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의 개인적 일정이 헉헉 거릴만큼 정신이 없어서 후기를 겨우 썼습니다. 내용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가지만 정리 잘하자고 마음먹고 썼네요...
신화적인 것을 뛰어넘은 6세기 자연철학자들
두번째 수업에서는 초기 그리스 철학을 형성하는데 근간이 되었던 자연철학자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들 철학자들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들이 세계의 근원이 뭐라고 얘기했다는 것 보다 그동안 신을 통해서 설명하던 세계를 이들은 원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유구조가 바뀐 일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변화를 얘기해 주는 것이라고 하네요.
이 시대 자연철학자를 포함해서 공자나 붓다도 무엇에 대해 자기사유를 구축했나를 살펴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미신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겪어 왔습니다. 갑자기 닥친 불행과 착하게 살았지만 끔찍한 일들을 겪을 수 밖에 없고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이 세상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해 볼까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도 그렇지만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을 때 뭔가 이해는 할 수 없고 마음은 죽을 것 같을 때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줄 수 있고 당장의 진통해소의 효과가 있는 것에 의존하기 쉬운데 대체로 기복적인 신들에 의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시대역시 이런 자연철학자들이 발생하기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이해 불가능한 겪음을 이 초월적인 힘들에 내 맡기는 삶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씩 이 신들이 지배하는 질서에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질서를 점점 인간이 이해해 보려고 하는 시대로 바뀐다고 하는 게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는 이런 패턴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세시대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이해하기보다 또 초월적인 힘들에 내 맡기고 의지하려했었고 그래서 르네상스 시절에 그리스를 주목하게 되는데 고대 그리스는 어떻게 이 세상을 이 세상자체로 이해해 볼 수 있을까?란 질문이 싹텄기 때문에 그때 기독교 전통 속에 완전히 묻혀있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 이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는 과학이 엄청 발달하게 되는데 그 발달한 과학을 바탕으로 스피노자라는 어마어마한 철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는 사람들이 가진 두려움과 미신을 고발하게 됩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수동적이고 안이한 태도로 행복을 바라고 잘되길 바라는지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리고 계몽주의가 되고 근대가 되어도 인간은 모든 지구에 우위에 있다고 하는 얼토당토 않는 믿음에 휩싸여 신을 믿는 대신 진보를 믿고 역사를 믿었기에 이번엔 우주원리에 바탕을 둔 니체 철학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채운선생님은 인간은 반복해서 두려워하고 두려울 때 마다 무턱대고 믿는 경향이 있다며 당장의 두려움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사고 체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며 늘 인간은 그러했다고 얘기하십니다. 역사적으로도 늘 미신에 빠지고 신화에 빠지는 시기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신화라는 것은 인간이 환상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신화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상적인 스토리에 빠져서 예를 들면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겠지 같은 현상적인 스트로리에 빠질 때 그럴 때 마다 그걸 고발하는 철학자가 등장하는데 그 환상을 고발하려고 할 때 철학자들은 출발점을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오늘날 우리가 주역을 여기저기서 배우려고 하는 현상도 무의식적으로 근본적인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야 되지 않는가라는 이런 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신 차려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스타트 라인은 이 세계가 무엇인가 질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는 뭐지라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이 보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의 철학적 담론들의 키워드가 물질이라고 합니다. 물질은 무엇인가? 신체가 뭐지? 아주 기본적인 것들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는데 그것이 동양에서 말하는 易이라고 생각한다고 얘기하셨습니다.
다시 그리스 시대로 돌아와 이 당시 이오니아 출신의 전통을 가진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어보더라도 신들을 믿으라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들도 인간들하고 똑같은 짓을 하는데 신하고 인간이 왜 그런 짓을 하는건지, 그 본성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한 것인데 여기서 본성을 퓌지스라고 하는데 퓌지스는 자연 혹은 물질, 본성이라고 번역된다고 합니다. 이런 신화적인 언어를 넘어 가서 질문한 사람들이 6세기 자연철학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신화적 세계로부터 자연학적 세계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자연학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학이나 정치학과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자연학에 반대되는 개념은 초월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왜 그런지 우리는 알 수 없고 이 세계 바깥에 있는 초월적 존재가 조종하는 것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을 이 자연철학자들은 그 신을 퓌지스로 바꿔 놓았고 그것이 바로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라는 질문의 형식이었다고 합니다. 또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세상은 어떤 하나의 질료가 있는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체가 변화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본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기존의 사고들은 물질들은 있는데 물질이 죽고, 늙고, 썩게 만드는 사물의 변화를 이 세계 바깥의 있는 무언가로 설명하려 했고 그것을 ‘신’이라고 이름 했던 것이라면 자연철학자들은 그 궁극적인 기체가 변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세계라고 질문을 한 것이고 이것은 물질과 운동이 결합된 것으로 그것이 바로 주역의 易이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주역의 易은 신이 아니고 易도 그렇고 道도 그렇고 그 자체가 기본적인 운동원리이며 易이라는 것은 천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 사이에 운동하고 있고 그것을 그리스 철학자의 식으로 얘기하면 세계는 기체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세계는 역이고 그 운동의 결과가 사물들인 것이고 이 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동양이 바라보는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한계를 지키면서 존재하는 상태인 법의 우주가 실현된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마땅히 제자리에 있는 풍경이 동양의 생각인데 이는 정치학적인 개념일 수 있지만 그 근원을 따져보면 자연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양 고대에서도 마땅하다, 법적이다, 정의롭다고 하는 것이 코스모스(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한계를 지키면서 제자리 있는 상태)가 실현된 상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탈레스나 아낙시만드로스 등이오니아 학파들이 주장한 자연철학은 자연에 대해서 주장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포함한 이 세계를 퓌지스에 입각해서 이해하려 했던 학문이고 그것이 자연학이라고 합니다.
채운선생님은 우리도 이 자연학적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해야 이 시대를 넘어갈 수 있을거라고 하시네요... 이 시대의 신화에 붙들리지 않으려면 세계를 원리로 이해하려 부단히 애써야겠습니다. 정리 할 것이 더 있으나 시간과 체력의 한계로 여기서 후기를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도덕이 아닌 윤리가 필요하고, 윤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다르게 이해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ㅎ 게다가 세계를 다르게 이해하는 것과 유랑하는 삶이 무관할 수 없다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왜 거의 모든 성현들은 공통적으로 유랑했을까?' 아무래도 그건 중심으로부터 이탈하는 사유가 혹은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유가 끊임없이 도주하는 삶으로 표현되고, 때문에 언제든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역량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흐음... 주역의 이런저런 얘기들도 떠오르네요. ㅋ
신학적 전통과 자연주의의 돌고 도는 운동! 그 운동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관점의 폭을 넓혀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교 강의에서 들었던 그 운동이네요 ㅎㅎ)