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중 하루, 그것도 일요일 아침을 철학으로 시작한다니, 이 얼마나 고귀한 삶입니까? ^^ 게다가 서양과 동양, 그것도 철학이 시작되는 고대에서부터 출발하니,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하든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차지할 수 있는 2023 계묘년이 되겠군요. ㅋㅋ 1년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유의 발생과 지리 그리고 유목
1, 2학기는 서양 고대의 사상을 차근차근 배울 건데요. 시작은 고대 그리스입니다. 민주주의의 기원, 데모크리토스, 소크라테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걸출한 철학자 등 정치와 철학의 정수가 있는 시대로 알고 있죠.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유가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교과서적으로 공부한 저희에게 고대 그리스의 사유는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연고가 없죠. 하지만 모든 사유는 지리적 환경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즉, 사유가 발생하는 데는 지리적이고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죠. 이번 시간에는 지도를 참고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사유가 발생하게 된 배경을 살펴봤습니다.
저는 <축의 시대>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부터 2세기까지, 특히 6세기 즈음 사상의 공진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탈레스, 소크라테스가, 황하에서는 공자가, 지금의 히말라야 인근에서는 석가모니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사유의 지평으로 진입할 수 있었죠. 이들의 공통점은 모든 인간 실존에 대한 정의와 사랑에 기반했다는 데 있습니다. 인종이나 신분, 계급 기타 등등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인간이라면 모든 사람을 환대할 수 있는 사유를 발명한 것이죠. 베르그손은 진화의 관점에서 이를 “사랑의 비약”이 일어났다고 표현합니다.
실제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유의 급격한 변화는 얌나야(Yamnaya) 같이 여기저기 떠돌며 접속하는 유목적 흐름과 연관됩니다. 가령, 우리가 그리스 철학으로 알고 있는 사유는 아테네 토박이들이 아니라 이오니아인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저희가 공부할 탈레스 같은 사람들이 이오니아에서 건너온 철학자들이 대표적인 예죠. 여기저기 떠도는 자들이 살아남으려면 ‘환대가 생존에 유리한 기술’이라는 사고를 발명해야만 했죠. 그리고 그리스의 사유가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 철학이 저 멀리 페르시아에까지 전파되어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건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를 비롯한 이슬람 철학자들에 의해 고대 그리스 철학이 보존되고 지속적으로 연구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죠. 요약하자면, 타자들을 환대해야 하기 때문에 사유가 발생했고, 타자들과 접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유가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철학할 때!
페미니즘에서는 동성애, 이성애라는 이분법적 성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기 위해 퀴어(Queer)라는 말을 사용하죠. 퀴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데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묘한’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최근 양자인류학에서는 이 퀴어야말로 자연의 작동 원리라고 합니다. 자연은 끊임없이 얽히고 섞임으로써 진화해왔기 때문에, 자연의 일부인 우리에게 익숙한 구도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과의 마주침은 필연적이라는 것이죠. 채운쌤께서 인용하신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의 구절이 주목하는 부분도 퀴어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서사시를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는 이유는 ‘선택 받은 나’ 같은 관념이 일절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1부 부록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요. 매우 인상적이어서 좀 길게 인용해볼게요.
“로마인들과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인류에 공통적인 처참함에서 벗어나 있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스스로를 세계를 지배하도록 운명적으로 선택받은 민족이라 여겼고,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복종에 대한 정확한 대가로 신이 지켜준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방인, 적, 패자, 예속민, 노예를 멸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서사시도 비극도 없습니다. 그들은 비극을 검투사들의 경기로 대체했지요. 히브리인들은 불행을 죄의 징표로 여겨 떳떳이 경멸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패배한 적들을 신이 증오하는 존재로 여겼고, 그래서 이들을 잔혹하게 대하면서 심지어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믿었습니다.
(…) 유럽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 어떤 것도 그 가운데 한 나라에서 최초로 등장한 시의 가치를 따라가진 못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만일 다음의 것을 알게 된다면, 서사시적 천재성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운명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절대로 믿지 않는 것, 힘을 결코 찬양하지 않는 것, 적들을 증오하지 않는 것, 불행한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는 것이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가까운 시기에 이것들이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시몬 베유가 말한 것처럼, 최근 우리의 행보를 보면 일리아스가 보여주는 진리를 체득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떠도는 유목민의 삶이 DNA와 정신에 새겨진 우리의 본성인데, 지금은 난민들을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특히 기후위기로 인해 난민이 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미국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난민 문제를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죠. <위태로운 삶>을 보면, 최근에도 미국은 국경을 넘으려는 이민자들을 강제로 잡아 가두고 무제한적 권력을 가한다고 합니다. 한국도 별반 다르진 않습니다. 전장연의 투쟁에 대해서도 장애인들의 문제로 너무나도 쉽게 일축하니까요. 과거에는 전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누구나 실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치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그러한 실존적 위기를 소수에게 집중시키고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실존을 위해서라도 철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어찌 보면 지금 우리는 남들의 문제에 무관심하더라도 일신의 안락함을 누릴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고, 홀로 쾌락을 누릴 수 있도록 보조하는 도구들도 있죠. 그래서 별로 사유가 발생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매번 똑같은 문제에 발목 잡혀 사는 것 같습니다. 이 굴레에서 빠져나오려면 철학 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입니다. 앞으로 1년 동안 강의를 따라가면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철학을 하게 되는지 동서양을 가로지르며 배워보죠!
*강의 중 채운쌤께서 말씀하신 서양 철학사를 공부할 때 참고할 만한 책들입니다.
이정우, <세계철학사>, 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나남
사유가 발생한 지리적 환경을 보는 게 재밌었어요-! 6세기즘에 서로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사상의 공진화가 일어났다는 점도 놀랐습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속도 덕분일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