희샘께서 준비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자유도 그렇고, 시간도, 직관도, 지속도 우리가 알고 있던 이미지보다 훨씬 멋진 멋진 것 같아요^^
모두 분할 불가능한 전체 속에서 바라보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한데... 감이 올듯 말듯 하네요. 마지막까지 잘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