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주간 이어진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강독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베르그손의 문장들이 무척 유려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이리저리 뻗어나가는 설명을 따라잡으려 끙끙대느라 그 유려함을 음미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읽어온 것 같습니다. 마지막 후기를 쓰면서 다시 천천히 읽다보니 아름다운 묘사들이 다시금 눈에 들어오네요.^^ 하지만 그 아름답고 인상적인 문장으로 풀어내는 논의를 이해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인 듯합니다. 큰 줄기는 이해가 되는 것 같지만 세세한 부분들은 연결이 되었다 안 되었다 하네요. 샘께서 조언해주신 것처럼, 베르그손이 친절하게 요약해준 ‘요약과 결론’ 부분을 반복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
4장에서 베르그손은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지속의 관점에서 재규정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운동에 관한 거짓된 표상부터 문제삼습니다. 우리는 움직이는 것, 위치가 변화하는 것을 운동이라 생각하지요. 대상이 움직인 경로는 선의 형태로 지각해서 모든 공간과 마찬가지로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이는 우리 지성이 만들어낸 표상일 뿐이라고 베르그손은 말합니다. 실재적 운동은 상태 변화, 질의 변화이므로 분할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분할이 불가능한 것은 운동만이 아닙니다. 애초에 세계 자체가 분할 불가능합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세계는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변화하는 동시에 머무릅니다. 우리는 운동과 정지, 변화와 영원성이라는 두 항을 분리한 후, 물체들로 영원성을 나타내고, 공간 속의 동질적인 운동들로 변화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재 세계는 그런 식으로 구분되지 않는 불가분한 전체입니다. 다만 우리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생명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전체로서의 세계를 분절해내는 경향성을 갖게되었다고 베르그손은 설명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내 신체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해야 하고 유용하고 유용하지 않은 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 욕구들은 생명 보존이라는 목적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그 욕구들은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피해야만 하는 대상들을 구별하도록 이끕니다. 베르그손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상들 사이에 이러한 특별한 관계를 세우는 것. 샘께서는 다른 말로 하면 ‘욕망의 배치’라고 하셨죠. ‘나 이전에 욕망이 있다’고 한 들뢰즈와 베르그손이 통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실재적 운동은 상태의 이동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으로서의 세계는 베르그손이 말하는 지속으로서의 세계입니다. 지속은 모든 것이 분리불가능한 채로 뒤섞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베르그손은 이를 긴장(tension) 또는 에너지로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그 긴장과 에너지가 특정한 방식으로 변양, 교란, 변화된 상태가 바로 윤곽을 지닌 연장적인 것들입니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고체로 인식하는 모든 물체는 하나의 상태로 보아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운동하고 있는 하나의 상태’라고 해야겠지요. 연장적인 물체뿐 아니라 비연장적인 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뚜렷이 구분되는 여러 색들의 연결도 무한히 늘린다면 경계는 서서히 사라지고, 우리는 “지각된 질들 자체가 내적인 연속성에 의해서 상호 연결된, 반복되고 잇따르는 진동들로 해체되는 것을 느끼”(340)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고체로 표상하기 좋아합니다. 베르그손은 이에 대해, “고체들은 우리가 가장 명백하게 힘을 행사하는 물체들이어서 외부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야기하는 것들이기 때문”(333)이라는 설명을 내놓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운동의 요소에도 고체성을 개입시키는 습관이 있습니다. 진동들만 있는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이처럼 불안정적인 것을 안정적인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 우리 표상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무한히 늘려보면 진동 중에 있는 상태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나’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진동하는 상태’가 있는 거죠.^^
이처럼 연장적인 것이든 비연장적인 것이든 본질적으로는 무한한 운동 자체에서 출발합니다. 베르그손은 ‘질의 객관성’이라는 재미있는 말을 쓰는데요, 질 자체는 우리가 주관적 의식으로 파악하기 전에 이미 무한한 운동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 운동하는 상태를 끊어낸 결과가 우리가 느끼는 감각적 질입니다. 질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물질의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속, 상이한 리듬의 공존
우리는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으로서의 세계를 우리 삶의 필요에 따라 끊어냅니다. 베르그손은 이 행위를 ‘수축’ 또는 ‘응축’으로 부르는데요, 수축의 정도에 따라 상이한 리듬들이 만들어집니다. 수축의 정도는 의식의 긴장이나 이완의 정도를 말합니다. 긴장이 높다는 것은 원뿔의 꼭지점 S와 밑면 AB 사이의 운동을 더욱 역동적으로 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샘께서는 무수한 타자가 끼어드는 책읽기의 예를 들어주셨죠. 같은 책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도 무수한 것들이 한꺼번에 수축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읽고 있는 문장밖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수축이 일어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개체는 각자의 수축 속에서, 각자의 원뿔 운동 속에서 이 세계의 한 순간을 구성합니다. 그런 우주가 지속이라고 샘께서는 정리해주셨어요.
수축작용은 달리 말하면 지각작용이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은 이렇게 정리하지요. “지각하는 것은, 요컨대 무한히 펼쳐진 한 존재의 막대한 기간들을 더욱 강렬한 삶의 더욱 구분된 몇몇 순간들로 응축시키는 것으로, 그렇게 해서 매우 긴 역사를 요약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지각한다는 것은 고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347) 뒤로 이어지는 묘사도 전부 옮기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는데요, 지속으로서의 우주와 그것이 포착되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묘사합니다. 샘께서는 이 부분(347~348)이 세잔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와 거의 일치한다고 하셨죠. 우리는 세잔처럼 역동적인 원뿔 운동을 통해 ‘심층적으로 존재하는 변화’를 포착할 수도 있고, “무수한 반복들과 내적인 진화들의 결과들”(348)만 습관적으로 포착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자유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필연성과 자유
물질의 세계는 작용과 반작용을 무수히 반복하는 반복의 세계입니다. “받아들인 작용에 대해 그것의 리듬에 꼭 맞으면서 같은 지속으로 연속되는 직접적인 반작용으로 답하는 것,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350) 이것이 물질의 근본적인 법칙입니다. 하지만 신경계가 발달한 존재는 이러한 필연적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를 현재로 수축하는 원뿔의 운동이 역동적일수록, 다시 말해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반응을 유보할수록 우리는 물질의 리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반응을 유보한다는 건 무엇보다 습관대로 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그 반복의 리듬으로부터 벗어나는 만큼 자유를 얻고, 반복이 아닌 새로운 것,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유와 필연은 서로 대립되지 않습니다. 필연성은 우리 삶의 조건입니다. 그 필연성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구성할 것인가.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 물음입니다.
<물질과 기억>의 마지막 문장은 자유와 필연의 관계뿐 아니라 정신과 물질의 관계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네요. 옮겨봅니다.
“자유는 언제나 필연 속에 깊은 뿌리들을 밀어넣고 있으며, 필연과 함께 내밀하게 조직되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은 물질로부터 지각들을 빌려 와 거기서 자신의 양분을 이끌어내고, 자신의 자유를 새겨 놓은 운동의 형태로 물질에게 지각들을 돌려준다.”(409)
그럼 <창조적 진화> 강독에서 뵙겠습니다!^-^*
“고체들은 우리가 가장 명백하게 힘을 행사하는 물체들이어서 외부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야기하는 것들이기 때문”(333)에 우리는 사물을 고체로 상정한다는 말이 쑥 와 닿네요. 현대물리학이 아직도 매달려 있는 고체성은 실재가 아니라 그저 편의상 혹은 유용성 때문에 설정한 기준이 되겠네요.
물질도, 공간도, 관계도 분할가능한 덩어리로 나누어서 보는 습관의 기원은 이렇게 대단치 않은 데 있다는 통찰이 대단하네요!
원뿔을 수축시키고 꼭직점을 확장시키는 세련된 운동능력이 풍요와 자유를 실현시킨다는 이야기는 늘 간직해두고 싶네요!
<창조적 진화>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